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물지 않은 생채기

비가 그치자 옥정호에서는 부옇게 안개가 피어올라왔다. 안개는 마을도 마을 주위로 내려뻗은 산자락도 순식간에 삼켰다. 

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국사봉도 하얗게 오르는 안개에 가려져 숨이 막히게 적막했다.

 황씨는 망원경을 손에서 내려놓고 창가에서 돌아섰다. 끙, 가는 신음을 뱉으면서. 아내가 누워있는 뒷산 국사봉 자락이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황씨가 아침마다 망원경을 들고 산을 올려다보는 건 아내가 떠난 뒤 그의 습관이었다. 아니, 이젠 망원경을 들지 않는 날도 가끔 있기는 했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하마터면 오늘도 그럴 뻔했던 것이고.

실은 어젯밤부터 내심 들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번 생기는 습관을 어쩌지 못했다. 열아홉 소년의 그것처럼 들뜬 마음 반대편에는 여전히 아내가 있었던 것이니. 그 때문에 황씨는 눈을 뜨자마자 숙제를 해치우듯 산부터 올려다봤다.

 다행히 산자락은 온통 안개바다로 아내가 누워있는 그곳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내의 얼굴은 여전히 아물지 않은 그의 생채기였다.

“쯧쯧 누가 화전민 여편네 아니랄까봐...”

늘 산에서만 살았던 아내. 그래서 아내의 몸에서는 언제나 진한 솔잎 냄새가 났었다. 봄에는 두릅냄새가 났었고. 여름이면 매운 고추냄새며 들큰한 콩잎냄새도 났었다. 가을이면 쌉쌀한 도라지 냄새도 났다. 

그래서 그놈의 냄새 때문에 아내의 몸에 병이 생겨나는지도 몰랐다. 

아내가 가슴을 싸안고 산에서 내려오던 그날도 그는 아내가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겠거니 생각을 했었다. 평생을 산비탈 밭고랑에만 묻혀 살았던 여자. 그런 천한 여자를 그리 쉽게 데려갈 줄 알았더라면 여름장에 나가 뜨끈한 국밥이라도 한 그릇 먹였을 것을, 그러니 여자를 생각하면 황씨의 가슴은 쓰리다 못해 불덩이를 삼킨 듯 아렸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는 아내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황씨는 떠오르는 아내의 이미지를 털어내 듯 안개에 덮인 국사봉에서 눈을 떼자마자 재빨리 마당을 건너 대문 밖으로 눈을 두었다. 그리고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은 마루를 대충 훔쳐냈다. 

오늘이 바로 수요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젯밤부터 맘이 열아홉 청춘처럼 설레었던 것이고.

 그날이었다. 두어달 전 수요일, 봄비치고는 제법 많은 비가 밤새 내렸던 날. 그날 아침도 지금처럼 산 아래를 하얗게 내리덮은 안개에 마을은 우유 통에 빠진 빵처럼 폭신하게 젖어있었다. 

그러다 국사봉 위로 햇살이 내리비치자 마을은 순식간에 파랗게 동동 떠올랐다. 늘 그랬던 것처럼 옥정호에서 올라왔던 안개는 걷힐때도 옥정호에서부터 걷혔다. 안개가 갇힌 호반은 갓 생겨난 생명체의 그것처럼 순정하고 맑았다. 

바람에 매끄럽게 밀리는 물살과 수면 위로 구르는 햇살. 잔물결이 밀리는 호반 주위로 다홍빛의 철쭉, 완연한 봄날이었다. 그런 날씨에도 황씨는 겨울 잠바를 한껏 여민 채 마루끝에 앉았다. 

 그때 왜 하필 하얗게 바래진 소매 끝이  눈에 들어왔던 것인지. 몽글몽글 일어난 보푸라기가 터진 생채기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것이 못 견디게 가슴이 쓰렸다.

  또 아내를 생각해냈던 것이다. 정갈했던 여자. 아내는 보푸라기가 인 옷을 볼때면 면도날을 들어 옷의 겉면을 말끔하게 밀어내곤 했었다.

물론 자신은 그런 아내를 볼때면 그러다 옷을 찢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거냐고, 무식한 여자가 별짓을 다한다며 소리를 질러댔었고.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말할 수 없이 아내가 그리워졌다.

아내와의 지난 일들이 하룻밤의 꿈만 같아 못내 서러워지기까지 했다. 

애써 그런 생각들을 지우려 강 건너 멀리 들판을 내려다 봤다. 파랗게 물살이 밀리는 둑길 너머 논밭으로 동네사람들이 나와 서 있는 게 보였다. 

봄이라고 벌써 논갈이 철이 되었던 것이다. 문득 그것을 알아챈 그였지만 그는 젠장, 까짓 것 혼잣소리를 내뱉고는 여전히 앞을 보지 못하는 늙은이처럼 초점 없는 눈을 들어 먼 산을 바라봤다.

예전 같으면 자신도 들로 산으로 거름을 내고 씨를 뿌리며 파종을 하느라 담배 한 대 피워 물 여유가 없을 시기인데 이젠 그저 온 전신을 내리누르는 무력감에 손가락 하나 까닥이고 싶지 않았다.

아내를 잃은 상실감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 있어 계절의 변화는 아무런 의미도 되어주지 못했다.

 새가 울고 꽃이 피고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거려도 어제 같지 않은 봄, 파랗게 돋아나는 잎사귀를 봐도 이젠 퇴색되어 버린 낡은 겉껍질처럼 심드렁한 것을, 그때 난데없이 그녀가 나타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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