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다운’으로 다시 불붙는 북미대화

[뉴스포스트=김혜선 기자] “중요한 것은 대화의 모멘텀을 계속 유지시켜 나가고 또 가까운 시일 내에 제3차 북미회담이 열릴 수 있으리라는 그런 전망을 세계에 심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진=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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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회담 불발 이후 흔들리던 북미대화가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 대통령의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빠른 시일 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해 3차 북미정상회담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11일(현지시간)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에서 이같은 내용을 논의했다고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전했다. 이날 한미회담은 양국 퍼스트레이디가 동석하는 단독 정상회담(29분), 핵심 참모들이 배석하는 소규모 정상회담(28문), 업무 오찬을 겸한 확대 정상회담(59분) 순으로 약 2시간(116분)에 걸쳐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조만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할 계획을 설명하고 가까운 시일 내 방한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청와대는 전했다. 트럼프는 문 대통령에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또는 남북접촉을 통해 한국이 파악하는 북한의 입장을 가능한 한 조속히 알려달라”고 답했다고 한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귀국 후 본격적으로 북한과 접촉, 조기에 네 번째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할 방침이다. 다만 이 관계자는 “남북정상회담의 장소와 시기 등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다”고 덧붙였다.

이 외에도 양 정상은 향후 한반도 비핵화 협상을 추진할 방향, 3차 북미정상회담 등 구체적인 내용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청와대는 이 같은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이나 합의문을 발표하지 않고 청와대의 언론 발표문으로 갈음한 것도 이번 회담이 북미간 대화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열렸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꿈쩍않는 트럼프 “금강산·개성공단 때 아니다”

문 대통령의 방미로 꺼져가던 북미간 대화 불씨는 살아났지만 전망이 밝지는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3차 북미정상회담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하노이 회담 당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사진=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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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스몰딜이 가능한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현 시점에서는 빅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빅딜이란 핵무기를 없애는 것”이라고 답했다. 우리 정부에서 제안하는 ‘단계적 비핵화’, 즉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기와 ‘+a’ 조치를 취할 경우 일부 대북제재를 완화하는 등 방안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한 것으로 해석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개성공단과 금강관 관광 재개 등 남북경협 사안에 대한 질문에도 “적절한 시기가 되면 할 것”이라며 현재는 남북경헙사업을 시작할 때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 “아주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을 잘 알게 되었고 지금은 존경하고 있다”는 등 찬사를 쏟아놨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개인적 관계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북한이 움직일 수 있는 경제 제재 완화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이유는 대북 강경파의 입김이 상당히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 전, 이례적으로 미 행정부의 외교·안보 인사들을 만난 것도 대북 강경파인 이들을 달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이날 문 대통령이 만난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대표적인 대북 강경파로 꼽힌다. 또 그동안 대북정책에서 ‘굿 캅’ 역할을 해왔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최근 하노이 회담을 결렬시킨 주역이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실용파에서 강경파로 전환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돌았었다.

특히 폼페이오 장관과 볼턴 보좌관은 북한이 특별히 기자회견까지 열면서 “하노이 회담을 결렬시킨 장본인”이라고 주장하던 인물들이다. 이날 문 대통령은 두 사람을 만나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위대한 여정에 폼페이오 장관과 볼턴 보좌관의 노고와 기여를 높이 평가한다”고 추켜세웠다.

문 대통령은 “미북간 대화의 모멘텀을 유지하고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성과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그것이 가능할 것으로 확신한다”면서 “앞으로도 계속 한국 측 카운터파트들과 긴밀히 공조·협의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폼페이오 장관과 볼턴 보좌관은 “북한과 대화를 지속적으로 진행할 것이다.또 여러 수준에서 다각적인 대북 대화 노력을 경주하겠다”고 답했다.

문 대통령은 펜스 부통령과의 회담에서는 “지난해 2월 펜스 부통령이 단장으로 참석한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며 지속적인 협조를 당부했다. 펜스부통령은 “미북 비핵화 협상 관련해 미국 측은 향후 긍정적인 자세를 견지하겠다. 대화의 문이 열려있다”고 화답했다.

김정은 “자력갱생” 강조하며 버티기 돌입

가까스로 북미간 대화 기조는 살렸지만, 실제로 한반도 비핵화를 이끌어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북한 역시 ‘단계적 비핵화’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장기전에 돌입할 채비를 하고 있는 모양새다.

(사진=노동신문)
(사진=노동신문)

지난 10일 김정은 위원장은 노동당 정치국회의를 개최, “자력갱생”을 강조했다. 당초 북한은 최고인민회의를 눈앞에 두고 정치국회의 등을 공개하지 않아왔다. 그러나 북한 관영언론은 문 대통령의 방미를 앞둔 11일 이례적으로 김 위원장의 대외 메시지를 내보냈다.

김 위원장은 이날 “당 및 국가적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분석하고 오늘의 긴장된 정세에 대처해야 한다”며 최근 대화가 끊긴 북미관계를 우회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면서 “간부들이 혁명과 건설에 대한 주인다운 태도를 가지고 고도의 책임성과 창발성,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하여 우리 당의 새로운 전략적 노선을 철저히 관철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면서도 자력갱생을 강조한 것인데, 일각에서는 김 위원장이 하노이회담 실패 이후 북한의 ‘새로운 길’로 전략적 인내를 선택했다는 해석이 나오다. 이날 김 위원장은 ‘자력갱생’을 25차례나 직접 언급하며 “제재로 굴복시킬 수 있다고 오판한 적대세력에게 타격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11일 우리나라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에서 대미라인이 정비된 것도 장기협상을 염두에 둔 결정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날 최고인민회의는 김정은 위원장을 국무위원장에 재추대했고, 명목상 국가수반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김영남에서 최룡해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교체했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그동안 대미 협상에서 강한 목소리를 냈던 통일전선부 라인이 뒤로 물러나고 김정은 위원장이 소속된 국무위원회에 외무성 인사가 대폭 강화됐다는 점이다. 그간 대미 협상의 총책을 맡았던 김영철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은 국무위원회 위원직에 유임됐지만 김혁철 대미특별대표, 김성혜 통일전선부 통일책략실장은 일련의 개편 국면에서 전혀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반면 리용호 외무상과 리수용 당 국제담장 부위원장 등 외무성 소속 인사는 국무위원회 위원직에 유임됐고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새롭게 국무위원으로 편입됐다. 최 부상은 이번에 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며 입지를 강하게 굳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 신설된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직을 ‘명실상부한 2인자’ 최룡해가 동시에 맡으면서 사실상 대미협상 주역이 11명의 국무위원회로 모두 모이게 됐다. 이 밖에 국무위원회 위원은 김재룡 신임 내각총리와 리만건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김수길 총정치국장, 노광철 인민무력상 등이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이번에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직이 신설되고 국무위에 북한의 외교 관련 실세들에다가 최 부상까지 들어감으로써 외교 라인이 대폭 강화됐다”라며 “이는 향후 대북 제재 완화를 위해 미국과의 협상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라고 평가했다.

이번 개편으로 북한의 대미 전략팀은 최룡해를 중심으로 활동할 것이 예상된다. 최룡해 부위원장이 대미 협상 총책인 김영철 부위원장보다 직함이 높아진 것을 감안하면 그가 향후 김영철 부위원장을 대신해 대미 특사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전문가들은 대미 강경파의 이미지가 강하던 김영철 부위원장 대신 상대적 온건파로 분류되는 최룡해 부위원장이 협상 전면에 나설 경우 대미 메시지로서도 북한에 긍정적 효과를 줄 것이라는 분석을 제기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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