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집안 출신 원술, 자아도취에 빠져 스스로 패망
-성공가도 달리던 원소, 독선과 자만으로 인재 잃어

[뉴스포스트=홍성완 기자]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힌 책 중에서 삼국지와 관련된 책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까지 많은 영웅들과 호걸들이 나타났다 사라졌고, 호족과 군벌세력들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 때의 이야기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건 등장 인물들과 사건들이 현 시대에도 많은 의미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보통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건 유비와 조조, 그리고 손권 정도다. 삼국지 이야기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나관중이 집필한 ‘삼국지연의’(이하 ‘연의’)인데, 현재 많은 사람들이 연의에 대해 ‘역사를 바탕으로 한 허구소설’이라고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연의를 통해 중국의 삼국시대가 알려졌고, 당시의 인물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계기가 됐다는 것은 어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연의로 인해 진수가 집필한 정사 ‘삼국지’(이하 ‘정사’)까지 주목을 받았다. <뉴스포스트>는 창간을 맞아 삼국지의 연의와 정사 등을 통해 중국 삼국시대 인물들을 조명하고, 경영자들과 리더들이 갖춰야 할 덕목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려한다. (편집자주)

청나라 때 그려진 원술의 상상화 (출처=위키백과)
청나라 때 그려진 원술의 상상화 (출처=위키백과)

▲ 원술, 자아도취에 빠져 스스로를 몰락시키다

후한 말 이후 혼란한 시간이 지나 위‧촉‧오 삼국으로 정립되기까지 많은 군벌들이 일어나고 또 소멸했다.

사실 삼국이 정립되기 전 유비와 조조, 손권보다 더 좋은 집안환경과 세력을 가진 인물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원술이란 인물이 있는데, 원술의 집안인 원씨 가문은 4대에 걸쳐 삼공(三公. 전한시대에는 승상(丞相), 태위(太尉), 어사대부(御師大夫), 후한시대에는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을 일컬음)을 5명이나 배출한 명문집안이다.

그는 가문의 후광에 힘입어 여러 요직을 거친 후 황제의 호위를 담당하는 호분중랑장의 직위까지 오른다.

그 당시 원씨 집안은 후한시대 모든 군벌들이 같은 편이 되기 위해 줄을 댈 정도였다. 

원술은 이런 가문의 힘을 통해 강동의 호랑이로 불리던 손견을 부하로 얻어 남양지역의 군주가 되어 군웅할거(群雄割據) 시대에 수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큰 세력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누구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던 원술은 부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며 공공의 적으로 전락했고, 자신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손견과 그의 아들 손책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으로 결국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아울러 같은 집안 출신이지만 얼자(천첩(노비)의 자녀)였던 원소가 자신보다 잘 나가는 것을 시기해 조급함을 드러내는 등 결과적으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다.

젊었을 시절 원술은 나름 명예를 중시하며 호방함과 의협심을 갖췄다는 평도 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황제가 된 이후에는 음란함과 사치가 극에 달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구체적으로 굶주리며 고달픈 삶을 사는 백성들과는 달리, 자신은 쌀밥과 고기반찬에 질려할 정도로 사치스런 생활을 누렸고, 법도를 따르지 않고 세금을 악랄하게 거두며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아울러 원술은 명문가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지나쳐 남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사람들이 원술이라는 인물 자체를 따르는 것이 아닌 그 배경만을 바라보고 따르게 만든 결과를 낳았다. 또한 스스로 이런 점들을 의식하며 능력 있는 부하(손책)를 의심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됐다.

그에 대한 이런 기록들과 평가를 통해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원술이 작은 성공에 심취해 스스로를 그르쳤다는 것이다. 작은 회사에서 한 단계 도약했을 때 많은 경영자들은 원술과 같은 오류를 범하기 쉬운데, 원술의 말로를 보고 이를 경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경영자들은 회사의 이윤이 커지면 직원들과 함께 이를 누리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결국 자아도취에 빠져 함께 고생한 직원들을 등한시하게 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떠나는 결과를 만든다. 

회사를 함께 키워왔다는 것은 능력이 검증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성취를 이루었다는 착각에 빠져 이들이 떠나도록 함으로써 더 큰 영화(榮華)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리는 것이다.

원소 초상화 (출처=위키백과)
원소 초상화 (출처=위키백과)

▲ 명문가 얼자(孼子) 원소, 유리함을 살리지 못하다

원소는 어떻게 보면 대기업의 창업주 같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원술과 같은 집안 출신으로 최고 명문가의 피를 타고 났으나, 어머니가 노비였던 얼자(천민 출신의 첩에게서 나온 자식) 출신이라는 한계도 있었다.

그럼에도 원소는 원씨 집안의 적자였던 원술보다도 더 강성한 세력을 형성하고, 가장 비옥한 땅이었던 하북의 맹주로 자리잡는다.

그는 조조가 넘기 힘든 벽이었으며, 자신의 신분적인 이점은 최대한 이용하고 약점은 최대한 보완하며 혼란한 시대 모두의 주목을 받는 인물로 거듭난다.

여기에 더해 기록을 보면 하나같이 원소의 용모가 매우 수려했으며, 말과 행동에는 위험이 있어 왕의 위엄이 느껴졌다고 전해진다.

아울러 어린 시절에는 조조와 함께 어울리며 친분을 쌓았고, 우정을 쌓은 조조에게 관도대전에서 패하기 전까지는 가장 압도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원소는 천출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호족들의 큰 지지를 받으며 중원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십상시의 난을 평정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으나 동탁에게 선수를 뺐기고 기주 발해군에서 세력을 형성했다. 이후 반동탁 연합의 맹주로 추대되면서 관동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훗날 하북 4주를 통일하고 수십만의 군사를 거느리며 명실상부한 당대 최강의 세력을 형성했으며, 황제를 옹립한 조조와 대치하게 된다.

관도대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원소의 세력은 압도적이었다. 아울러 뛰어난 책사들과 장수들을 거느리며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러나 원소에게는 원술만큼은 아니었으나, 지나친 독선과 자만심으로 스스로의 한계에 봉착했다.

원소 자신에게 위협이 됐었던 한복이 무너지고 그는 당대 최고의 책사들이었던 저수와 전풍을 얻는다.

그러나 뛰어난 인재를 얻었음에도 자신의 최측근의 말에 손을 들어주며 이들의 의견을 번번이 묵살한다.

저수와 전풍은 장기적(거시적)인 계획과 전략을 통해 내실을 다지며 천천히 세력을 키워갈 것을 제의했으나, 자군의 역량이 조조에 비해 크다는 점을 들어 당장 전쟁을 해야 한다는 자신의 측근인 곽도와 심배의 말에 군사를 일으켜 조조와 일전을 벌였다. 바로 삼국지에서 3대 전투로 불리는 관도대전의 시작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어서도 원소는 저수의 의견보다 측근의 이야기를 우선적으로 받아들인다. 결과적으로 저수가 정확한 분석을 통해 내놓은 전략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원소는 결국 참패한다.

원소는 관도대전에서 중반까지 유리한 전세를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 진영과 전쟁 상황에 대해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저수의 의견을 계속 무시했고, 이에 따라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당하고 만다.

특히, 지속되는 내부 정쟁과 장기화되는 전쟁으로 인해 의견대립이 지속되면서 책사 중 한명이었던 허유가 배신한 것은 매우 뼈아팠다.

허유는 원소군의 주요 기밀들이 누설했고, 이는 조조가 불리했던 전쟁에서 승기를 잡는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결국 전풍이 처음 장기적인 관점에서 내실을 다지며 지구전을 해야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단기 결전을 선택한 것이 뼈아픈 결과로 돌아왔다고 분석할 수 있다.

이 같은 원소의 패배는 단기 실적에 급급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일화라고 볼 수 있다. 

당장의 유리함과 이득만 바라보고 급하게 일을 진행했다가 초반의 작은 이득이 오히려 나중에 더 큰 손해로 돌아오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관도전투에 대해 일반적으로 원소의 판단미스와 분열을 원인으로 본다. 압도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부 결속이 이뤄지지 않으면 큰 실패로 이어지기 쉽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원소에게는 가장 큰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실패의 책임은 부하에게 돌리는 부분이었다. 이는 유능한 부하들의 이탈을 만들었고, 결정적인 상황에서 패배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또한 원소의 실패는 1인 독재 체제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원소가 죽고 나서 5년 만에 원소세력은 완전히 소멸하는데, 이는 관도에서의 패전 이후 흔들리던 원소가 후사를 제대로 정하지 않고 사망한 것을 가장 큰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다른 군주들 역시 후사문제에 시달리더라도 신하들이 이탈이 크지 않았다는 점들을 생각하면 원소 자체에 대한 인격과 신뢰도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원술과 마찬가지로 좋은 집안과 세력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제외하면 원소 역시 신하들 대부분의 진실된 신임을 받지 못했다고 평가내릴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좋은 집안에서 좋은 배경을 가지고 세력을 이끌던 원술과 원소 두 원씨 군주는 공통적으로 배경만 믿고 독자적인 경영과 내실을 다지지 않는 이유로 몰락했다.

여기에 좋은 집안을 타고 났다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부하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면서 오만한 모습을 보였고, 이로 인해 신뢰를 잃어갔다는 점은 지금 현재의 리더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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