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년이 채 안되어 잊혀진 대기업…‘동명목재’

▲ 동명대학교 6대 강정남 총장
[뉴스포스트= 박효주 기자] ‘동명목재’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삼십여년 전만해도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불리며 그룹을 형성했지만, 전두환 계엄사령부에 의해 순식간에 이름조차 잊혀진 비운의 기업. ‘악덕기업인’으로 지목된 동명목재 사주들은 군부에 의해 고문을 받고 재산을 강제헌납 해야 만 했다. <뉴스포스트>는 ‘동명목재사건’을 집중 조명해 보았다.

정부는 1979년 ‘10․26사건’을 계기로 비상계엄을 선포함과 동시에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본부장으로 하는 10․26사건의 수사를 전담하기 위한 합수부를 설치하였다. 합수부는 계엄사령관 직속으로 중앙정보부, 경찰, 보안사 뿐만 아니라 헌병과 군․검찰까지 감독할 수 있었다. 합수부 본부장을 겸임하던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국장급 이상을 전원 조사하면서 중앙정보부를 무력화시켜 국가의 정보기관을 독점하였다. 계엄사 합수부는 1979년 12월 12일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연계되었다면서 최규하 대통령 직무대행의 허락 없이 상관을 전격 연행하는 ‘12․12군사반란’을 단행하였다. 이어 정권마저 탈취하기 위해 반대정치세력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계엄사령부 합수부는 사회정화의 1차 작업으로 부패․비리정치인을 척결한다며 김종필, 이후락 등을 부정축재자로 연행하여 조사하고 853억원의 재산을 환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전두환을 필두로 한 소위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제주도를 포함하는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의결․선포하게 하고 전국 주요 관공서에 계엄군을 투입하였다. 신군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로 진압한 후 “정부와 계엄당국 간의 긴밀한 협조로 계엄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국기를 튼튼히 다지고 누적된 병폐를 과감히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계엄법 및 정부조직법에 의거 1980년 5월 27일 국무회의에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설치령을 제작하고, 5월31일 전국비상계엄 하에서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관으로 행정 사법업무를 조정 통제하는 기능을 갖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를 설치했다.

국보위의 이같은 만행에 대해서는 십육년이 지나서야 법원을 통해 공식적으로 그 실체를 말할 수 있었다. 1996년 서울고등법원과 1997년 대법원에서 “피고인 전두환은 형식적으로는 대통령의 계엄업무에 대한 자문기구의 형태로 비상기구를 설치하되 실질적으로는 전두환 등의 주도로 행정각부 등을 통제하여 국정을 수행해 나가겠다는 의도 하에 1980년 5월 31일 국보위를 설치하여 상임위원장에 자신이 취임하였다. 그리고 당연직 상임위원을 군장성 12명과 대통령 비서관 4명으로 구성하고, 피고인 이학봉, 허화평, 허삼수와 함께 각 분과위원과 전문위원을 선정하여 피고인들이 그 실권을 장악한 후 국보위를 통해 공직자숙정, 언론인 해직, 언론통폐합, 불량배소탕 등 소위 국정개혁 작업을 수행하였다. 피고인 전두환등은 이러한 국정개혁 등 국정수행능력을 내외에 과시하여 자신들을 집권세력으로 부각시키는 데 이용하였다. 국보위는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각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하여 헌법기관인 행정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켰다”고 판시하였다.

국보위는 상임위원회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산하에 13개의 분과위원회를 설치하였으며, 사회정화분과위원회는 감사원 기타 사정담당 기관 소관사항 및 민원업무, 중앙정보부, 합수부 소관사항을 관장하였는데, 공무원 숙정작업, 언론기관의 통폐합, 학원 및 노조의 시위활동 근절, 기존의 경제 질서 조정 및 재벌그룹의 계열기업 정리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신군부 집권의 장애요소를 제거해 나갔다.

정화분과위원회는 이 사건 동명목재 그룹의 소유주들을 소위 ‘악덕기업주’라며 “사회정의구현 및 기업윤리의 정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계엄사 합수부 부산지부에서 조사하도록 하였다.

순식간에 ‘악덕기업주’로 몰려

70년대 석유파동은 원목 원가를 폭등시켰고, 생산국으로 하여금 원목 공급량을 제한하게 만들었다. 정부의 저물가정책은 국내 합판고시 가격을 합리적인 수준으로 할 수 없게 하였다.
합판을 주력품목으로 하고 있는 동명목재가 1980년대에 접어들어 경영난을 겪게 되었고,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계열사 대표이사인 강정남씨는 합판공정 설비의 50%를 인도네시아에 이설, 강석진과 강정남의 소유의 비업무용 부동산 처분, 동명목재상사의 법인화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경영개선안을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에 제출하여 자금지원을 약속받았으나 실제로 자금지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1980년 강석진 회장은 정부에 200억 원 상당의 구제금융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15일간 유급휴업에 들어가 정상화를 도모하였지만, 종업원들은 조업정상화를 요구하며 농성을 하였다. 이후 강석진 회장 등 사주들은 자신들의 전 재산을 동명목재 근로자들에게 넘겨주겠다고 각서를 작성하였고, 강석진 회장은 보유 주식을 매각하기로 하고 1980년 6월 부산투자금융주식을 럭키금성그룹에 매각하는 계약을 체결하였고 부산은행에 대해서도 매각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국보위 정화분과위와 계엄사 합수부는 동명목재 자구노력이 진행되는 중에 강석진 회장과 사주들를 악덕기업주로 지목하고 빼돌린 은닉재산을 찾아낸다는 명목으로 계엄사 합수부 부산지부로 하여금 동명목재를 수사하도록 지시하여 피해자들이 조사를 받고 있었다. 이후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은 동명목재가 36억 7천 300만원의 부도를 냈다고 공식 발표했다.

▲ 동명목재 고 강석진 회장
계엄사와 국보위 만행은 ‘전두환’책임

1980년 5월 당시 언론보도에 의하면 동명목재상사가 자금난으로 원목 원자재를 확보하지 못해 15일간 근로자들에게 유급휴가를 주면서 기한부 휴업에 들어갔고, 만약 구제금융을 받지 못하면 휴업의 장기화가 불가피하여 경제계에 파급효과가 크게 우려되고 있는 등 동명목재의 정상가동을 위한 정부당국의 정책적 배려가 아쉬운 실정이라는 사실을 보도하였다.
아울러 동명목재 휴업에 따라 근로자들은 조업정상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휴업철회를 위한 대규모 항의농성을 벌였으며, 사주인 강석진 회장은 동명목재의 회생을 위해 전 재산을 근로자들에게 넘겨주겠다는 각서를 정상화추진위에 전달했다는 사실과 당시 동명목재는 유동자산 201억과 고정자산 556억원등 자산 총액이 761억이고 부채는 500억 규모라는 내용 등을 보도하였다.

또한 동명목재의 경영 위기의 한 원인으로 가족들 간의 내분과 재산 싸움으로 보도하기도 하였다. 1980년 5월 10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강정남이 동명중공업등 계열회사의 대표이사로 취임하고 79년 6월에는 동명목재의 사장으로 취임하자 불화는 깊어갔고, 강정남의 무리한 계열회사확장과 동명목재상사에서 강정남과 고고화가 각각 재산을 빼돌려 결국 경영 위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같은 언론보도가 연일 발표되는 가운데 당시 국보위 정화분과위는 동명목재 사주들에 대한 조사 이유를 ‘경영진 일가의 전 재산양도각서 내역 이행 조치, 회사 운영과정에서 불법으로 사리를 취한 행위와 은닉재산 규명등’이라고 밝혔다.

즉 동명목재의 조사 명분은 강석진과 사주들이 악덕기업주이며 사회정화의 대상이기 때문이라는 것. 하지만 이후 진실화해위의 조사에 따르면 “강석진 회장은 동명목재의 경영난 타개를 위하여 개인재산처분노력, 융자 등 자구노력, 개인재산 포기각서 제출 등의 노력을 하고 있었고, 강석진이 여러 사회활동을 통해 악덕기업주라는 평이 없었다”라고 진실 규명했다.

또한 “국보위와 계엄사 합수부가 근거 없이 동명목재 사주들을 악덕기업주로 단정하고, 범죄혐의 없는 이들과 임원들을 구속 수사한 것은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라고 할 수 있다”면서 이어 “그 큰 책임은 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이자 계엄사 합수부장이었던 전두환에게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강제헌납은 취소사유지만 시효 지나”

진실화해위는 지난 2008년 ‘동명목재사건’을 “1980년 설립된 국보위의 헌정질서 파괴행위 등 위법 또는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한 인권침해사건”이라고 발표하였다. 따라서 “국가는 국보위가 초래한 헌정질서 파괴와 초법적 행위에 대해 총체적으로 현황을 파악하고 이를 시정할 수 있는 조치를 마련할 것과, 돌발적 정치상황이 발생 했을 때 정치적으로 탄압받고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하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노력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과 권고가 있은 후 처음으로 피해자 측이 일부 재산을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은 시효를 이유로 들어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부산지법 민사6부(이일주 부장판사)는 지난 1월 13일 동명목재 설립자인 강석진 회장의 장남 강정남씨가 국가와 부산시, 해운대구를 상대로 제기한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 등기절차 이행’ 청구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현재 학교법인 동명문화학원 이사장인 강씨는 1980년 당시 강 회장 부부가 소유하다 강탈된 부산 수영구 남천동 땅 3천759㎡(국가소유)와 해운대구 우동 땅 20㎡(해운대구 소유) 가운데 자신의 상속지분 7분의 5를 되돌려달라고 지난해 2월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원고 측이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강박을 당한 끝에 재산을 국가에 증여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면서도 “그 강박의 정도가 의사결정의 자유를 박탈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고 보이지는 않아 법률행위로서 무효라기보다 취소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또 “비상계엄이 해제로 헌정질서가 회복된 1981년 1월21일 이후에는 원고 측이 강박상태에 있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고, 그로부터 증여취소를 청구할 수 있는 시효(3년)가 소멸했다”면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결국 재판부는 진실위의 진상규명 이전과 같은 논리로 피해자들의 재산반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강씨를 비롯한 강 회장 유가족은 1998년 신군부가 강탈한 부산 일대 부동산과 공장건물 등 토지 317만3천45㎡, 부산투자금융㈜와 부산은행의 주식 약 700만주, 사주 일가의 은행 예금액 16억여원, 동명산업 등 계열사들의 재산에 대해 국가소유권말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가 항소심과 확정판결에서 패소한 바 있다.

당시 1심 재판부는 피해자 측의 손을 들어줬으나 항소심 재판부와 대법원은 국가가 가혹행위를 한 부분은 인정하면서도 “가혹행위 정도가 법률행위의 무효가 아닌 취소에 해당한다”면서 청구권 시효(3년) 소멸을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었다. 그러나 2008년 10월 진실위가 ‘동명목재 사건’을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불법행위라고 결정함에 따라 재산반환 소송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강씨는 변호인과 판결문을 면밀히 검토한 뒤 항소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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