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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다 듣지 못한 말들'...위안부 피해자들의 기록
[르포] '다 듣지 못한 말들'...위안부 피해자들의 기록
  • 이별님 기자
  • 승인 2019.02.26 2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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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 할 역사...세계에 존재했던 피해자
정진성 연구팀 확보...위안부 실물 사진 공개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의 역사를 담은 실물 사진이 국내 전시회를 통해 최초 공개됐다. '만삭의 위안부' 모습이 담긴 사진 등 총 3장이다.

(사진=서울시 제공)
(사진=서울시 제공)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서울도시건축센터에서는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이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해당 전시회는 이날부터 다음 달 20일까지 진행된다. 누구나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휴관일 없이 열릴 계획이다.

전시회에서는 서울시와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이 확보한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모습이 담긴 실물 사진 3장이 공개됐다. 버마(미얀마)에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들이 모여있는 사진 2장과 '만삭의 위안부' 모습이 담긴 사진 1장이다.

그 밖에도 1946년 3월 2일 자 조선인의 귀환을 다룬 뉴욕타임스 신문 실물, 쿤밍 보고서 및 축섬 승선자 명부 복제본, 김현옥 씨가 개인 소장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최초 증언자의 사진 등이 공개됐다.

이번 전시는 버마의 북부 작은 도시 미치나, 버마와 접경지인 중국 윈난성 송산과 텅충, 중부 태평양에 위치한 축(Chuuk)섬, 일본 오키나와 등 각기 다른 지역에 있었던 위안부 피해자들의 기록을 담아냈다. 중국 외 지역에서도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가 존재했다는 낯선 역사적 진실이 그려졌다. 본지는 이날 '아직 다 듣지 못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서울도시건축센터를 방문했다.

기록으로만 남은 피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버마를 침공하면서 북부 도시 미치나에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동원했다. 이 중에는 조선인 위안부들도 있었다. 조선 전국 각지에서 동원된 이들 중 일부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했을 때 연합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당시 연합군은 이들의 존재를 사진과 문서 등의 형태로 기록으로 남겼다.

이날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위안부 피해자 실물 사진은 이때 남긴 사진 2장이다. 첫 번째 사진에는 중국계 미군 원로이 챈 대위와 일본계 미군 하워드 후루모토, 그랜트 히라바야시, 로버트 혼다 병장이 조선인 위안부 약 20명과 함께 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버마 미치나의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모습이 담긴 실물 사진. (사진=이별님 기자)
버마 미치나의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모습이 담긴 실물 사진. (사진=이별님 기자)

카메라를 웃으면서 정면으로 바라보는 동양계 미군들과 긴장한 탓에 렌즈를 응시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의 모습이 대조된다. 특히 한복을 입고 있는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의 모습이 눈에 띈다. 1999년 히라야바시 병장 증언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처음에 낯선 미군들을 경계했지만, 병사들의 따듯한 대우 덕분에 이후에는 서로 노래를 불러 주는 등 친하게 지냈다.

전시회 현장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미군은 위안부들을 붙잡고 군사적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관계자는 "두 번째 사진은 심문 장면을 담은 것"이라며 "미군은 위안부들에게 해당 부대 부대장 사진을 보여주면서 '아는 사람이냐'라고 심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치나의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은 사진과 문서 등 기록으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타 지역에 있던 위안부 피해자들과는 달리 피해 사실을 증언한 이는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이들이 어떤 일을 겪었고,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는 학계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만삭의 위안부'의 증언

전시회 두 번째 섹션은 중국 윈난성 송상과 텅충 전투지에서 있었던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故 박영심 할머니 등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은 수용소에서 도망친다.

박 할머니 등은 패전 현장에서 중국군에게 구출된 후 중국 송산 수용소에서 포로가 됐다. 전시회에서 공개된 마지막 위안부 피해자 실물 사진은 당시 만삭이었던 박 할머니의 모습을 담고 있다. 맨 오른쪽 신발도 신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하는 여성이 박 할머니다. 이후 그는 뱃속의 아이는 수용소에서 유산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 故 박영심 할머니가 만삭인 상태로 서 있다. (사진=이별님 기자)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 故 박영심 할머니의 모습이 담긴 실물 사진. (사진=이별님 기자)

연합군과 일본군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이곳에서는 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사망했다. 관계자는 "박영심 할머니 증언에 따르면 이곳에서 많은 피해자가 사망했다"며 "일본군은 전투가 심해지면 사람을 버리거나 학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진 속 웃고 있는 남성을 일본인으로 오해하고 계신 분이 많은데, 그는 중국군이다"라고 덧붙였다.

박 할머니는 송산에서 중국군에 의해 쿤밍 수용소로 이송됐다. 미·중 연합군이 작성한 쿤밍 포로 심문 보고서에 따르면 이 수용소에는 박 할머니를 포함한 조선인 위안부 23명의 명단이 있었다. 박 할머니는 우여곡절 끝에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갔다. 그는 1990년대 이후 피해 사실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박 할머니는 2006년 평양에서 작고했다.

태평양 섬까지 위안부 동원

중부 태평양에 위치한 축섬은 미크로네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4개 주 가운데 하나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 당시 축섬까지 조선인들을 동원하고, 착취했다. 이 중에는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도 있었다. '축섬 위안부'의 존재는 1993년 故 이복순 할머니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료는 발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서울대학교 정진성 연구팀은 2017년 이곳에서도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연구팀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축섬에서 떠나는 배에 오른 사람들의 명부들과 미군 작전일지, 사진 몇 장을 발견했다. 각종 자료를 비교 대조한 결과 축섬에 26명의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가 있었음이 확인됐다.

특히 연구팀은 축섬 명부에서 이 할머니로 추정되는 인물을 발견해 제적 등본과 가족·지인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작업도 거쳤다. 확인 결과 이 할머니의 증언대로 일제가 태평양 한가운데서도 조선인 여성을 상대로 반인륜적 전쟁 성범죄를 저질렀음이 드러났다.

故 이복순 할머니의 생전 모습과 그의 젊은 시절로 추정되는 여성의 사진이 전시회에 나란히 걸려있다. (사진=이별님 기자)
故 이복순 할머니의 생전 모습과 그의 젊은 시절로 추정되는 여성의 사진이 전시회에 나란히 걸려있다. (사진=이별님 기자)

축섬의 자료 중에는 이 할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과 매우 흡사한 젊은 여성의 사진도 있었다. 생전 그와 가깝게 지낸 대구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이인순 관장과 이 할머니의 아들은 해당 여성이 이 할머니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당당하고 독립심이 강한 성격의 이 할머니는 생전 자신이 위안부임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피해 사실도 1993년 비교적 일찍 신고했다. 다만 위안부 피해 사실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고 전해진다. 현재까지 증언자는 이 할머니가 유일한 상황. 축섬 위안부 피해 실태에 대한 연구는 이제 남은 자의 몫이 됐다.

오키나와의 비극과 최초의 증언자

전시회 마지막 섹션은 오키나와에 있던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와 전쟁의 상흔을 그렸다. 현재 일본의 영토인 오키나와는 태평양 전쟁 막바지 무렵 일본군과의 전투로 고문, 학살, 수탈 등의 아픔을 지니고 있다. 이곳에서는 1975년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故 배봉기 할머니가 있었다.

오키나와 전역에 위안소들이 설치됐고, 대부분 조선인으로 구성됐다. 이때 오키나와의 위안소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배 할머니는 종전 이후에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살아가던 배 할머니는 1975년 강제 추방위기에 놓이자 '살기 위해' 피해 사실을 밝혔다. 1991년 국내 최초로 피해 사실을 밝힌 故 김학순 할머니보다 16년이나 먼저 증언한 것이다. 다만 배 할머니는 자신의 원해서 위안부였음을 고백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당국은 증언 이후 그에게 특별 영주 자격을 부여했다.

평생 사람을 경계하면서 살았다는 배 할머니는 피해 사실 고백 이후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을 경계했다. 하지만 이웃들의 지속적인 소통과 돌봄을 통해 배 할머니는 점점 마음의 문을 열었고, 자신의 삶에 대해 털어놓기도 했다. 배 할머니의 아픔은 오키나와 주민들에 의해 기록됐다.

일제에 의해 참혹한 피해를 보았던 오키나와 인들은 위안부들의 아픔을 기린다. 2008년 오키나와 남쪽 미야코섬에는 일본군 위안부들을 추모하는 아리랑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전시는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별님 기자 leestarnim@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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