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 36시간만에 '성범죄자' 누명...산산조각 난 시인의 삶

[뉴스포스트=김혜선 기자] 36시간. 한 시인이 켜켜이 쌓은 38년 인생이 산산조각 나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지난해 SNS에서 시작된 ‘문단 내 성폭력’ 폭로는 이름 난 문인들의 어두운 면을 낱낱이 드러냈다. 동시에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글도 인터넷을 타고 무차별 확산됐다. 시인 박진성(39)씨도 당시 폭로전의 한 가운데 있었다.

박씨는 지난 1년간 생활을 ‘지옥’으로 표현했다. 그는 30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며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고 토로했다.

박진성씨의 블로그. 그는 성범죄자로 몰린 지난해부터 자신의 무고를 알리기 위해 블로그에 일지를 써왔다. (사진=박진성 블로그 캡쳐)


SNS폭로 일주일만에 ‘성범죄자’ 낙인

사건의 시작은 지난해 10월19일 트위터에 “미성년자인 저는 지난해 저보다 스무 살 많은 시인에게 성희롱을 당했습니다. 박진성 시인임을 밝힙니다”는 글이 올라오면서였다. 폭로는 계속됐다. “나는 27세 여름 강간을 당했다. 이름은 박진성이며 직업은 시인입니다”

SNS를 통해 순식간에 ‘성범죄자’로 몰린 박씨는 바로 다음날인 10월21일 언론사를 통해 실명과 얼굴이 공개됐다. 폭로 36시간 만이었다. 박씨에게 사실관계를 해명할 기회는 없었다. ‘죽어라’, ‘역겹다’는 등 비난이 쏟아졌고 그는 당혹스러움에 사과문을 자신의 블로그에 게시했다. 하지만 이는 박씨 자신의 성폭행 의혹을 인정하는 뜻으로 와전됐고, 언론에 의해 확대·재생산됐다.

박씨는 재차 ‘이전의 사과문이 제기된 모든 폭로 내용을 시인한다는 말이 아니었다’면서 해명했지만 소용없었다. 박씨와 계약한 출판사는 시집, 산문집 등 책 4권의 출간 계약을 해지했고 이미 출간된 시집은 출고정지 했다. 그의 집으로 ‘이사 가라’, ‘동네 창피하다’는 고성이 날아들었다. 창밖으로 피켓을 든 사람들이 모였다. 그날 이후 단 한번도 창문을 열 수 없었다.

비난의 화살은 박씨의 가족에게까지 이어졌다. 박씨의 아버지는 지인에게 ‘대한민국의 유명 신문에서 얼굴과 실명을 공개할 정도면 네 아들은 성범죄자가 확실하다’는 말을 들었다. 부친은 18년간 살던 집을 부동산에 내놨다가 ‘대한민국 어디를 가든 상황이 달라지겠나’는 지인의 말에 이사를 포기했다. 친지 결혼식조차 갈 수 없었다. 그는 “이것은 21세기 연좌제”라고 표현했다.

트위터 폭로 일주일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인권의 문제

박씨의 성범죄 혐의는 수사기관을 통해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박씨가 입은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지난 9월, 대전지방검찰청은 박씨에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폭로자 A씨는 당시 유일하게 박씨를 강간 및 강제추행 혐의로 고소했지만, 검찰은 수사를 통해 박씨와 A씨가 합의하에 성관계를 했다고 판단하고 불기소했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누리꾼은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된 것은 무죄가 아니다”고 힐난했다.

이와 관련, 박씨의 변호를 맡은 허윤기 변호사(HK 법률사무소)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법적 지식을 모르는 사람이 한 이야기”라며 “불기소 처분은 재판으로 갈 것도 없이 성폭행 혐의가 없기 때문에 검찰 선에서 사건을 종료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무고죄로 고소당한 A씨는 기소유예됐다. 허 변호사는 “무혐의와 기소유예는 차원이 다르다. 기소유예는 검찰이 범죄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며 “당시 검찰은 A씨의 죄질이 불량하지만 초범이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라 기소유예하겠다고 했다. 무고죄는 형량이 큰데 ‘솜방망이 처분’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박씨가 법적 대응을 시작하자 폭로에 동참했던 B씨는 지난 2월 박씨에게 “소송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친구들이 부추겨서 지어내서 폭로했다. 제발 소송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사과했다. 또다른 폭로자 C씨도 허위로 글을 작성, 명예훼손한 사실이 인정돼 지난 8월 법원의 벌금 30만원의 약식명령 처분을 받았다. 박씨는 자신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주장한 최초 폭로자 D씨는 만나본 적도 없다고 했다.

(사진=박진성씨 제공)

박씨는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조차 죄스러웠다”며 “가해자로 한 번 지목이 된 이상 억울해 하면 안 되고 증거를 풀어도 안 되고 피해자라고 호소한 사람 고소해서도 안 된다. 그냥 두드려 패는대로 맞아야 한다”고 털어놨다. 박씨는 이를 “인권의 문제”라고 말했다.

 

“내 시집은 포로입니다”

한편, 박씨의 시집을 출고정지한 출판사는 여전히 출고정지 처분을 철회하지 않고 있다. 올해만 세 차례 항의했지만 출판사 측은 “현재로서는 출고정지 처분에 대해 변경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출고정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출판사의 입장”이라고 되풀이 할 뿐이었다.

박씨의 무혐의 처분에도 불구, 출고정지를 고수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출판사 측은 “관련된 소송이 진행중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출판사 관계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형사 소송 건은 종료됐지만 아직 민사 관련 소송이 남은 것으로 안다”며 “모든 소송이 마무리되면 조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박씨는 “차라리 시집을 절판했으면 한다. 시집이 포로로 잡혔다”고 말했다. 허 변호사는 “출판사가 폭로 일주일 만에 어떤 사실관계 확인도 하지 않고 출고정지 한 것은 유감이다. 출고정지 관련 소송 제기는 가능하다”면서도 “진행 중인 민사 소송이 마무리되면 출판사와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봤다.

한편, 출판사 측은 절판 등 계약 해지에 대해서는 “아직 시인으로부터 계약 해지를 요구받은 적이 없다. 언제든지 연락을 주신다면 논의하겠다”고 답했다.

현재 박씨 측이 바라는 것은 ‘진정어린 사과’와 ‘명예회복’이 전부다. 11월 현재까지 박씨에 대한 정정보도를 낸 언론사는 총 54곳. 언론인권센터,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도 박씨 사건에 조사를 착수했다. 하지만 여전히 박씨에 대한 잘못된 보도가 흉터처럼 남아있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박씨는 폭로자에 정정광고를 요청하는 민사 소송을 냈다.

허 변호사는 “허위 폭로에 박씨가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폭로자 개개인에 대한 억하심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박씨는 자신에 대한 오해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만 밝혀주는것에 족하다는 입장”이라며 “최소한의 반성의 모습을 보이면 언제든지 소송 건은 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방 측에서 입장을 밝히지 않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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