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의 장면.

지난 10월 3일 개봉한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이 300만명 이상의 관객을 기록하는 등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한 임금과 중신들, 군사와 백성을 그린 이 영화는 결국 인조가 청태종에게 3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리며 항복한 ‘삼전도의 굴욕’으로 막을 내린다. 영화의 테마는 주전론을 펼친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과 주화론을 주장한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의 치열한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남한산성은 역사적 고증을 거친 논픽션에 픽션을 더한 팩션 영화다. 여기서 청나라 군사들과 접전하는 몇몇 장면은 사료를 근거로 그려진다. 조선군이 성밖으로 나가 청군을 공격해 승전하는 장면은 사실로 알려졌다.

사료에 따르면 조선군은 12월 18일 어영부사(御營副使) 원두표(元斗杓)가 성안의 장사를 모집, 성을 빠져나가 순찰중인 적군 6명을 죽이고, 동월 20일 훈련대장 신경진의 군이 출전해 또 적군 30명을 죽였으며, 다음날 어영대장 이기축(李起築)이 군사를 이끌고 서성을 나가 적군 10명을 또 죽여 성안에 사기를 올렸다.

하지만 남한산성을 향해 오던 근왕군이 청군의 기습으로 전멸한다는 장면은 픽션이다.

영화 '남한산성' 포스터.

실제로는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栐)이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있던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4만여명의 군사를 모아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조선군은 1월 2일 현재 경기도 광주시 인근의 쌍령(雙嶺)에 도달,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두 무리의 조선군은 각각 고개 양쪽에 진을 치고 목책을 세워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남한산성 인근에 주둔하던 청군 6천명은 지금의 곤지암인 현산을 점령한 뒤 조선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쌍령으로 약 30여명의 기마병들로 구성된 척후를 보냈다. 청의 척후병들이 조선군 목책에 다다르자 이를 발견한 조선군은 곧바로 발포해 적 척후병의 사기를 꺾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이 조총에 숙련되지 못해 첫 발포에서 소지하고 있던 모든 탄환들을 거의 다 소진해 버렸다. 조선군 진영은 탄환 재보급을 요청하는 수많은 병사들로 인해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청군이 조선군의 목책을 넘어 급습했고 이에 놀란 조선군은 탄약을 다 써버린 조총들을 내던지고 무질서하게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넘어져 자기들끼리 밟고 밟혀 죽는 참극이 벌어졌다. 허완은 쌍령의 싸움에서 패하자 분전 하였으나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조선왕조실록 인조 36권)

반대쪽 고개에 진을 치고 있었던 민영의 조선군은 청군의 공격에 그런대로 잘 대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역시 병사들의 탄환 남용을 막기 위해 너무 적은 양의 탄환을 분배한 나머지 병사들의 탄환은 순식간에 소진됐고, 탄환과 화약을 재분배하기 위해 진영 한가운데에서 탄약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모아놓았던 화약이 조총의 화승 불꽃에 닿아 대폭발이 일어났다.

갑작스런 폭음에 조선군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청나라의 팔기병대 300명이 돌진해 조선군의 선두진영을 뭉개버렸다. 결국 조선군의 대오가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병사들이 전의를 잃고 도주하다가 밟혀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민영은 군사가 패하자 군관과 하졸이 부축해 말을 태웠으나 이를 뿌리치고 끝내 도망하지 않고 싸우다 전사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36권)

쌍령전투의 패배로 남한산성에 행궁을 차린 임금은 주화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쌍령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원균이 이끌던 수군이 전멸한 칠전량 전투, 6・25 전쟁에서 중공군에게 대패한 현리전투와 함께 역대 3대 패전으로 불린다.

영화 '남한산성'

병자호란에 이어 다시 중국과의 접전에서 대패한 현리전투는 1951년 5월 16일 ~ 5월 22일 동안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서 중공군과 조선인민군, 한국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다.

당시 중공군 12군단, 27군단과 조선인민군 5군단은 미군 주둔지를 피해 국군 3군단을 공격하면서 보급로인 오마치 고개를 점령했다. 3군단이 포위당하자 당시 군단장이던 유재흥은 부군단장을 대리로 지정한 후 군단을 버리고 항공기편으로 군단본부로 돌아갔다.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저서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136쪽에는 "이 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 조차 참석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이 후 3군단은 예하 사단장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이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제거한 후 살기위해 무질서한 도피를 시작했다. 결국 현리에서 한국군 3군단 예하 3사단, 9사단 병력 1만 9천여명이 희생됐고, 병력의 40% 가량만 복귀했으며, 무기도 거의 다 뺏겼다.

당시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은 한국군 제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했다. 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지휘선상에서 제외하고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해 한국군이 작전지휘권을 잃게 됐다. 지금도 전시작전권은 미군이 쥐고 있다.

당시 군단병력을 버리고 달아났던 유재흥은 일제 강점기의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전후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 외교관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는 특히 노무현 대통령 당시 대한민국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극렬하게 반대했다. 자신 때문에 잃게 된 주권국의 작전통제권을 다시 찾는 일까지 집요하게 방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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