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김혜선 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동지’인 이희호 여사가 지난 10일 밤 11시37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향년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여사는 일제강점기때 태어나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등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온 몸으로 겪은 인물이다.

(사진=뉴시스)
(사진=뉴시스)

이 여사는 1922년 의사였던 아버지 이용기와 어머니 이순이 사이의 6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의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이 여사는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굳게 지키려 했다. 이 여사는 자서전 <동행>에서 ‘결혼하지 않는다’ ‘건강해야 한다’ ‘공부를 많이 하자’고 다짐했다고 회고했다. 이화고등여학교(이화여고 전신)와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전신)를 다녔고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했다.

이 여사는 한국전쟁으로 피난길에 오르면서도 대한여자청년단(1950년), 여성문제연구원(1952년) 등을 창설하는 데 일조하는 등 여성운동에 몰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난 시기도 이 무렵이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인천에서 해운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여사가 활동하던 대한여자청년단이 피난민을 후송할 때 도움을 줬다. 이후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김 전 대통령과 대학생 모임을 함께하며 신뢰를 쌓았다.

이 여사는 곧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램버스대에서 사회학 학사 학위, 스카릿대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8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혼인신고를 합시다’, ‘축첩자를 국회에 보내지 맙시다’는 구호를 만드는 등 여성운동에 힘썼다.

이 여사가 다짐한 것 중 유일하게 지키지 못한 것은 ‘비혼’이다. 1962년 만 40세의 나이로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한 것.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첫 번째 부인 차용애씨와 사별하고 선거에서 잇따라 낙선하는 등 어려움이 큰 시기였다. 이 여사의 주변인들은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유신독재 시절 유력한 야권 지도자였던 김 전 대통령과의 동행은 순탄치 않았다. 지난 1970년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의 대선에서 95만표 차이로 낙선한 이후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1971년에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듬해인 1972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1973년에는 유명한 ‘김대중 도쿄납치사건’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이후로도 가택연금과 투옥(1973∼1979년), 내란음모 사건과 수감(1980년), 미국 망명과 귀국 후 가택연금(1982∼1987년) 등 고행길을 걸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위기 때마다 ‘정신적 동지’로 나섰다. 출중한 영어 실력과 서구식 매너로 미국 망명 중 세계 유력 인사에 편지를 보내 김 전 대통령의 구명운동을 벌였고, 김 전 대통령이 구금당했을 때에도 한달에 900여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13대 대선, 1992년 14대 대선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시고 1997년 15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퍼스트 레이디’가 된 이 여사는 여성인권과 아동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당시 이 여사의 나이는 70대 후반이었지만, 결식아동을 위한 ‘사랑의 친구들’과 ‘여성 재단’을 만들고 활동했다. 국민의 정부 당시 행정부 최초 여성부가 만들어지고 여성장관과 여성 대사 등을 임명하는 등 여성의 정치참여가 넓어진 것도 ‘여성운동가’인 이 여사의 영향이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여사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남편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기억했다.

그러나 일명 ‘홍삼 트리오’로 세 아들(홍일·홍업·홍걸) 중 홍업, 홍걸씨가 비리 사건에 연루되고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괴로움을 겪었다. 김 전 대통령의 퇴임 직후에는 ‘대북송금 특검’으로 또다시 어려움을 만났다.

이 여사는 지난 2009년부터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으로 지내며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아 남북관계와 평화 증진, 빈곤 퇴치 등을 위해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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