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문제로 발 묶여 시간 멈춘 도심속 한옥섬

발길 늘자 3년 만에 70%가 상업용도로 전환

소비·소모 넘어 함께 오래 살 방법 고민할 때

[뉴스포스트=김나영 기자] 서울 지하철 1·3·5호선이 교차하는 ‘종로 3가’역은 시간이 지층처럼 쌓여 있다. 3·1운동이 일어난 탑골공원,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관 단성사, 주상복합건물의 시조새 격인 낙원상가와 세운상가가 모두 종로 3가 일대에 위치한다. 창경궁, 창덕궁, 종묘는 이 곳이 600여 년간 한반도의 도읍지였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동시에 피맛골, 광장시장은 종로가 결코 수도라는 상징에 그치지 않고 서민들이 부대껴 살아내는 역동적인 공간이었음을 증명한다.

익선동 156번지 일대. 2018.04.25 (사진=김나영 기자)
서울 종로구 익선동 156번지 일대. 2018.04.25 (사진=김나영 기자)

근현대사가 켜켜이 쌓인 종로 한복판에 외따로 세월을 맞지 않은 화석이 있다. 삼일대로 30길과 돈화문로 11길로 둘러싸인 40㎡ 면적의 ‘익선동’이다. 종로 3가역 4번 출구로 나와 열 발자국만 걸으면 건물 높이가 어른 키를 조금 넘는 한옥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성인 세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마다 어디에도 부서지지 않은 날것의 햇볕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25일 오후 2시, 평일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이리 오너라’를 외쳐야 할 것 같은 익선동 모 카페 나무 대문에는 쉴 새 없이 방문객이 드나들었다. 이날 어머니를 모시고 익선동을 찾은 한희라(23·여) 씨는 “여기서는 다른 곳에서 쉽게 느낄 수 없는 한옥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어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익선동은 일반적인 한옥마을과는 풍경이 다르다. 서촌·북촌 한옥마을이 전통 한옥을 보존하는 데 초점을 둔 것과 달리 익선동은 구조적으로 한옥의 형태를 갖췄으나 내부는 현대적으로 재건축해 상업 용도로 활용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올해 익선동에 남은 한옥 119채 가운데 주거 용도는 37동(31.4%)에 불과하다. 식당으로 쓰이는 한옥이 33동(28.0%)이고. 상점이 18동(15.3%), 카페가 14동(11.9%)을 차지한다. 이들은 흙벽을 뚫어 통유리를 내거나, 마당과 마루의 경계를 허물어 손님을 받을 공간을 넓히는 식으로 한옥을 재건축한다. 한 씨는 “분위기는 전통적이지만 화장실 등 내부 인테리어는 현대식이라 불편하지 않다”고 말했다.

덕분에 익선동에는 현대와 전통이 공존한다. 조선 말기에 지어진 한옥에서 서양식 스테이크를 썰고, 일본식 고로케 튀김을 판다. 익선동을 찾은 젊은이들이 낯선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바쁠 때, 한옥 셋방에서 한평생을 보낸 어르신이 지팡이를 짚고 유유히 걸어간다.

 

익선동. 2018.04.25 (사진=김나영 기자)
한옥을 개조한 익선동 모 카페. 2018.04.25 (사진=김나영 기자)

익선동에 시간이 멈춘 이유는

익선동이 젊은이들이 찾는 명소가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지난 20년간 재개발 구역으로 선정됐다가 해제되는 지지부진한 행정 절차를 거치면서 함부로 허물 수도, 새로 지을 수도 없는 채로 시간을 견딘 것이 오히려 익선동의 색깔을 만들어냈다.

익선동이 지금의 형태를 띤 것은 1920년대. 부동산업자 정세권이 도시형 한옥 주거 단지를 조성하면서 윤곽을 갖추기 시작했다. 북촌에 영·호남에서 상경한 지주들을 위해 큰 한옥이 들어선 것과 달리 익선동은 필지를 쪼개 작은 한옥을 지어 서민들에 분양했다.

90년대 중반부터 주변 지역이 개발되면서 익선동에도 재개발 바람이 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2004년에야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됐다. 14층 높이의 주상복합단지를 세울 계획으로 재개발추진위원회도 설립했다. 종묘·창덕궁을 조망할 수 있는 관광호텔과 오피스텔, 상점을 지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2010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가 주변 지역 특성상 고층 빌딩을 짓는 것보다 한옥 보전을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면서 개발계획을 부결했다. 도계위는 난개발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 담긴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해야 도시환경정비구역에서 해제하겠다고 밝혔다.

주민 간 갈등으로 지구단위계획 수립이 늦어지는 동안 한옥을 개조한 식당, 카페가 문을 열었다. 도심 한복판의 한옥섬은 금세 입소문을 탔고, 3년 만에 대부분의 한옥이 주거용도에서 상업용도로 바뀌었다.

이에 서울시는 1월 4일 익선동 156번지 일대를 재개발지역에서 해제하는 ‘익선 지구단위계획 결정안’을 공개했다. 앞으로 프랜차이즈 업체와 대규모 상점은 익선동에 들어올 수 없게 됐다. 익선동 내에 건물을 쓸어내고 고층 건물을 짓는 재개발도 불가능하다. 돈화문로·태화관길 등 주변 가로변 건물 높이는 5층(20m) 이하로 제한했다.

 

익선동. 2018.04.25. (사진=김나영 기자)
한옥을 개조한 상가가 밀집한 익선동 골목에 한옥 한 채가 공사중이다. 2018.04.25. (사진=김나영 기자)

멈춘만큼 빠르게? 익선동의 미래는

멈춘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걸까. 익선동은 종로가 수십, 수백년에 걸쳐 변화한 것을 3년만에 따라잡고 있다. 기자가 방문한 25일에도 익선동 메인 스트림에서 공사 중인 한옥이 눈에 띄었다.

익선동이 새로운 상권으로 떠오르면서 임대료도 뛰었다. 익선동은 서민 주거단지라는 태생답게 월세가 몇 년간 20만원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지 66㎡짜리 한옥 주택이 보증금 3000만원에 임대료 100만~150만원으로 올랐다.

방문객이 늘면서 소음, 쓰레기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익선동 메인 스트림에 해당하는 156번지 일대에 주거하는 김 모(46·여) 씨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네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손님들이 몰리니 장사하는 입장에서는 좋을지 몰라도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주 곤혹스럽다”고 말했다.

익선동의 급격한 변화는 상인들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다. 익선동에서 카페 식물을 운영하는 포토그래퍼 루이스 박은 “처음 카페를 열었을 때만 해도 익선동에 아무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골목마다 다 가게"라며 "익선동이 한때의 소비동네로 끝날까봐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대학 생활을 포함해 10년 넘게 런던 생활을 했다는 그는 “예전에는 한 동네가 뜨는 것을 돈이 좌우했지만 이제는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비어있는 곳, 임대료가 싼 곳이 각광을 받고 있다"며 “런던의 이스트도 할렘이었지만 패션하는 대학생들이 저렴한 재료를 찾아 하나 둘 찾다 보니 카페도 생기고, 갤러리도 생기고, 작업실도 생기며 20년 넘게 발전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박 씨는 “한국은 런던이 20년 넘게 진행 중인 변화를 3년 만에 해치웠다”며 "한국은 어디가 뜬다고 하면 자본은 치고 빠지고, 손님은 먹고 빠지며 지겨워지면 또 새로운 동네를 찾는 식으로 개발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리 맛있는 디저트 가게가 생겨도 처음 한 두번은 호기심에 찾지만 매번 가지는 않는다”며 “익선동도 먹는 것, 소비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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