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 전문가 칼럼=이인권] 대학교에 들어가 내가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콘사이스 영어사전을 외우는 것이었다. 누가 보면 무모하고 무식한 도전이 아니냐고 했을 것이다. 주위에서 보면 왜 그 힘든 일을 하는가도 생각했겠지만 영어를 배우는 취미 자체가 큰 즐거움이었다.
요즘은 영어 철자 말하기 대회라는 것도 있다. 미국의 스크립스(E. W. Scripps)사가 매년 주최하는 <스크립스 내셔널 스펠링비(SNSB)>는 만 15세 이하의 초 · 중등학생들이 참가하여 출제자의 발음을 듣고 철자를 맞히는 대회다.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부터 열리고 있는데 2011~2012년 연이어 중학교 2학년인 서지원 양이 우승을 차지했던 적이 있다. ‘카머라더리’ 라고 원어민이 출제를 하면 ‘c,a,m,a,r,a,d,e,r,i,e', ’임프리마터‘하면 ’i,m,p,r,i,m,a,t,u,r'라고 정확한 철자를 말해야 한다.
이때 두 해 연이어 우승한 서 양은 2,662쪽이나 되는 『메리엄-웹스터』 사전 한 권을 정독했다고 한다. 그녀는 무작정 단어만 암기한 것이 아니라 단어의 뜻과 예문, 어원까지 책을 읽듯 쭉 읽었다는 것이다.
내가 영어를 배우던 당시 이런 대회는 당연히 있지도 않았겠지만 나는 영어 단어를 무조건 외우는 데에 도전해 보았다. 그래서 갱지를 한보따리 사다 놓고 종이가 새까맣게 되도록 무조건 영어 단어와 뜻과 예문을 빽빽이 써가며 하나하나 암기해 나갔다.
나는 대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미팅 같은 것보다도 영어 단어를 익히는 게 그 어느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 방학이 되면 일주일 간 집에 틀어박혀 영어 단어 외우는 데 모든 노력을 쏟은 적도 있다. 이렇게 영어 어휘를 암기하는데 사용한 갱지 분량을 따지면 아마 한 두 리어카는 족히 되었을 것이다.
무조건 미니 영어사전을 표제어 순서대로 어떻게 보면 무식하게 외우기도 하고, 또 어근(語根)을 분석하여 단어를 암기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책을 사서 몰입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영어사전을 모조리 베껴 쓴다 할 정도로 깡그리 외우겠다는 무모한 도전을 한 것이다.
특히 단어를 많이 외우기 위해서는 핵심 어원을 놓고 파생되는 단어를 배우는 방식을 택했다. 기본적으로 같은 어근을 갖고 있는 단어끼리 그룹을 지어 배우면 단어를 폭넓게 이해할 수가 있으며 기억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agri-(밭)’, ‘anthropo-(인간)’, ‘astro-(별)’, ‘demos-(사람)’, ‘dyna-(힘)’, ‘geo-(지구)’, ‘helio-(태양)’, ‘hydro-(물)’, ‘hypno-(잠)’, ‘magni-(큰)’, ‘manu-(손)’, ‘pod-(발)’, ‘psycho-(마음)’, ‘script-(글)’ 등등….
주요 어근을 기본으로 숙지 한 후 여기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단어들을 배우면 확실하게 기억하는 데 효과가 컸다. 내가 영어를 배울 때만 해도 인터넷이 없어 서점에 가서 어근 사전이나 동의어 사전을 구입해 배웠다.
그러나 지금은 메리엄 웹스터 사이트나 접두어 접미어 검색사전 등 온라인에는 영어 단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각종 사이트가 많이 있다.
한편 나는 매일 영어신문을 보면서 그 속에서 다양하게 쓰이는 영어의 뜻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면 단어를 낱개로 외우는 것보다 전체 문장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파악 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영어가 아무리 취미였다지만 하다 보면 권태감이나 싫증이 들 때도 자주 있었다. 누구나 그런 것처럼 나도 외국어를 배우는데 소진현상을 자주 겪었다. “이렇게 영어를 해서 무엇 하려고 이러나?”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 때가 많았다.
여름방학이 되면 동료들은 산이다 들이다 하여 대학 생활의 낭만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골방에 앉아 갱지에 빽빽이 쓴 볼펜 잉크가 도리어 손에 묻어나도록 영어 사전과 씨름하며 있었으니 때로는 스스로에게 한심하다고까지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종이에 써가며 외운 영어 단어가 기초가 되어 쌓여진 영어 실력이 후에 제 값을 톡톡히 발휘할 줄이야…. 내가 영어에 심취해 있었던 대학 시절만 해도 미래에 글로벌 세상이 올 줄은 누구도 몰랐었다.
결국 대학에서 남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영어를 취미로 만들었던 것이 나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되어 나의 개인이나 사회생활에서 뼈대가 되고 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경험한 것에 비추어 지금 미래학자들이 앞으로 변화될 세상을 예견 하는 것을 믿는다. 앨빈 토플러나 롤프 옌셴, 그리고 존 나이스 비트와 같은 석학들이 내다보는 미래상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지금 우리사회의 지나친 20세기적 사교육이 지나고 보면 부질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느낄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는 꿈과 감성의 콘텐츠가 핵심이 되는 ‘드림 소사이어티’가 올 것이라고 한다. 또 앞으로 10년이 되면 현재에 배운 지식은 무용지물이 되어 새로운 것을 다시 배우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미래학자들이 예측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한국인들의 사교육 열풍은 미래를 대비한 투자라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보면 오로지 현재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나는 영어를 배우는 것도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대학생 때부터 영어 어휘력에 집중하여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어휘와, 또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단어의 폭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코리아타임스》를 보면서도 유익한 영어 표현이 있으면 그것을 익히느라 새까맣게 사인펜으로 몇 번이고 밑줄을 쳐가며 읽는 습관을 몸에 붙였다. 밑줄을 치며 읽어야 그게 내 기억 속으로 확실하게 들어올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습관은 버려지지 않아 지금도 중요한 표현은 몇 번씩 줄을 쳐가며 읽고는 한다.
한번은 내가 살던 아파트의 경비원이 쓰레기로 버리려고 내어 놓았던 영자신문을 보고 왜 까맣게 신문에 줄을 쳐서 버리느냐고 물었다. 그 분이 내가 영어 배우느라 그렇게 영어신문을 까맣게 줄 쳐가며 하는 줄이야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나는 어휘력을 갖추고 나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 영영사전을 들춰보는 것을 지금까지 즐겨하고 있다. 마치 책을 읽듯 영영사전에서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표제어를 찾아 영어로 풀이해 놓은 것과 그 단어를 활용한 예문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을 재미로 여기고 있다.
이것이 영한사전을 보는 것보다 두 배의 학습 효과가 있다. 물론 영어 초보자들은 기본적으로 영어에 조금 익숙해진 단계부터 가능한 일이다. 영영사전을 보게 되면 단어를 영어로 쉽게 풀이해 놓고 있어 영한사전에 나온 해석만으로는 그 속뜻을 충분하게 알 수 없는 경우에 아주 효과적이다.
그래서 나는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단어를 찾을 때 영한사전과 함께 영영사전을 같이 사용하는 것을 습관화하라고 권장한다. 설령 아는 단어라 하더라도 사전을 들쳐보는 습관을 들이면 영어에 더 많이 노출되는 기회가 되어 확실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인권 예술경영 컨설턴트 / 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CEO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