하늘 높이로 날아올랐다

그 후 환이의 소식은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아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엄마가 그 충격에 쓰러지시자 휴학계를 내고 오빠와 같이 서울로 올라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환이를 잊은 건 아니었다. 어디에 있든 그는 나와 함께였다. 특히 가을이 깊어지자 난 그 생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큼하게 퍼지는 솔향기와 멀리로 짙푸르게 펼쳐진 능선, 부드럽게 이는 바람. 온통 내 안에 갇힌 환이였다.

그런데도 난 그 놈의 자존심 때문에 절대 그를 찾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환이의 소식을 들은 건 우연히 만난 진숙이 결혼식장에서였다.

“환이선배 졸업하자마자 아프리카에 갔잖아. 교수님이 L그룹인가 어딘가 하는 연구소에 추천을 해 주셨는데 다 마다하고 H선교단체에 합류해서 떠났어.”

“지영인?”

“지영이? 너, 몰랐니? 니네 단짝이었잖아.”
“걔도 아프리카에 있니?”
“얘 봐, 연락 못 받았니? 그 기집애 졸업도 하기 전에 결혼했잖아, 버스회사 사장아들하고, 기집애, 그러고 보면 재주도 좋아....”

“환이 혼자서 아프리카에 갔다고?”

“그래, 그 선배 지금쯤 그곳 어딘가에서 한국의 가을날을 그리워하고 있을 거다.”

온몸의 힘이 빠졌다. 뭘 기대했던 것인지, 아마도 난 그때까지도 다시 환이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지영이를 옆에 낀 모습이라도. 그래서 거리를 걷다가도 내 첫사랑과 닮은 남자를 보면 주체할 수 없게 가슴이 뛰었는지도. 그런데 그가 아프리카에 있다니.

그 후 환이의 소식은 그 어떤 것도 듣지 못했다. 그렇게 내 첫사랑은 10월과 함께 사라졌고 내 안에 깊이 묻혔다. 그런데 지난여름 둥지에 갇힌 카나리아가 날아가자 이상하게도 난 환이를 생각해 냈다. 아린 상처를 핥듯 조심스럽고도 간절하게.

봄이 오자 내 어지럼증은 더 심해졌다. 벌써 몇 년 째였다. 숨이 차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들이. 혈액검사 결과 혈색소가 작년보다 낮았다.

수치가 7.4로 나왔다. 의사는 산부인과 쪽을 권했다. 하지만 남편은 입술 끝을 내려 웃었다.

마치 내가 처리 곤란한 낡은 장롱이라도 된다는 듯. 나 역시 예상했던 것이라 남편의 그런 반응에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느 해보다 봄빛이 헛헛해 자꾸 안으로 움츠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내 어지럼증은 철의 결핍에서 오는 게 아닌지도 몰랐다. 철의 결핍은 허허로운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일 테니. 추수 끝난 빈 들녘에 덩그러니 남겨진 허수아비. 스산한 가을바람이 들녘을 헤집을 때마다 휑하게 비워버린 가슴을 움켜쥐어야하는 허허로운 영혼. 그러니 피톨 깊숙이 대량의 철분제를 침투 시킨다 해도 7.4 빈혈이 해결되지 않을 건 분명했다.

한 이틀 내린 봄비에 도심의 빛깔들이 투명해지자 드디어 난 집을 나섰다. 그러자 화단에 굳은 흙덩이를 뚫고 올라오는 여린 새순의 설렘보다 더 강한 떨림이 왔다.

“아무 일이나 괜찮아요. 카나리아를 아프리카에 보낼 수 있는 돈이면...”

“네? 카나리아를 아프리카에 보내요?”

상담사인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동안 일을 하신 경험은 없으세요?’ 라고 물었다.

순간, 난감해졌다. 지금껏 내가 한 노동에 대해 그 누구도 내게 대가를 지불해준 적 없으니 일을 했다고 하기엔 부끄럽고 뻔뻔스러웠던 것이다.

“특별한 경력이 없으시면 취업하시기 어려워요.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어때요? 교육을 좀 받아보시는 것이...?”

난 그날 그녀의 조언대로 일자리 박람회장을 찾아 직업상담사 교육을 신청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난 또다시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 헌데, 신기하게도 매번 되풀이 되던 꿈이 아니었다. 달랐다. 결박된 채 꼼작할 수 없었던 내 몸이 자유롭게 움직여졌던 것이다.

그래서 마음껏 벌판을 누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난 여태 누군가에 의해 결박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마도 내 스스로 자신을 꽁꽁 가두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예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인지.

오후가 되자 비 개인 하늘 위로 무지개가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빨주노초파남보, 캐리어에 넣어 둔 내 날개옷을 꺼내 입기에 딱 알맞은 날씨였다. 아니, 남편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세레나데를 부르기에 딱 적당한 날씨였다. 지난여름 카나리아가 둥지를 떠나던 날씨도 눈부시게 화창했으니.

먼저 새장 문을 열고 카나리아를 꺼내들었다. 녀석은 내 손길이 닿자 몸을 종종대며 움찔했다

하지만 녀석은 곧바로 내 뜻을 알아챘다는 듯 얌전해졌다. 그러자 오히려 녀석을 잡은 내 손이 사정없이 후들댔다. 창문을 열고 긴장한 내 손가락을 풀었다. 그러자 녀석은 단숨에 허공을 박차고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번개처럼 푸른 하늘위로 솟구친 녀석의 몸이 작은 별처럼 반짝이다 구름 속으로 사라져 갔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조심스럽게 날개옷을 꺼내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체취에 방금 전보다 더한 떨림이 왔다.

심호흡으로 잠시 숨을 참은 뒤 날개를 들어 천천히 양 팔에 끼웠다. 그리고 그것을 새의 날개처럼 활짝 펼쳐들었다. 이어 몸을 곧추 세우고 발을 굴러 땅을 박찼다. 아, 내 몸이 솟구쳐 올랐다.

너무도 가볍게, 금세 하늘 높이로 내 몸이 날아올랐다.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짙푸른 능선위로...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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