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사

"흐 응! 언니는 이런 구경 처음인 것 같어! 뭐, 우리가 항상 오는 것도 아니야, 오늘만 특별히 나왔어, 언니는 오늘 운 좋게 잘 나온 거야, 그러니까 딴 데 가지 말고 여기서 놀다가 가. 어, 비껴요 비껴! 오빠, 궁뎅이 좀 치워봐, 하이고, 궁뎅이도 크기도 혀. 후딱후딱 좀 일어나봐, 우리 언니 좀 들어가게."

"어머! 싫어요. 아, 아니라고요. 나 난, 싫다고요...."

그러나 빨간원피스는 사람들을 헤집고 버팅기는 날 공연장 제일 앞쪽에 앉혀 놓고 말았다. 사람들이 그런 날 쳐다봤다. 빨간원피스의 수선스런 몸짓에 울상으로 밀려들어오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던 건지, 아니면 이것도 하나의 짜여 진 각설이들의 각본으로 생각하는 건지 사람들은 심하다 싶게 웃어댔다.

그러니 파르르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엉거주춤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주저앉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거두어지면 그때 빠져나가면 되니까. 나를 그렇게 맨 앞줄에 앉혀놓은 빨간원피스는 각설이패들 중의 제일 나이어린 막내인 듯 앳되보였다. 그가 맡은 일은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엿을 파는 일인지 아니면 나처럼 가려는 사람을 불러 앉히는 일인지 부지런히 엿판을 이고 실룩실룩 사람들 사이를 누볐다.

"머시여, 긍게 요새 세상은 남자들의 값어치가 너무 없다 이 말이요. 한마디로 다 똥값이 되었다 이 말이지. 다시 말혀 옛말에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라고 혔는디, 요새 땅값이 비싸요? 하늘값이 비싸요?"

".....!!"

" 앗 따 답답시러 죽겄네, 후딱후딱 대답조께들 히보시요. 땅이 비싸요? 하늘이 비싸요?"

"....!!"

"옴마, 시방 다들 벙어리들만 온 것이여? 뭐여, 머시냐고?"

".....!!"

"아이고! 이 연놈들아! 속 터져 죽겄어! 아, 땅이 비싸? 하늘이 비싸아?

".....!!

"흐 미! 속 터져 죽겄고만, 땅이 비싸다 이 말이여! 그래서 땅인 여편네들이 다 들고 뛰어 일어난다 이 말이라고. 시팔, 더 웃긴 것은 땅이 비싸다, 비싸다 헝게, 우리마누라 저도 비싼 몸인 줄 알고 날 아주 거렁뱅이 취급을 한다 이거요. 오늘도 이렇게 추워 죽겄는디, 저는 땃땃한 아랫목에 있음서 날더러 저 여름에 입다 벗어놓은 속고쟁이 입고 엿 팔어 오라고 이렇게...흑흑 날 내 보내고...."

오이도남자가 자신이 입은 얇은 입성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며 입을 삐죽대자 그제야 입을 다물었던 구경꾼들이 웃음보를 터트렸다. 그것에 나는 옆자리의 사내아이에게 손에 든 엿봉투를 건네주면서 터지는 웃음을 지그시 눌러 참았다.

그리고 사람들을 뚫고 나가려던 생각 대신 코트 깃을 세워 얼굴을 깊숙이 묻었다. 혹 누군가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물론 그 자리에 날 아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염려로 난 의식적으로 몸을 사렸다.

다행히 각설이들이 옛날 5일장의 약장수처럼 가랑이에 바가지를 다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지만 외설스런 음담패설로 좌중을 희롱하는 것은 여전했다. 특히 오이도남자의 욕설은 더 심했다. 그는 남녀 상하를 가리지 않고 욕설을 해댔다.

그의 욕설의 대상은 여자에게 당하는 남자이거나, 남자에게 눌림을 당하는 여자의 얘기가 주였다. 아마도 그렇게 고르게 성 평등적 이야기를 해야만 공감대를 얻어내 엿을 많이 팔수 있다는 생각이었던 건지. 오이도남자는 여자와 남자를 똑같은 위치에 올려놓고 까불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세상이치 또한 욕설이었다.

그러니 이쪽저쪽 손해 볼 것 없다는 얼굴로 사람들은 자지러졌다. 문득 그들의 그런 모습에서 옛적 탈을 쓴 광대놀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시대의 탈을 쓴 광대들이 위세 높은 양반들을 풍자 희롱하며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했던 그때의 광대놀음 말이다.

진득진득 떡칠한 화장이 마치 탈바가지라도 되는 듯 서슴없이 욕설을 퍼붓고도 금세 아무렇지 않게 천연덕스런 표정을 짓는 오이도남자. 하긴 길거리의 각설이굿이 옛 서민놀이인 광대굿이나 다를 건 없을 터였다.

오이도남자는 자신의 신랄한 욕설에도 사람들이 백치(白痴)처럼 웃어대자 한심스럽다는 듯 푸른 눈두덩을 새치름하게 내려 깔아 사람들을 흘겼다. 그러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한 표정으로 빙 둘러선 사람들을 훑었다. 그렇게 좌중을 쥐락펴락 휘어잡던 그의 눈빛이 문득 내 눈과 부딪쳤다.

순간, 난 남자의 눈빛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세차게 뛰어오르다 차분히 가라앉는 파도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런 눈빛이 한참을 날 바라보더니 수면으로 가라앉는 물살처럼 지그시 감겼다.

"달님이시여, 높이높이 돋으시어 멀리 멀리 비춰 주소서. 시장에 가 계신가요? 위험한 곳을 디딜까 두렵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놓으십시오. 당신 가시는 곳에 저물까 두렵습니다."

아, 그건 뜻밖에도 정읍사였다. 현대말로 풀이 된 백제의 노래. 눈을 다소곳이 내려 감고 아까와는 달리 진지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오이도남자가 고대가요를 읊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난 너무 생뚱해 나도 모르게 '헉' 숨을 들이켰다.

"알란가 모르지만 이게 백제의 정읍사라는 거요. 산 넘고 물 건너 장사 나간 서방이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각시가 높이 뜬 둥근 달을 보고 지 서방의 안전을 기원하며 불렀다는 노래지요. 그런데 난 솔직히 배운 것 없고 무식해서 이놈의 노래가 서방의 안전을 비는 노랜지, 아니면 각시가 딴 뜻이 있어 부른 노랜지 그건 잘 무르겠단 말이요.

하지만 각시가 집 나간 서방에게 관심 있어 부른 노래라는 건 가방 끈이 짧은 나도 금방 알 수는 있단 말이요. 서방이 걱정되어 불렀든, 자신을 두고 허튼짓하는 놈이 야속해서 불렀건 각시가 지 서방을 생각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는 거지요. 그런데 요즘엔 이런 정읍사가 무색한 세상이 되었으니 문제란 말이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져 금방 딴 곳에 마음을 두고 지랄들을 떠는 세상이 됐다 이 말이요. 아니, 말로만 부부지간이지 서로 남남처럼 관심 없이 사는 쇼윈도 부부가 너무 많다 이 말이라고요. 시팔, 우리 여편네도 나 이렇게 홀딱 벳겨서 엿장시 보내놓고 지금 딴 짓거리 하고 있는지 모르고요. 한 지붕아래 살면서 너 따로 나 따로 남남지간인 부부들, 시방 우리는 이렇게 무늬만 부부로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가만, 그러고 본게 여기에도 좀 있을 법 헌디요?”

갑자기 오이도남자가 말을 하다말고 새치름한 빛으로 사람들을 훑었다.

“그려! 있고만요, 여기에도 있어요! 저어기 저 짝, 아자씨! 그려 막 뒤로 고개 돌리는 아자씨, 당신 말이요, 그리고 이짝에 이 아줌씨! 아닌 척 하지만 나는 얼굴만 보면 금방 알 수 있당게로요."

순간 난 얼굴에 숯불을 올린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가 바로 ‘이짝 아줌씨’ 하며 날 가리켰던 것이니. 더구나 측은하다는 듯 날 내려다보는 꼴이라니. 젠장, 왜 그랬을까, 발딱 일어나 오이도남자의 따귀라도 올렸어야 했는데, 난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들여다보는 걸로 남자의 말을 무시하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헌데, 내가 그렇게 애써 무시하는 척 딴청을 피우자 오이도남자는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노래를 들려주겠다며 내 쪽으로 지그시 시선을 던졌다. 

"자, 오늘은 이 오이도남자가 그런 외로운 그대들을 위해 천년을 빌려준다면을 불러들이겠습니다. 야, 뭐하냐? 이놈아, 빨랑 음악주어."

"당신을 사랑하고 정말정말 사랑하고...

만약에 하늘이 하늘이 내게 천년을 빌려준다면

그 천년을 당신을 위해 사랑을 위해 아낌없이 모두 쓰겠소."

그러니 난 더는 표정을 감출수가 없었다. 아니, 오이도남자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각설이 주제에 정읍사를 읊어대는 것조차도 생각지 못한 것이었지만 그것보다 요즘세태를 그것과 결부시켜 감히 날 희롱하다니, 유명극장의 오페라배우도, 뮤지컬배우도 아닌 그깟 각설이 주제에 지가 세상을 알면 뭘 얼마나 안다고 이러쿵저러쿵 주절거리는 것이 괘씸해져 분노로 가슴이 뛰었다.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처음부터 여기에 앉아 있을 게 아니었다. 헌데, 우습게도 난 다시 엉거주춤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도 날 붙잡는 사람이 없는데, 더구나 각설이의 농도 유하게 받아주지 못하는 마음씀씀인데도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뭔가가 날 강한 힘으로 붙잡는 기분이었다. 남자의 눈빛, 그랬다 오이도남자의 눈빛이었다.

‘그래, 알아! 당신이 얼마만큼 힘들어 하고 있는지.’

분명 남자의 눈빛은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분노는 짧은 순간이었다. 대신 부끄럽게도 그가 '그 천년을 당신을 위해 아낌없이 모두 쓰겠소.'라고 부르는 동안 먹먹해진 목을 지그시 누른 채 호흡을 참았다.

고대가요를 읊는 각설이, 어느 순간은 경박스럽다가, 또 어느 순간은 곤혹스러울 정도로 진지한 눈빛의 남자. 꼭 들끓는 바다를 연상케 하는 각설이. 결국 난 그가 연이어 부른 몇 곡의 노래를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그것 또한 내 착각이었던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날 바라보던 그 남자의 눈빛이 차르르 밀리는 썰물처럼 처연해졌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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