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김나영 기자]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정무비서를 성폭행한 사실이 드러난 다음날, 직장인들이 밀집한 서울 중구의 식당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점심 메뉴는 단연 ‘안희정’이었다. 기자가 말소리를 알아들을만한 지근거리에서 식사하는 일행들의 대화엔 ‘안희정’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았다. 안희정 성폭행 피해자의 공개인터뷰 후 하루 만에 쏟아진 기사가 약 4000건에 달한다.

안희정 성폭행 사건이 충격적인 까닭은 가해자가 저명한 정치인인 탓도 있지만, 피해자가 우리 중 누구도 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데 있다. 미투 운동을 촉발시킨 일부 문화예술계 종사자의 실상 또한 추악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소위 ‘예술하는 사람’이나 ‘그 바닥’으로 선 긋기가 가능했다. 하지만 미투 운동이 정·재계, 학계를 가리지 않고 확산되면서, 어느 곳도 업무 상 지위를 악용한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믿을 수 없게 됐다. 

미투 증언이 봇물 터지듯 늘어나자 성폭력 사실만으로는 기사 쓰기도 어려워졌다. 가해자가 유명인이거나, 성폭력 과정이 변태적이거나, 피해자가 다수는 돼야 주목을 받는다. 이쯤 되니 다들 일터에서의 끔찍한 성폭력 피해 경험 하나 정도 가슴에 묻어두고 사는데 나만 몰랐나 하는 착각마저 든다. 최소한 성폭력하는 상사는 만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하나, 여자가 사회생활하려면 성추행쯤은 감내하는 것이 정상인가 혼란스럽다. 

뒤늦게 피해자들이 성폭력을 공론화하는 버팀목은 미투 바람인데, 미투 운동이 가진 힘은 고작해야 화제성 뿐이다. 안희정은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지난 25일 밤 피해자를 불러 “그게 너에게 상처가 되는 건 줄 알게 됐다”고 사과하고 또 다시 성폭행을 했다. 미투 운동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미투 운동은 결코 성폭력으로부터 기(旣) 피해자나 예비 피해자를 보호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미투 운동이 엉뚱한 피해자를 만들기도 한다. 미투 운동에 거론된 윤호진 연출가의 뮤지컬에 10년간 출연했다는 여자 배우 A씨는 "최근 지인들에게 '혹시 너도 (당했냐)'라는 질문을 받았다"며 "내게는 그런 낌새조차 없었는데 가뜩이나 어려운 배우 입지가 더 좁아졌다"고 토로했다. 취업 재수생 B씨는 "안 그래도 취업 시장에서 남성을 선호하는데, 앞으로 여성 채용을 더 기피할까봐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기업에서는 회식, 출장 등에 여자 직원을 배제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미투 운동이 바르게 흘러가도록 촘촘하게 길을 설계해야 할 때다. 성폭력 범죄 처벌 및 예방 제도를 손보는 것이 첫 번째 과제다. 안희정은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지사직에서 물러났지만, 그간 쌓아올린 재산이나 업적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다른 성폭력 가해자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손에 쥔 것을 잠시 내려놨을 뿐, 법·제도적 차원에서 단죄받은 사람은 아직 없다. 언제 슬그머니 재기할지 모를 일이다.

'검찰 개혁', '적폐 청산' 수준의 '포스트 미투(Post #MeToo)' 조치가 필요하다. 1월 25일,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성추행 및 인사 비리 문제가 공개된 이후 여성가족부는 매일같이 성폭력을 근절하겠다며 대책을 발표했지만, 성평등 교육 강화나 성폭력 신고센터 확충 등 공염불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대로는 어렵게 용기낸 피해자들의 고백을 헛되게 할 수 있다. 미투 운동이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변혁의 계기가 되기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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