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오늘도 추웠겠다

각설이마당을 벗어나고서야 난 상당히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았다. 어느새 해가 바다 끝에 걸려 서쪽하늘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태양이 잠긴 바다역시도 붉게 물들어 있었고 검은 갯벌도 오이도남자를 보는 사이에 사라져있었다. 대신 기운차게 들어찬 물이 방파제 아래까지 올라와 철썩이고 있었다.

그 위를 한낮보다 더 차가워진 바람이 달리고 있었다. 오이도남자, 그리고 철썩이는 바다, 순간 난 잠시 길 잃은 미아처럼 당혹스러웠다. 갑자기 돌아갈 곳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모든 풍경들이 손에 닿지 않는 창문 너머의 그림 같았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공간, 그 공간 안으로 소란스런 웃음이 뚫고 들어와 깜짝 날 일으켰다.

네댓 명의 남녀가 깔깔거리며 내 옆을 지나 막 빨간등대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옆의 빨간등대가 노을보다도 더 붉게 타고 있었다.

태양이 잠긴 붉은 바다, 빨간등대, 그리고 춤추는 오이도남자. 심한 현기증이 일었다.

남편은 현관문의 번호키 누르는 소릴 들었는지 내가 현관에 들어서자 황급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뜯어놓은 현관 타일이 아직 치워지지 않은 채 어지럽게 널려있다.

아마 봄이나 되면 일을 다시 시작 할 것인지 웬일로 요즘은 남편이 잠잠하다. 일찍 퇴근했었는지 TV의 브라운관이 뜨겁다. 꺼지지 않은 화면 위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여가수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되어 떠다닌다.

TV를 끌까 하다 관둔다. 내가 켜지 않았으니. 내 방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남편이 나와 TV를 끄는 모양인지. 웅성거리던 거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들어오다 보니 아침에 거실 벽에 걸어두었던 미니액자가 치워지고 없다. 아마도 남편의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샛노란 해바라기 그림이라 썰렁한 집안이 그럴 듯 따뜻해 보였는데. 커피포트에 커피를 뽑아들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오이도남자.' 자판 위를 누른 활자가 모니터 위로 튀어 오른다. 잠시 망설이다 결국 이리저리 마우스를 굴려본다. 하지만 어떤 검색창에도 오이도남자의 정보는 없다.

단, 오이도 빨간등대와 오이도와 관련된 상업성 문구들만이 여러 개의 방을 차지하고 있을뿐. 결국 난 그를 찾지 못한 채 PC를 끈다. '스르륵' 소음이 잦아지자 그제야 가방 안에 든 원고뭉치가 떠오른다. 200페이지도 넘는 분량의 원고. 편집장의 요구대로 수정해 넘기려면 부지런히 서둘러야 한다.

하지만 몸이 천근이다. 아니,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창밖은 어둠이다. 멀리로 수많은 불빛들이 떠다닌다. 도시의 밤바다, 외로운 해인들의 등대, 오이도 빨간등대, 아니, 오이도남자. 그 남자 오늘도 추웠겠다.

밤새 많은 눈이 내렸다.  창문을 여는데, 창문 틈사이로 얼어붙은  눈때문인지 열리지 않는다. 문밖의 남편이 출근을 서두르는 것인가. 열리지 않는 문 틈으로 수돗물이 쏟아지는 소리, 방문이 소란스럽게 열리고 닫히는 소리, 속없이 쫒아나가 남편의 와이셔츠를 찾아 내민다. 하지만 남편은 내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옷만을 받아 채 간다.

"고맙군,"

싸늘한 동작과 상투적인 말투에 난 그만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옷을 받아 채던 그가 표정 없이 윗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책상위에 내려놓는다. 흰 봉투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그의 월급날이었다. 이달의 내 생활비다. 역시 차디찬 모멸감이다. 외면해버릴까.

"아침은요?"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간다온다 소리도 없이 남편이 나간다. 남편이 나가자 멍청히 서있던 난 책상 위의 봉투를 주워든다. 아, 싫다. 자신의 행위를 어쩌지 못하는 섭식장애자의 비애처럼 봉투를 챙겨드는 내 자신이 견딜 수 없게 싫다.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는 달리 또 챙기고 있으니.

그는 어떠한 기분일까. 문득 봉투를 던져줄 때의 남편의 기분이 궁금해진다.

지금 이 집안에서 내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굳이 찾는다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부엌살림과 은행에 공과금 납부하는 일, 그리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는 일, 아니지. 이젠 그 일도 남편 스스로가 하겠다니 이젠 그 일도 내 일은 아니다.

더구나 같은 방을 쓰는 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런 여자에게 매달 생활비를 내주어야 하는 남자의 기분은 어떠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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