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인 충남문학관 관장 / 작가

[뉴스포스트 전문가칼럼=이재인] 우연한 기회에 친우를 방문했다. 친구가 어디에선가 헌책을 받아 정리하고 있었다. “어디서 이렇게 좋은 책을 기증 받았어요?” 친구는 가감 없이 말했다. “대학도서관에서 폐기처분하는 도서인데 받고 보니 좋은 책, 새 책도 있어 나름 좋기는 한데 좀 말하기 거북해…. 이런 책도 있어….”

친구가 주워들은 책은 발간된 햇수로 3년도 안된 역사책이었다. 3년도 안된 책을 고서로 폐기한다는 데에는 대학도서관에 문제가 있다고 느껴졌다. 필자도 대학에서 정년 퇴직시 1만권이 넘는 희귀 장서를 기증처를 찾지 못하고 2년이 지난 후에 개인회사 북 카페에 넘겨주는 수모를 당했다.

책 한 권을 사기 위해 점심도 숱하게 건너뛰었다. 일본책, 미국책을 구하기 위해서 해외여행도 못간 경우도 있다. 그리고 자료를 구하기 위하여 강원도 첩첩산골이나 부산 통신기지창에 있었던 허름한 스레트 지붕도 뒤지곤 했다.

이런 책들을 대학에서는 기증의뢰를 할 때마다 받지 못한다고 손사래를 쳤다. 첫째 이유는 도서를 보존할 공간이 없다는 점이다. 둘째로 헌책은 학생들이 선호도가 없다는 이유이다. 귀중한 자료라 하더라도 안 된다는 담당자의 전언이다.

이런 사태의 심각성은 오늘날 대학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셈이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공간은 있어도 도서를 보관할 장소가 없다는 핑계는 어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책은 문화유산이고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고 나와 공동체의 정신적 보고이다.

이런 책이 냉대 받고 사서의 자율적 판단에 의해 폐기되는 사례는 한 번 되짚어 보아야만 할 것이다. 또한 사서의 경륜과 안목이 얼마만큼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두 분의 사서의 재량으로 책이 폐기되어 고물상에 팔려가는 처지는 우리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가 농업시대에서 산업화로 발전한 근원이 책의 힘이고 그 동력으로 선진국의 문턱에 이르렀다. 선진국 문턱이라 하여 무장해제를 하겠다는 대학 당국에 혹독한 충고를 보낸다. 대학을 왜 상아탑이라 하였는가? 대학도서관을 국민의 심장부라고 일컫던 때가 불과 엊그제이다.

그런데도 이런 사태를 초래한 대학당국에 직무 감사를 청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필자를 비롯한 기성세대들은 ‘책을 천히 여기는 자는 지아비를 천하게 하는 짓’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정신문화의 포인트가 도서관이다.

지금 선진국 어느 도서관이든지 공간을 핑계로 역사 문화 지리서적을 폐기처분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기를 권유한다. 쓸모가 없는 책이라도 농어촌 경로당이나 부녀회관 같은 공동체에 가면 자료가 될 만한 책을 얼마든지 수용할 수가 있다.

대학 사서 몇 사람이 편리주의에 오염되어 이런 사태가 벌어진 셈이다. 저수지 댐이 무너지는 건 커다란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작은 구멍 바늘구멍에 물이 스며들면 큰 둑은 허물어지고 인명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참사가 벌어진다. 도서관 문화도 이와 같은 처사 같아서 불안해 진다.

책을 관리하기에 사서들의 노고도 크다. 그렇다고 하여 자료를 아낌없이 던져버리는 태도는 만시지탄은 있지만 제발 삼가 주기를 권고한다. 나는 작가이다. 어제와 오늘의 역사를 소설에 투영시킨다.

남에게 직설적인 화법보다 한 행간 한 문장에 담아서 위로부터는 대통령, 그리고 국무위원이나 국회·법조계에 풍자를 통하거나 은유의 방법으로 속삭였다. 소리치고 폭력을 선동하는 시대는 갔다. 조용히 낮은 음성이 호소력이 있다. 그런 은유의 방법이 시와 소설이고 수필이다.

이런 게 없다면 죽은 사회가 될 것이다. 사서 선생님들이여! 책에 습기나 햇볕을 쪼이는 일은 괴롭고 귀찮은 일이다. 세상의 올바른 일이란 다 그런 고통 속에서 생성되는 게 세상사이다. 세상사에 책은 꽃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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