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이 차갑다. 아니, 정확한 농도를 느끼지 못하는 바람이다. 그래도 코트 깃을 세우고 얼굴을 묻는다.

다행히 오이도남자가 기대고 서 있는 봉고차는 각설이마당을 등지고 서있다.

"날씨가 꽤 춥지요."

순간, 차에 기대고 있던 그가 몸을 곧추 세우고 멍하게 날 쳐다본다. 오이도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오이도 마당에 섰을 때와는 전혀 다른 쌩한 표정이다.

"오이도!"

"....?"

"대보름날의 오이도 저 기억나지 않으세요?"

"....?"

"그쪽이 그랬잖아요! 한집안에서 부부가 너 따로 나 따로 따로따로 산다고."

"네?... 생각이 잘 안 나는데?"

"무늬만 부부가 많은 세상이라면서...."

"아하! 그 얘기요. 그런데요?"

"그런데요 라니요? 뭘 보고 나에게 그런 말을 함부로 했느냐 이 말이죠."

"네? 뭘 보다니요, 그 그냥....그냥 한 소린데요."

"그냥요?"

"그 그래요....! 아, 젠장, 그래요. 그게 거리예술의 특성이니까요. 배우와 관객이 편하게 웃고 즐기는 거리예술의 특성이니까요."

"거리예술요?"

"왜요! 엿이나 파는 각설이 주제에 예술이 어쩌고저쩌고 하니 우스운가요."

"아니, 내 내말은 하필 왜 나 날 지목했느냐 이 말이지요."

젠장, 당황스럽다. 그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붙이고 싶진 않았는데.

"아하, 제가 그쪽에 그랬군요! 그렇담,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당신도 잘못이네요. 그런 걸 편하게 웃고 받아주지 못하는 사람이면 그쪽에 맛에 맞는 뮤지컬이나 연극무대를 찾아 갈 일이지, 우리 허접스런 마당엔 왜 나와 앉아가지고...."

"뭐라고요!"

순간, 뜻밖의 대꾸에 할 말을 찾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불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말 할까요. 그래요, 그날의 당신 모습 기억나요, 왜 하필 당신을 지목했냐고요? 그건 당신이 울고 있어서요."

"뭐요! 울다니요, 누가? 내가?"

"그래요, 당신은 거울도 보지 않나요. 한번 들여다보세요. 겨울바람에 맨살로 춤을 추는 우리보다도 당신이 더 추워서 떨고 있잖아요. 그래서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이라고요. 제기랄, 그날 맨 앞에 앉아 있는 당신을 보는 순간 사람은 어쩌면 혼자보다 둘일 때가 더 외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이요."

"....."

"미안해요, 지금껏 그 말이 당신에게 상처가 됐다면 용서하시오."

뭐야, 이건 아니었다. 왜 이렇게 딱딱한 빵 덩어리를 삼키는 것 마냥 목이 메는 것인지. 그렇지만 난 애써 쿡쿡 웃는다.

"아, 아니에요, 그걸 따지려 했던 건 아니에요. 당신이 좀 특별나서요."

"특별요? 뭐 뭐가요?"

"정읍사를 읊는 당신이 특별나서요. 노래하고 욕하고 막춤 추는 각설이는 봤어도... "

"제기랄! 그건 내 취미요, 욕하고 춤추다가도 가끔 공연마당에서 필을 받으면 그렇게 고대가요 한 수 쯤 아는 척 해보는 게 내 취미란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젠 그가 말을 가로 채 성을 낸다. 젠장, 난 또 다시 아차 한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차 뒤에서 뭔가가 데구르 튕겨져 내 난감함을 가로챈다.

"오매! 성님, 여기서 뭐 한다요잉, 성님 차례란게요, 싸게싸게 올라 오시요."

빨강미니다. 그날 나에게 엿봉지를 안겨 각설이마당으로 밀어 넣었던 각설이. 그가 내말에 파르르 화를 내고 있는 그를 재촉하며 나를 흘깃 거린다.

"알았어, 임마.

그런데 그 순간, 난 푹 웃음이 터지고 만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해야겠는데 뜬금없이 웃음이 나오니 당혹스럽다. 하지만 갑자기 튕겨져 나온 빨강미니가, 그의 몸짓이 무언극의 채플린처럼 너무 희극적이어서 웃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까르르 웃자 오이도남자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날 노려보다 턱을 치켜든다.

"이보쇼 아줌씨! 그래 각설이가 좀 유식한 척 했기로 뭐가 그리 특별난 일이요. 이 짓으로 벌어먹다 보면 이것저것 주워들은 소리 앵무새마냥 지껄이는 게 우린데, 바쁜 사람 붙잡고 이러쿵저러쿵 시비 걸지 말고 싸게싸게 집에나 들어가 보쇼. 아니면 그쪽 취향에 맞는 뮤지컬장에나 가보시든지. 에잇 제기랄."

아, 그런데 난 그의 말에 또 다시 웃음이 터지고 만다. 이번엔 그의 얼굴이 잔뜩 부어터진 개구쟁이 같아서, 더구나 톡톡 튕겨대는 말본새라니. 겨우 웃음을 참아 미안함이 담긴 표정을 지어 보낸다.

그런데 그마저도 자신을 비웃는 웃음으로 보였던 것인지 오이도남자는 벌레 씹은 표정을 지어 황급히 각설이 마당 쪽으로 뛰어 들어가 버린다. 그가 자리를 뜨자 빨강미니도 날 한번 흘깃 넘겨보더니 그대로 오이도남자의 뒤를 따라 사라져 버린다.

젠장, 그 모습들이 내가 상당히 비위에 거슬린다는 뜻으로 비친다. 그러니 나도 속이 뒤틀린다. 남자가 열등감에 빌빌 꼬여도 너무 꼬였다는 생각이다.

그동안 내가 자기네들을 우습게 여겨왔던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인지. 그보다 내가 그들에게 이상한 여자로 비쳤을까봐 영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고 보면 이 모든 게 그 여자 탓이다. OO 출판사의 편집장, 아니, 이 모든 건 추위 때문인지 모른다.

이불을 뒤집어써도 온 몸이 꽁꽁 얼어붙는 이놈의 추위. 이 추위 때문에 내가 이렇게 우습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다. 바다가 문제였다. 스무살 적 그 바다를 잊지 못한 그것에 찾아간 바다. 난 이제 스무살적 그때가 아닌 걸, 그러니까 처음부터 바다에 간 것이 잘못이었다. 더구나 순수성을 잃어버린 그놈의 오이도 빨강등대에 갈 일은 더욱 아니었다.

빨강등대가 감히 날 여기까지 유혹하다니. 난 빠르게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겨 차에 올라탄다. 차에 오르자마자 시동을 걸어 주차장을 벗어나온다. 그런데도 각설이마당의 소음은 집요하게 내 차를 뒤따른다.

각설이마당의 쟁강거리는 가위소리가 마치 배사나이들을 유혹하던 바다요정 사이렌의 집요함처럼 차안 깊숙히 파고든다.  

난 밧줄에 몸을 칭칭 감고도 사이렌에 끌려갈까 두려운 오디세우스의 조급함으로 급히 창문의 장금장치를 누르고 깊숙하게 페달을 밟는다.  그리고 빨리 돌아가 원고를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애써 마음을 다잡아본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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