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직자 정보는 까다롭게 요구하면서 기업 급여·직무 내용은 '추후 협의'

(사진=김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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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포스트=김나영 기자] “아직 취업 중인가요?”

구인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려놓은 취업준비생 박하린(28·가명) 씨는 작년 말 낯선 번호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선 모 기업이 공채를 진행하고 있으니 내일 면접을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인사 담당자는 기업에 대한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고, 연봉이 3800만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박 씨는 “처음 들어본 기업이 내일 당장 면접을 보러 오라니 당황했지만 대기업 수준의 연봉을 준다는 말에 솔깃했다”며 “하반기 공채가 막바지에 접어들 때라 취업 시장에서 재고 처리 되는 것 아닌가 불안했기에 면접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마지막 희망을 안고 부랴부랴 면접을 준비한 박 씨는 면접장에서 좌절했다. 타 부서의 일반 영업 사원이 아니라 정규직 마케팅 직원을 뽑는다는 사전 설명과 달리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인 만큼 매력이 중요한데, 연애는 많이 해 봤냐’, ‘현재 남자친구는 있냐’, ‘설득을 잘 하는 편이냐’ 등의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면접관은 면접 내내 실적에 따라 대기업 과장급 연봉을 받을 수도 있고, 중소기업 초봉에 못 미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면접이 끝날 무렵 ‘혹시 회사에 대해 궁금한 것 있느냐’기에 “실적은 어떻게 내는지” 물었다가 ‘룰을 어겼다’며 호되게 혼났다. 면접관은 다음 전형을 ‘직무 설명회’로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면접 후기를 모아 놓은 잡플래닛에 따르면 직무 설명회는 ‘세뇌 작업’이라는 평이 많다. 박 씨는 “지원하지도 않은 회사에서 나에 대한 개인정보는 모두 열람해 면접까지 불러 실컷 물어봐놓고, 회사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며 “구직자라는 신분이 죄인가 싶어 참담했다”고 말했다.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취업이 절박한 구직자들을 상대로 ‘묻지마 면접’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회사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은 채 구인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려놓은 취업준비생에게 전화를 걸어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는 식이다. 이들은 ‘무슨 회사냐’, ‘입사하면 어떤 업무를 맡게 되냐’, ‘연봉은 얼마인가’ 등 질문을 하면 ‘면접에 와 보시면 안다’, ‘면접 제의만 할 뿐 담당자가 아니라 모른다’고 답한다. 기자가 구인구직 사이트 한 곳에 ‘공개열람 가능’으로 이력서를 업로드한 결과, 일주일간 4통의 면접 제의 전화를 받았으나 회사나 업무에 대해 정확하게 소개해 주는 곳은 한 곳에 불과했다.

 

불이익 받을라... 근무조건 모르고 모욕 당해도 눈물 삼키는 구직자들

(사진=뉴시스)
(사진=뉴시스)

 

구직자 입장에서는 면접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비용이 깨지지만 취업이 달린 면접을 거절하기 쉽지 않다. 취업포털 사이트 인크루트가 2016년 11월 2일부터 9일까지 회원 92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구직자들이 면접 준비를 위해 쓰는 비용이 평균 19만 5천원으로 나타났다. 주로 소비하는 항목은 교통비가 48%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면접 복장 구입비(25%), 메이크업 비용(7%)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면접비를 현금으로 지급받은 면접자는 응답자 전체의 43%에 불과했다. 취업준비생들은 “면접 하나 하나가 다 돈이지만, 곧 기회이기도 하다”고 입을 모았다.

면접 과정에서 불편부당을 겪어도 선택받아야 하는 위치인 면접자는 참는 수밖에 없다. 취업포털 사이트 사람인이 지난해 3월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2%가 ‘구직활동을 하면서 을이라고 느낀 경험이 있다’고 답했지만, 67.7%가 ‘대응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밝혔다. 이들은 ‘입사 전까지 연봉을 알 수 없을 때’(43.3%), ‘공고와 실제 업무 내용이 다를 때’(34.9%), ‘문의해도 제대로 답변 받지 못할 때’(31.6) 을이라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구직 의욕이 떨어지는 수준’이라는 응답이 60.3%로 가장 많았으나, ‘어차피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서’(58.7%), ‘취업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어서’(34%) 대응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답했다.

취업포털 사이트 인크루트가 지난 13일 발표한 자료에서도 면접 경험이 있는 응답자 중 74.9%가 ‘면접 갑질을 경험했다’고 답했지만, 48.8%가 ‘혹시라도 떨어질까봐 불쾌한 마음을 숨기고 면접에 임했다’고 답했다. 면접 갑질에 ‘불쾌함을 표현’(9.0%)하거나 ‘질문의 의도를 되물은’(8.6%) 면접자는 열 명 중 한 명도 안 됐다. 면접 갑질을 경험한 기업 규모로는 중소기업이 35.2%로 가장 많았고, 중견기업이 25.4%, 대기업이 17.3%를 차지했다. 구직자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면접을 제안하는 회사는 대부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중소기업이다.

 

취업 절박함 쥐고 면접 갑질 빈번한데 구제받을 제도적 장치 없어

(사진=청와대)
(사진=청와대)

상반기 공개 채용 시즌을 맞아 3월부터 청와대 홈페이지의 국민청원게시판에는 채용 면접 개선을 요구하는 청원이 일주일에 한 건 이상 제기되고 있다. 18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일자리 채용사이트의 기업 내 정보 급여란에 ‘회사 내규에 따름’이 아니라 정확한 금액을 명시하게 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작성자는 “채용 자격요건은 제2외국어, 학력 몇 년제 이상, 관련 업무 경력 또는 자격증 소지자, 나이 몇 년생 이하 등 까다롭고 명확한 데 비해 급여란은 회사 스무 곳 중 한 곳도 제대로 적힌 곳이 없다”며 “한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이력서를 내고 적어도 두 세번의 면접을 봐야 채용 여부가 결정되는데, 급여조차 계약서 쓰기 전까지 모르는 것은 너무 불공평하다”고 말했다.

15일에도 다른 청원자가 “대부분 회사가 연봉을 ‘면접 후 협의’로 적어놓고 직접 면접 가거나 합격한 후 협상할때면 턱없는 연봉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 때문에 합격자가 연봉 협상 후 입사를 취소하는 상황이 발생해 취업준비생과 회사 모두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게 된다”고 청원했다. 비슷한 내용의 청원은 지난해 12월부터 4개월간 매달 1건 이상 올라왔다.

청원게시판에 면접 개선 요구가 줄을 잇는 이유는 구직자가 이의를 제기하려고 해도 면접 과정에서 겪은 부당함을 구제받을 제도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현행 노동법 상 아직 직원이 되지 않은 ‘면접자’를 다룬 법률은 마련되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노동권익센터 공인노무사 김 모(33·여) 씨는 “최근 면접 갑질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면서 법제화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아직까지는 면접 과정에서의 문제를 일반 노동법으로 구제받기 힘들다”면서 “법적으로 다투려면 민사상 손해배상이나 형사상 상해를 끌어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일반 채용은 물론이고 아르바이트생을 뽑을 때에도 근로시간이나 시급을 명확히 공개해야 하는데, ‘추후 협의’라고 공지하는 경우가 많아 면접까지 가서야 근무 조건을 알고 입사를 포기하거나, 일을 시작하고도 근무 조건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아 원치 않는 조건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피해자가 많다”며 “최소한 고용노동부의 고시라도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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