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김혜선 기자] 헌법재판소가 지난 11일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후 관련법안 개정의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헌법불합치는 낙태죄가 헌법에 위반되지만, 즉시 효력이 상실될 경우 사회적으로 혼란이 생길 수 있어 당장 폐지하지 않고 법을 개정할 수 있는 시한을 두는 판결이다. 국회는 개정시한인 2021년 전까지 관련법 개정을 완료해야 한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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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칼을 빼든 것은 이정미 정의당 대표다. 이정미 대표는 15일 낙태죄 폐지 내용을 담은 ‘형법 개정안’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본인 의사만 있다면 임신 14주 이내까지 자유롭게 인공임신중절을 허가하고, 14주 이상 22주 이내 기간까지는 사회적·경제적 사유로 임신중절을 허용했다. 용어도 태아를 떨어트린다는 ‘낙태’라는 단어를 ‘인공임신중절’로 바꿨다.

하지만 이날 이정미 대표의 발의안에 이름을 올린 의원 중 민주당·한국당 의원들의 이름은 없었다. 국회법상 최소 10명의 의원이 함께 참여해야 발의할 수 있는데, 보통 민주당과 정의당이 범여권으로 묶이는 것을 고려하면 민주당 의원 이름이 없는 것은 눈에 띈다. 이정미 대표의 낙태죄 폐지 법안에는 정의당 소속 의원과 일부 바른미래당 소속 의원, 무소속 의원 등이 공동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다.

16일 이정미 의원실 측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민주당 측 몇몇 의원에게도 공동 발의 요청을 했었다”면서도 “민주당 측에서도 해당 법안 발의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민주당 측에 공동발의를 요청했지만, 민주당 자체 법안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공동발의 명단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정작 민주당 측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위원들은 해당 법안을 ‘검토’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법안발의 움직임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복지위 소속 모 민주당 위원 측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의원 개개인이 개정안에 관심을 갖고 보고 있지만, 구체적인 법안 발의는 당내 논의를 거쳐야할 것 같다”며 “아직까지 낙태죄 폐지 관련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는 곳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보수적인 한국당 역시 마찬가지다. 복지위 소속 모 한국당 위원 측도 본지와의 통화에서 “낙태죄 관련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 다른 의원실에서 준비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낙태죄 관련 개정안은 당론을 정해서 발의하지 않을까 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민주당과 한국당은 ‘당내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귀결된다. 이들이 적극적인 개정안 발의를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총선 앞두고 ‘뜨거운감자’ 만지기 싫은 국회

이유는 간단하다. 임신중절은 예전부터 여성계와 종교계, 의료계 모두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 특히 종교계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즉각 ‘유감’을 표명하고 적극적인 반발에 나섰다. 의료계에서는 지난 12일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일부 의사들이 ‘낙태 수술 거부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여성계 역시 낙태죄가 여성에게만 사법적 단죄가 씌워지는 점, 여성인권신장 등 차원에서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 15일 국무회의에서 낙태죄와 관련 “다양한 의견들이 새로운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고 합리적으로 수렴되도록 각계가 함께 지혜를 모아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한 것도 이같은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각 정당에서는 헌재 판결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구체적인 대안 입법안을 내는 것에는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민주당은 헌재 결정에 “국회는 법적 공백에 따른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속히 형법 및 모자보건법 등 관련 법 개정에 나설 것을 당부한다”면서도 “그동안 낙태죄는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 등에 대한 과도한 침해라는 비판과 더불어, 태아의 생명권 보호가 우선이라는 주장이 맞붙어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는 논란을 이어왔다”고 설명했다. 한국당도 낙태죄를 두고 “오랜 논쟁이 있었고 첨예한 갈등이 상존하는 문제”라는 입장이고, 바른미래당은 “입법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여기에 국회는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실정이다. 섣불리 개정안을 냈다가 낙태죄 관련 논의가 정치적으로 비화하면 총선에서 직격탄을 맞을 수도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국회가 결국 낙태죄 관련 개정안에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21대 국회로 넘겨버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국회는 헌재 판단으로 개정이 필요한 법안을 방치한 전력이 많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은 개헌안을 발의했지만 국회가 지난 2014년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은 국민투표법을 개정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물거품이 됐다. 지난 2009년 헌법불합치 결정난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도 법 개정이 되지 않으면서 그대로 사라졌고, 수사기관의 감청을 무한정 가능하게 하는 통신비밀보호법도 2010년 헌법불합치 이후 소멸했다.

낙태죄 관련 법안은 오는 2021년 전까지 마무리하지 않으면 그대로 소멸된다. 낙태죄 관련 법안은 임신중절을 허용하는 기한을 어느 정도로 설정할 것인지, 임신중절 사유로 ‘사회·경제적 이유’를 포함할 것인지, 임신중절을 행하는 의사에게 거부권을 줄 것인지 등 광범위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개정안이 만들어지지 않을 경우 그대로 ‘낙태죄 전면폐지’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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