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잔혹史⑧] "사람이 할 게 못 돼요"...전직 막내작가의 고백
[노동잔혹史⑧] "사람이 할 게 못 돼요"...전직 막내작가의 고백
  • 이별님 기자
  • 승인 2019.02.01 1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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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시청률은 절대권력
권위적 문화 개선 시급..."정부가 나섰으면"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TV가 위기라고 하지만, 방송의 힘은 여전히 크다. 방송에 한 번 출연했다 하면 동네 음식점이 맛집이 되고, 평범한 사람도 유명인이 된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시청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각종 프로그램은 모두 방송작가들의 펜대에서 탄생한다. 방송작가는 경력과 역할에 따라 메인과 서브, 막내로 나눠진다. 메인작가는 프로그램 전체의 틀을 담당하고, 서브작가는 방송 대본을 작성한다. 이들은 방송사나 외주 제작사에서 근무한다.

방송작가 중 경험이 적은 작가를 일명 '막내작가'라고 한다. 막내작가들은 프로그램에 필요한 자료조사와 출연자 섭외, 스케줄 정리, 보도자료 작성, 시청률 분석 등의 업무를 한다. 특히 막내작가의 경우 방송가 내의 자잘한 심부름은 모두 도맡아 하고 있다. 대부분 방송사 소속이 아닌 외주 제작사 소속의 프리랜서 노동자다.

메인작가 또는 스타작가의 꿈을 안고, 오늘도 궂은일까지 묵묵히 견뎌내는 막내작가들. 하지만 막내작가에서 메인작가까지 오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부당대우로 방송계를 떠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2015년부터 약 2년간 외주 제작사에서 막내작가로 일했던 A(26·여)씨 역시 마찬가지다. 어려서부터 방송작가를 꿈꾸던 A씨는 이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현실에 실망해 현재 방송계를 떠났다. A씨는 "방송작가를 했던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면서도 "'이 일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구나'라고 알게 됐다. 방송작가 꿈꾸시는 분들 많은데, 절대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한다. 본지는 꿈을 접을 만큼 열악한 막내작가의 현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지난 30일 A씨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주 5일제는 먼 나라 얘기

A씨에 따르면 외주 제작사 막내작가의 평균 노동시간은 12시간을 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프로그램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한창 바쁠 때면 새벽까지 일하거나 밤샘 근무를 하기도 한다. 그는 "촬영 뒷정리를 하거나 추가 수정 작업이 있을 때 밤샘 근무를 하게 된다"며 "매일 방송되는 데일리 프로그램이 특히 더 바쁘다"고 설명했다.

장시간 노동시간이 일상인 막내작가에게는 주 5일제마저 지켜지지 않는다. A씨는 "주말에 나오라는 말이 없으면 출근하지 않아도 되지만, 나오라면 나와야 한다"며 "설령 집에 있더라도 방송과 관련한 자료를 조사하거나 출연자 섭외 전화 등을 해야 하기 때문에 휴일은 없다고 보면 될 거 같다"고 증언했다.

휴일마저 반납한 살인적인 업무량에도 임금은 턱없이 부족하다. A씨는 "방송작가를 시작하면 돈에 욕심이 있으면 안 된다"며 "이 일을 사랑하지 않으면 못한다"고 말했다. 이어 "제 첫 월급은 세금 떼고 80만 원대 후반이었다"며 "3년 차 정도 되면 130만 원대까지 오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평소 금전적 욕심이 없었다던 A씨마저도 지나치게 낮은 임금에 대해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수준'이라 증언했다.

하지만 이마저 못 받는 경우도 있다는 게 A씨의 증언이다. 제작사가 만든 방송을 방송국에서 방영하지 않으면 근무를 했음에도 임금을 받지 못한다. 그는 "방송에 안 나가면 (방송사는) 제작사 측에 돈을 주지 않는다"며 "열심히 만들고 돈을 못 받는 그런 경우도 꽤 있었다. 제작사가 돈을 받지 못하면 작가들도 못 받는다"고 말했다.

폭언·인격모독 비일비재

A씨가 방송계에 등을 돌린 이유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뿐만이 아니었다. 선배 작가로부터 듣는 폭언과 인격 모독성 발언은 A씨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그는 많은 막내작가들이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2016년 전국언론노동조합이 발표한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방송작가 82.8%가 인격 무시와 관련한 발언을, 58.4%가 욕설을 업무 수행 과정에서 들었다고 답했다.

특히 A씨는 방송의 시청률이 낮을 경우 막내작가들이 겪는 고통이 더욱 커진다고 증언했다. 시청률이 좋지 않게 나올 때 선배 작가로부터 인격 모독 발언을 듣는 경우가 많았다는 이야기다. 그는 "시청률은 사내 모든 분위기를 좌우하는 거 같다"며 "시청률이 낮으면 작은 문제가 생겨도 폭언을 들었다"고 전했다.

A씨가 들었던 폭언의 수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선배들은 육두문자는 물론 '머리가 모자르다'는 식의 인격 모독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A씨는 "막내작가 일을 하고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다"며 "폭언을 들었을 때 화가 났기보다는 '내가 사람으로서 제 역할을 못 하나', '검사를 받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지속적인 인격모독과 폭언의 트라우마는 컸다. A씨는 "아직도 그분들이 무섭고, 꿈에 나온다"고 고백했다.

시청률이 낮아지면서 방송이 자극적으로 변질되는 것 역시 막내작가들의 고통을 배가시켰다. A씨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했었다"며 "취지는 좋았지만, 시청률이 떨어지자 약자의 고통을 지나치게 부각하는 형태로 방송이 흘러갔다"고 말했다. 특히 섭외의 어려움이 컸다. 시청률이 떨어지자 위에서는 좀 더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운 이들이 방송에 나오길 원했다. 그는 "시청률의 압박을 받으면 섭외할 때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며 "회의감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상명하복의 권위적 문화

A씨는 막내작가들이 겪는 부당한 처우와 인권모독 외 방송작가 내부 권위적 문화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방송 마인드 자체가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라'라는 거다"라며 "선배들도 배운 게 그거다. 그게 내려온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안 되는 것은 분명히 있고, 안 되는 걸 억지로 되게 하라는 게 잘못이다"라며 "이걸 개선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권위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보니 막내작가는 방송 업무와 관련 없는 사적인 지시를 받기도 한다. A씨는 "사적인 일도 많이 시키는데,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면서 "시키면 무조건 '네'하는 분위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선배들은) 막내작가가 일을 배우면서 돈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듯하다"며 "'너는 편하게 일하는 거야! 옛날엔 더 심했어' 이런 마인드인 거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상명하복의 문화는 방송작가 내부의 폐쇄성에서 나온다. A씨는 "방송작가 시장이 작기 때문에 소문이 무척 빠르다"라며 "이 바닥이 좁아서 안 좋은 소문이 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증언했다. 이 때문에 A씨는 막내작가들이 부당한 대우를 겪어도 노동청 등 정부 기관에 호소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방송작가 내부가 소위 '좁은 바닥'이다 보니 '인맥'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A씨는 "이력서를 넣고 입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인맥으로 들어온 작가들이 상당히 많다"고 설명했다. 폐쇄적인 조직에서 '인맥'이 작동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한편 A씨는 방송작가들의 처우 개선과 인권 보호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근무시간부터 조정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제작사 측에서는 저임금으로 장시간 노동이 가능한 막내작가를 놔 줄 거 같진 않고, 정부 차원의 대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전했다.

아울러 A씨는 대부분 방송작가들이 프리랜서로 고용되는 현실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상대적으로 해고가 쉬운 프리랜서 노동자이기 때문에 '얘 말고 다른 사람을 쓰면 된다'라는 분위기가 사측에 팽배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방송국으로부터 나오는 추가 수익이 막내작가까지 가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그는 "재방송을 하면 메인작가에게 방송료가 나가는데, 수익 배분이 막내까지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한 막내작가가 프로그램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면 저작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별님 기자 leestarnim@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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