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8백만 마리 死...투명벽 충돌 심각
환경부, 대책 나서...5x10규칙 적용 필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에게 측은지심이란 오직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는 마취 없이 동물을 해부하는 등 잔혹한 동물실험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동물이 ‘쾌락이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기계’라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데카르트보다 공감의 범위가 넓은 이들이 많아졌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플라스틱 빨대 퇴출 붐이 일어난 것도 빨대가 콧속에 들어가 고통스러워하는 바다거북이 동영상이 화제가 되면서부터였다. 이제는 ‘동물권’을 이야기하는 시대다. 오랫동안 동물들은 인간을 위해 살아왔지만 인간들이 동물을 위해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기도 한다. <뉴스포스트>는 동물을 위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5편에 걸쳐 준비했다. 동물에게까지 측은지심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사람에게도 그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우리는 더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다. <편집자주>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인간이 만든 투명 방음벽과 대형 건물이 창공을 가로지르는 새들을 위협한다. 한해 약 800만 마리의 새들이 투명벽과 충돌해 폐사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 가운데, 정부 차원의 대책이 눈길을 끈다.

서울 서초구 인근 공원에서 까치로 추정되는 새 한 마리가 나무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DB)
서울 서초구 인근 공원에서 까치로 추정되는 새 한 마리가 나무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이별님 기자)

대형 건축물의 외벽이나 방음벽.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깔끔하고 세련돼 보이는 투명벽은 생태계의 주요 구성원인 조류에게 '죽음의 문'으로 통한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새들이 투명벽을 못 보고 충돌할 경우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즉사하기 쉽다. 실제로 환경부가 국립생태원과 지난 2017년 12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전국의 건물 유리창 등 총 56곳을 조사한 결과 조류 378마리가 투명벽에 충돌해 폐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건축물과 투명 방음벽 통계, 폐사체 발견율과 잔존율 등을 고려해 국토 전체 피해량을 추정한 결과 연간 800만 마리에 달하는 새들이 투명벽 충돌로 폐사한다고 환경부는 전했다. 폐사된 대부분의 조류는 한반도 전역에 서식하는 흔한 텃새인 멧비둘기지만, 참매와 긴꼬리딱새 등 멸종위기 야생조류도 있었다.

국립생태원이 2017년 12월 발표한 '야생조류와 유리창 충돌'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조류는 생태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곤충과 설치류를 포식하는 새들은 농작물 피해를 막아주고, 말라리아·뎅기열 등 질병의 전염을 방치한다. 식물의 수분과 씨앗을 퍼트리는 새들의 특징은 자연 서식지 유지를 가능케 한다.

약 800만 마리의 새들이 인간이 설치한 투명벽에 부딪혀 희생되는 걸 막는 조치는 단순히 동물 보호 차원을 넘어 환경 보호와 생태계 건강성 유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다.

경기 고양시 인근 대로에 마련된 독수리 스티커. 전문가들은 유리창 한군데에 스티커를 부착하는 것으로는 조류 충돌 사고를 막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사진=이상진 기자)
경기 고양시 인근 대로에 마련된 독수리 스티커. 전문가들은 유리창 한군데에 스티커를 부착하는 것으로는 조류 충돌 사고를 막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사진=이상진 기자)

독수리 스티커 효과 적어

더이상의 불필요한 희생을 막기 위해 정부 차원의 대책이 나왔다. 환경부는 야생조류들의 폐사를 막기 위한 조치에 나섰다. 지난 25일 환경부 관계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오는 4월부터 기존 투명 방음벽과 건물 유리창에 대해 조류 충돌 방지 테이프를 부착하는 시범사업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전국 지자체 및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공모해 투명 방음벽 2곳과 건물 2곳을 선정해 진행한다. 관계자는 "다음 달에 대상 공모를 하는데, 신청이 들어오면 테이프를 붙일 예정이다"리며 "신청 대상 중 심사해서 총 4곳을 선정한다"고 설명했다.

'조류 충돌 방지 테이프'란 투명벽에 새들이 부딪히지 않도록 붙이는 일종의 스티커를 말한다. 흔히 독수리 등 육식성의 맹금류 스티커를 붙여 새들이 알아서 피하도록 하는 장치다. 하지만 기존의 독수리 모양의 스티커를 투명 벽에 띄엄띄엄 붙이는 것만으로는 조류 충돌사고를 막을 수 없다는 게 환경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해당 관계자는 "독수리 스티커를 촘촘하게 붙이면 효과가 있겠지만, 띄엄띄엄 붙이면 조류가 인식을 못 하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설명했다. 조류 충돌을 최대한 방지할 수 있는 스티커는 수평 5cm 이하와 수직 10cm 이하의 무늬를 촘촘하게 붙이는 방법이다. 이를 '5x10 규칙'이라 한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관계자는 "대전 유성구 반석동 지점의 투명 방음벽에 실험해본 결과 조류 충돌 사고가 현저히 줄었다"며 "국내 시범사업뿐만 아니라 해외 사례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5x10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5x10 규칙'이 적용된 조류 충돌 방지 테이프가 건물 외벽에 부착돼 있다. (사진=환경부 제공)
'5x10 규칙'이 적용된 조류 충돌 방지 테이프가 건물 외벽에 부착돼 있다. (사진=환경부 제공)

"조류 충돌 문제 더 알려지길"

연간 800만 마리에 달하는 폐사를 막기 위해 정부가 나서기 시작했지만, 우려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음 달 시범사업은 투명 방음벽 2곳과 큰 건물 2곳 등 총 4곳에서만 진행해 조류 충돌 감소율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관계자는 향후 조류 충돌 방지 스티커를 붙이는 사업을 "전국으로 확대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아울러 조류 충돌 방지 관련 법이 미비하다는 점도 문제다. 관계자는 "현재 관련법은 없다"며 "국토교통부 등 유관기관과 조류충돌 저감 문제 관련 내용을 협의 중"이라고 전했다. 방음벽이나 건축물 설계 시 조류 충돌 저감 관련 내용을 안내하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내달 건설업계, 지자체 등에 배포할 예정이라고 관계자는 덧붙였다.

굵직한 정치·사회적 이슈보다 상대적으로 동물보호·환경 이슈에 대한 여론의 관심도가 떨어지는 현상도 문제다. 실제로 관계자는 조류 충돌 사고 문제의 공론화를 바란다고 취재진에 전했다. 그는 "새들과 (인간이) 공존해야 하지만, 저희가 직접 확인해보니 새들이 너무 많이 죽어있어 안타까웠다"며 해당 문제가 더 알려졌으면 바란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번 사업으로 눈에 띄는 조류 충돌 저감 효과가 단기간에 나타나기는 어려울 수 있다. 다만 조류 충돌 방지 관련 법령 제정과 스티커 부착 확대, 생명에 대한 인식 제고 등이 이뤄진다면 인간과 새들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이 좀 더 이른 시일 내 조성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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