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 삼국지 리더론③] 경영2세대들의 표본 ‘손권’
[창간기획 삼국지 리더론③] 경영2세대들의 표본 ‘손권’
  • 홍성완 기자
  • 승인 2019.06.21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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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에 대한 욕심과 집착은 가히 ‘끝판왕’
-군사적 재능은 공격과 방어 면에서 크게 엇갈려
-적벽대전 승리로 강동의 지배권 강화
-검소한 생활만큼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어

[뉴스포스트=홍성완 기자]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힌 책 중에서 삼국지와 관련된 책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까지 많은 영웅들과 호걸들이 나타났다 사라졌고, 호족과 군벌세력들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 때의 이야기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건 등장 인물들과 사건들이 현 시대에도 많은 의미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보통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건 유비와 조조, 그리고 손권 정도다. 삼국지 이야기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나관중이 집필한 ‘삼국지연의’(이하 ‘연의’)인데, 현재 많은 사람들이 연의에 대해 ‘역사를 바탕으로 한 허구소설’이라고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연의를 통해 중국의 삼국시대가 알려졌고, 당시의 인물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계기가 됐다는 것은 어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연의로 인해 진수가 집필한 정사 ‘삼국지’(이하 ‘정사’)까지 주목을 받았다. <뉴스포스트>는 창간을 맞아 삼국지의 연의와 정사 등을 통해 중국 삼국시대 인물들을 조명하고, 경영자들과 리더들이 갖춰야 할 덕목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려한다. (편집자주)

염립본의 제왕역대도권 중 손권 부분 (출처=위키백과)
염립본의 제왕역대도권 중 손권 부분 (출처=위키백과)

삼국시대 한 축을 차지한 인물

천하 삼분지계(三分支計)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오나라의 손권은 수성의 달인으로 불린다. 손권은 사실 군주가 될 상황이 아니었고, 그가 초창기 강동지역에서 패권을 잡으려 할 때 호족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버지부터 형으로 이어진 강동의 가업들을 잘 지키며 강동 지역을 평정했고, 불모지였던 땅들을 개간해 생산력을 늘려 국력을 신장시키기도 했다. 아울러 정세의 흐름을 잘 파악해 외교적으로도 탁월한 판단력을 보이면서 강동에 대한 확고한 지배력을 가지게 된다.

비록 말년에는 노망이 들었는지 이해하기 힘든 기행과 여러 비난받을 일들을 행했지만…. 그가 많은 업적을 이뤄낼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특히, 손권은 경영 2세대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는 행보들을 보였기에 그의 일생을 돌아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많다. 

▲ 경영2세대들의 표본이자 수성의 달인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은 이전에 언급한대로 강동의 호랑이라고 불린 인물이다. 그는 원술의 밑에서 엄청난 용력을 발휘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

원술은 원소와 함께 자신을 견제하던 유표를 응징하기 위해 손견을 보내는데, 유표는 이에 황조를 보내 맞서게 한다.

손견은 황조를 상대로 잇따라 승리를 거두며 유리한 전황을 이끌고 간다. 유표는 위기를 맞아 황조를 다시 내보내 포위망을 뚫고 나가 군사를 모은 뒤 합류하도록 하려는 전략을 취하는데, 손견은 이 또한 간파해 황조를 추격한다. 

그러나 손견은 도망가는 황조를 쫓아가다 매복해있던 황조군에게 화살을 맞고 죽게 된다. 강동의 호랑이로 불리던 손견의 허무한 최후였다. 이 때 그의 아들인 손권의 나이는 겨우 10살이었다.

손견의 죽음 이후 그의 장남이었던 손책이 유지를 이어받았다. 손책은 아버지를 닮아 맹장의 기개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사교성도 좋아 후에 손권이 강동의 패자로 올라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주유와 친분을 맺는다.

그는 아버지에 이어 원술의 밑에서 많은 활약을 펼친다. 그러나 원술의 자신을 의심하고 스스로 참칭을 하는 모습을 보이자 독립을 하게 된다.

강동지역을 평정해 가던 손책은 허무하게도 허공의 식객에 의해 부상을 입고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손책은 죽기 전 자신의 책사인 장소를 불러 후사를 손권에게 맡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장소는 둘째 손권보다 셋째인 손익에게 후사를 맡기자고 제안하나, 손책은 다시 한 번 손권에게 후사를 맡기겠다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 때 손권의 나이 19살이었다.

장소는 손책의 유언대로 손권을 새로운 주인으로 세우면서 어수선한 상황들을 수습한다. 그리고 이 때 주유가 군사를 이끌고 손권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장소와 함께 그를 보좌한다.

특히 주유는 노숙을 천거해 손권이 또 다른 큰 인재를 얻도록 도와준다. 이렇게 손권은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일궈져 온 가업들을 좋은 참모들의 도움으로 물려받아 강동 지역의 주인으로 자리 잡는다.

▲ 인재에 대한 끝없는 욕심, 군주의 기본적인 자질

손권의 가장 큰 장점을 꼽으라면 인재에 대한 끝없는 욕심과 그들의 생활을 잘 살피기 위해 노력한 점이다.

그는 일개 군사였던 여몽이 군대의 진용을 잘 정비하자 과감히 등용했고, 여러 인재들에게 덕을 베풀며 책사들도 끌어 모은다. 이 뿐 아니라 농부 출신 감택, 목동 출신 오찬 등을 비롯해 능력이 있다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등용했다. 

제갈량의 형으로 유명한 제갈근도 손권의 집권 초창기부터 평생을 함께하며 내정과 외교적인 부분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같은 손권의 행보에 그의 주변에는 인재들이 끊이질 않게 되고, 이들의 힘을 바탕으로 그 세력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나 손권이 처음부터 순탄한 상황만은 아니었다.

처음 손책의 뒤를 이었을 때 강동의 호족들은 그의 지시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여기저기서 반란이 끊이질 않았는데, 손권은 이 당시 모여드는 인재들을 적소에 투입하며 반란을 진압하는 한편, 황조 등 주변 군벌들을 하나하나 복속시켜 나갔다.

그러나 호족들의 반목은 지속됐고 불안한 상태가 지속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를 타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다.

조조는 유표의 아들 유종의 항복을 받아낸 뒤 곧바로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100만 대군을 몰아 강동을 정벌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공공연하게 다음 점령 대상이 강동이라는 것을 공식화한 것이다.

조조의 편지가 도착하자 강동 대부분의 호족들은 항복할 것을 주장했다. 그 때까지 호족들의 완전한 신임을 받지 못했던 손권은 이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노숙과 주유가 조조와 맞서길 강하게 주장했고, 제갈량의 화려한 언변에 설득되면서 유비와 연합하기로 결정한다. 

손권은 조조와의 결전을 공표한 뒤 자신이 가진 보검으로 책상을 두 동강 내면서 “항복을 입에 담는 자는 이 같이 되리라”고 일갈한다.

이는 그가 한 번 결심이 서면 강한 추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장면 중 하나다.

▲ 전환점이 된 적벽대전의 승리

적벽대전에서의 백미는 황개의 사항계(거짓 항복을 적을 속이는 계책)다. 이 사항계가 황개 스스로 직접 낸 계책이라는 말이 있으나, 추후에도 손권이 자주 사항계를 쓰기 때문에 그가 낸 계책이라는 말도 있다.

여하튼 적벽대전에서 손권은 황개의 활약에 힘입어 큰 승리를 거둔다. 조조는 적벽에서의 패전으로 형주에서의 지배권을 잃고 패퇴했으며, 손권은 유비와 전략적 요충지이자 풍족한 물자를 자랑하는 형주를 나눠 갖게 된다.

그리고 손권에겐 무엇보다 가장 큰 소득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강동 호족들에 대한 지배권을 온전히 확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손권이 강동의 패자로 올라서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주유가 적벽대전 직후 사망한다. 비교적 짧은 생애에도 굵직한 업적을 이룬 주유는 삼국시대 최고의 무장이자 참모로 평가받는다. 손권은 20년 후 황제에 직위하면서 “내가 이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주유의 공이다”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 할 정도였다.

이런 주유가 죽자 손권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주유의 빈자리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주유의 뒤를 이어 병권을 지휘하게 된 노숙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숙은 뛰어난 외교술과 내정능력으로 강동의 국력을 나날이 발전시켜갔다. 노숙의 사후에는 여몽이 후임으로 임명되는데, 모든 참모들이 손권을 잘 보필해 나라를 꾸준하게 발전시켰던 것을 보면 확실히 손권의 주변에 인재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분명 손권이라는 인물이 인재의 중요성을 잘 알고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몽은 형주쟁탈전에서의 승리와 함께 군신으로 불리며 중원을 떨게 했던 관우를 사로잡는 등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다. 

일부에서는 손권이 그저 운 좋게 사람을 잘 만나 천하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고 폄하하나, 운이라는 것도 노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는다.

특히 이릉대전에서 승승장구하던 유비를 육손이 때맞춰 등장해 처참하게 박살내는 것을 보면 손권의 인재 발굴 능력은 가히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을 경영자들은 눈여겨봐야 한다. 손권은 인재에 대한 집착이 매우 컸고, 그저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한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손권은 여몽이 병에 걸렸을 때 그의 건강 상태에 따라 그날 기분이 달라졌다고 한다. 여몽의 건강이 나빠지면 침울해지고 건강이 좋아지면 매우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여몽의 건강을 너무 염려한 나머지 자주 그의 집을 방문했는데, 여몽이 이를 부담스러워 할까봐 몰래 집에 구멍을 내서 여몽의 병세를 확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른 장수들이 아플 때도 비슷한 행동들을 보이면서 이러한 모습들은 일관성을 나타냈다.

또한 이릉대전 당시 손권의 신하들이 “제갈근이 동생(제갈량)과 내통하는 것 같다”고 의심하자, 손권은 “자유(제갈근의 자)는 절대 나를 배신할리 없다. 내가 그를 믿는 것은 당연하다”며 신하들의 이야기를 일축한다.

그의 믿음대로 제갈근은 제갈량과의 안부를 물으며 형제의 교우를 두텁게 유지하면서도 공적으로는 절대 말을 섞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오주전을 통해 “손권은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하고 지혜로운 자를 존중한다”며 좋게 평가했고, 아울러 육손을 알아본 손권의 안목에 대해서도 칭찬했다.

진수의 평에 나온 것처럼 그는 지혜로운 자를 존중하면서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단점들을 고치기도 했다.

손씨 가문 사람답게 손권은 혈기가 왕성한 탓인지 전장에서 직접 나서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큰 위기를 맞아 죽을 위기에 놓인 적이 있는데, 이 때 책사 장굉은 ‘편장이 할 일을 주장이 나서는 것은 필부나 하는 짓’이라고 꾸짖는다. 

아무리 군주가 잘못했다고 하나, 이 같은 일이 하극상으로 보일 법도 한데 손권은 그의 말을 듣고 뉘우치며 가벼이 나서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손권은 신하들의 말을 귀담아 들으면서 자신의 단점들을 고치려고 노력했고,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작은 이야기라도 귀 기울이려 노력하는 모습에 오히려 신하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군주가 됐다. 

말년에는 노망이 들었는지 정 반대의 행보를 보이지만….

▲ 수성의 제왕. 하지만 공성은

손권의 군사적 재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대부분 손권이 공격적인 면에서는 별 재능이 없으나, 수성에서만큼은 달인이라고 평가한다.

손권은 일생동안 수성전에서 큰 업적을 이룬다.

군사적으로 대단한 재능을 가졌던 조조가 일생 동안 손권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면서 한 치의 땅도 더 얻어내지 못했던 것을 보면 그의 방어 전략만큼은 인정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조는 유수구 전투에서 손권의 군세를 보고는 “자식을 가지려면 손권 정도는 되어야지”라며 “유표의 아들들은 개나 돼지 같다”고 말한 일화가 있다. 그 대단한 조조도 손권을 인정한 셈이다.

실제로 손권은 적벽을 시작으로 조조에게 가장 큰 근심거리로 자리 잡는다. 다만, 수도인 건업과 가까운 합비를 지속적으로 공격하면서도 결국 함락시키지 못한 것을 보면 확실히 공격에서의 재능은 방어 능력에 비해 크게 부족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합비 공격은 건업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과정이 어찌되었든 손권은 수없이 합비를 공격했지만 결과는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결과보다 중요한 사실은 손권이 자신의 능력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천하를 통일하려는 의지를 크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토를 늘리기 보다는 내정을 안정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더 중점을 뒀으며, 자연스럽게 국력이 늘어나다 보니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역량까지 마련됐다.

적벽에서의 승리 후 손권은 유비에게 그 좋은 형주 땅의 절반 이상을 내어준다.(빌려줬다는 게 대부분의 기록이나, 결과적으로 실질 지배권은 유비에게 있었다) 

이는 동맹을 맺은 유비가 적벽에서 어느 정도 공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나, 당시 형주를 지킬 역량이 손권에게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후 내실을 다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형주에 대한 지배권에 욕심을 부리게 됐고, 형주쟁탈전에서 관우의 뒤통수를 친 후 사로잡아 처형하면서 형주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다. 

관우를 처형함으로써 이릉대전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으므로 이를 두고 손권이 그릇된 판단을 내린 것이라는 평가도 많다. 그러나 손권은 유비와의 신의를 생각해 놓아주려고 했으나, 신하들이 후에 큰 근심이 될 것이라며 강력하게 처형을 주장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이것은 신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그의 성향을 봤을 때 당연한 처사인 것이며, 자신의 생각과 달라도 국가대사를 논할 때 다른 이의 생각을 받아들일 줄 아는 그의 현명함이 묻어나는 모습이기도 하다.

▲ 검소함이 배어 있는 군주, 신하들의 귀감이 되다

손권의 가장 큰 장점으로 평가받는 것 중 하나는 검소함이다. 손권의 검소함은 전 세계 역사를 찾아봐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드물다. 

그는 궁궐에 조각이나 장식을 전혀 들이지 않았고, 궁녀가 100명을 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아울러 백성들 중에 아내가 없는 자에게는 자신의 첩을 줄 정도였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검소함이 그저 아끼고 안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베풀며 검소함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는 늘 소박한 의복을 입으면서 옷이 없는 백성들에게는 비단을 주는 등 그들의 삶이 풍족해질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했다. 이 같은 손권의 행동들로 인해 신하들도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종합해보면 손권은 자신의 단점들을 스스로 잘 알았고, 능력 있는 자들을 뽑아 자신의 단점들을 보완하면서 국력을 신장시켰다.

이러한 행적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신하들과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됐고 ‘오’라는 나라를 세우게 됐다. 

여기서 비교해볼 것이 원술이나 원소, 유표 등과 다른 점은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주변사람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황제로 추대됐다는 점이다. 이후 다루겠지만 조조와 유비도 비슷한 행보를 먼저 보인다.

손권이 비록 말년에 젊은 시절과는 정반대로 이해하기 힘든 판단과 잔악함을 보여주긴 했으나, 한 나라의 창업주로는 손색이 없었다.

특히, 그가 아버지와 형의 유지를 이어받아 이를 더 발전시키고 크게 키워간 모습을 보면 경영2세대들이 그의 젊은 시절을 많이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가업을 이어가거나 이어갈 사람들이라면 내실을 탄탄하게 만들어 갈 수 있는 방법들이 보일 것이다.

다만, 그의 말년만큼은 배우지 말자.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정도니…. 많은 경영자들과 리더들은 그저 그의 젊은 시절과 중년 시절만 참고하길 바란다.

홍성완 기자 seongwan626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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