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美, 날짜 잡아놓고 “회담 재고려” 줄다리기

[뉴스포스트=김혜선 기자] 내달 12일로 예정된 북미정상회담에 먹구름이 끼었다. 북한이 돌연 남북고위급회담을 취소하고 외무성 소속 개인 명의의 담화문을 통해 “북미정상회담을 재고려하겠다”고 밝힌 것. 최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비핵화 방법론으로 ‘리비아식 모델’을 제시한 것에 대한 반발로 풀이된다.

(사진=뉴시스)
(사진=뉴시스)

16일 북한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을 내세워 조선중앙통신에 이같은 내용의 개인 담화문을 발표했다. 김 1부상은 “우리는 이미 볼턴이 어떤 자인가를 명백히 밝힌 바 있으며 지금도 그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는다”며 볼턴 보좌관을 콕 집어 거론했다. 이어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기간 조미 대화가 진행될 때마다 볼턴과 같은 자들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과거사를 망각하고 리비아 핵 포기 방식이요 뭐요 하는 사이비 ‘우국지사’들의 말을 따른다면 앞으로 조미 수뇌회담을 비롯한 전반적인 조미 관계 전망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명백하다”고 경고했다.

김 1부상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대국들에 나라를 통째로 내맡기고 붕괴된 리비아나 이라크의 운명을 존엄 높은 우리 국가에 강요하려는 심히 불순한 기도의 발현”이라면서 “핵 개발의 초기 단계에 있었던 리비아를 핵보유국인 우리 국가와 대비하는 것 자체가 아둔하기 짝이 없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제시한 민간투자에 대해서도 “미국이 우리가 핵을 포기하면 경제적 보상과 혜택을 주겠다고 떠들고 있는데 우리는 언제 한 번 미국에 기대를 걸고 경제건설을 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런 거래를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김 1부상은 “트럼프 행정부가 조미 관계 개선을 위한 진정성을 가지고 조미 수뇌회담에 나오는 경우 우리의 응당한 호응을 받게 될 것이지만 우리를 구석으로 몰고 가 일방적인 핵 포기만을 강요하려 든다면 우리는 그러한 대화에 더는 흥미를 가지지 않을 것”이라며 “다가오는 조미 수뇌회담에 응하겠는가를 재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김 1부상의 담화문을 발표하기 전에도 당일 예정돼있던 남북고위급회담을 약 10시간 남겨두고 ‘무기한 연기’ 통보를 내렸다. 북한이 공식적으로 문제 삼은 것은 한미 공군의 연례적 연합훈련인 ‘맥스선더’다. 이 밖에도 북한은 관영언론인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지난 14일 국회에서 회고록 출간기념식을 가진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를 겨냥해 ‘인간쓰레기’라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태 전 공사는 지난 2016년 한국으로 귀순한 북한의 고위급 인사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CVID)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했다.

결국 북한이 문제제기하는 부분은 볼턴 보좌관과 태영호 전 공사, 맥스선더 훈련 3가지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돌발행동을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판 흔들기’에 나선 것으로 분석한다. 그동안 북한이 전형적으로 보여준 ‘통미봉남’ 전략이 다시 시작됐다는 것.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북한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대등한 관계로 대화 중임을 대내외로 선전하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한국이 너무 나선다고 생각한 것 같다”며 “브레이크를 걸어 속도 조절을 하고 한국이 북한보다 외교 무대에서 낮은 지위라고 보이고 싶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북한이 미국에 대한 불만을 우리 쪽에 우회적으로 표출했다”고 말했다.

특히 북한이 볼턴 보좌관을 겨냥하며 이례적으로 개인 명의의 성명을 낸 것도 북미정상회담의 ‘판’을 깨지 않으면서 자기들의 의도를 뚜렷하게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미회담 실무자인 이수용 노동당 부위원장 겸 국제부장이나 이용호 외무상이 나서지 않고 과거 6자회담 협상에서 활약한 김계관 1부상이 나선 것은 북한의 의도를 전달하며 그 파장은 최대한 줄이려 했다는 해석이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의 비핵화가 조속히 이뤄지면 대북제제를 완화하고 민간투자를 허용하겠다는 ‘비핵화 로드맵’ 윤곽을 밝힌 바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13일 폭스뉴스와 CBS방송 등 미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의 에너지(전력)망 건설과 인프라 발전을 미국의 민간 부문이 도울 수 있다면서 미국민의 세금을 들여 북한을 지원할 수는 없지만, 대북 제재를 해제해 미 자본이 북한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하겠다”며 “그들(북한)은 막대한 양의 전력이 필요하고 인프라를 개발하기 위해 협력하길 원한다 북한이 원하는 모든 것, 특히 미국의 농업과 기술이 북한을 지원하면 그들은 고기를 먹을 수 있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민간투자라는 ‘당근’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전제로 했다. 북한의 모든 핵무기와 핵물질을 제3국으로 반출하는 방식이 거론된다. 볼턴 보좌관은 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비핵화 절차가 완전하게 진행되는 것을 보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은 불가역적인 것”이라며 “그러한 결정의 이행은 모든 핵무기를 제거하는 것, 핵무기를 폐기해 테네시 주(州)의 오크리지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것은 우라늄 농축과 플루토늄 재처리 능력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볼턴이 지목한 오크리지는 리비아와 카자흐스탄의 핵무기가 폐기된 곳이다. 이 때문에 볼턴 보좌관의 발언은 북한에도 리비아 모델을 적용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트럼프 “지켜보겠다”…일단 북한 ‘달래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의 강경 반응에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샤프카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과 정상회담한 자리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유효한가’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단 북한 관련 메시지를 자제하며 상황을 신중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트위터를 통해 북미관계와 관련한 메시지를 자주 냈던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까지 ‘트윗 침묵’을 지키고 있다.

미국 측은 북한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안을 ‘위기관리’하는 모양새다. 백악관은 아예 북핵 비핵화 방법론을 ‘선 핵폐기, 후 보상’의 리비아식 해법이 아닌 ‘트럼프 모델’이 적용될 것이라며 북한 달래기에 나섰다. 새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미정상회담에 대해 “아직 희망적(still hopeful)”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샌더스 대변인은 “(우린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것으로 기대하지만) 동시에 힘든 협상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준비해왔다”면서 “대통령은 회담이 열린다면 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러나 열리지 않는다면 현재 진행 중인 (북한에 대한) ‘최대 압박’ 정책을 계속해갈 것”이라고 말했다.

맥스선더 훈련의 경우 한·미 군 당국은 계획대로 훈련을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북한이 비난한 전략 폭격기 B-52와 F-22 중 B-52는 전개되지 않는다. 앞서 문정인 대통령 외교안보특보는 맥스선더 훈련 참가 여부와 관련해 “B-52전략폭격기는 아직 전개 안됐고 내일부터 할 건데,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을 만나) 맥스선더에 미군 전략폭격기 B-52를 (전개가) 안 되게 얘기했다”고 말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에 대해 미 국방부는 “B-52는 맥스선더에 참여하는 계획이 전혀 없었다”며 “훈련의 성격과 범위에 대한 어떤 변화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지 않다”고 반박했다.

한편, 청와대는 17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열고 북한의 남북고위급회담 연기 대책과 향후 북미정상회담 중재 방안을 논의했다.

상임위는 지난달 2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판문점 선언’이 차질없이 이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하고 남북 고위급 회담의 조속한 개최를 위해 북측과 계속 협의해 나가기로 했다. 또 다음달 12일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이 상호 존중의 정신 하에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한미와 남북간에 여러 채널을 가동, 긴밀히 입장을 조율해 나가기로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참관, 6・15 공동행사 준비 등 앞으로의 남북관계 일정들을 판문점선언의 합의 정신에 따라 차질없이 이행해 나가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결정은 정부가 북미간 중재자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해나가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특히 다음주(22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으로 건너가 북한의 태도에 대한 파악을 트럼프 대통령에 전달할 계획이다. 청와대 한 고위 관계자는 "반대로 북한에게도 미국의 입장과 견해를 충분히 전달해 북미 간 접점을 넓혀 나가도록 하는 역할을 우리 정부가 중재자로서 취해나가겠다는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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