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 '조조'
-잔악함 속에서도 빛났던 비범함
-천재성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그의 방식
-모두가 조조를 꿈꾸지만 '언감생심'

[뉴스포스트=홍성완 기자]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힌 책 중에서 삼국지와 관련된 책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까지 많은 영웅들과 호걸들이 나타났다 사라졌고, 호족과 군벌세력들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 때의 이야기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건 등장 인물들과 사건들이 현 시대에도 많은 의미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보통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건 유비와 조조, 그리고 손권 정도다. 삼국지 이야기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나관중이 집필한 ‘삼국지연의’(이하 ‘연의’)인데, 현재 많은 사람들이 연의에 대해 ‘역사를 바탕으로 한 허구소설’이라고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연의를 통해 중국의 삼국시대가 알려졌고, 당시의 인물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계기가 됐다는 것은 어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연의로 인해 진수가 집필한 정사 ‘삼국지’(이하 ‘정사’)까지 주목을 받았다. <뉴스포스트>는 창간을 맞아 삼국지의 연의와 정사 등을 통해 중국 삼국시대 인물들을 조명하고, 경영자들과 리더들이 갖춰야 할 덕목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려한다. (편집자주)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 조조 상상도 (출처=위키백과)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 조조 상상도 (출처=위키백과)

▲ 난세의 간웅이라 불린 ‘조조’에 대한 재평가

우리 주변에 많은 리더들을 보면 스스로 조조가 되려는 사람들이 많다. 과연 조조를 꿈꾸는 게 옳은 것일까?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촉한정통론’에 입각해 유비와 대척점에 있는 조조를 ‘난세의 간웅’이라고 하여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가 집필한 ‘삼국지’가 사실 위주의 정사(正史)라는 게 많이 알려지면서 조조에 대한 재평가가 최근 들어 다시 이뤄지고 있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연의에서는 유비의 인덕(仁德)만을 부각시키다 보니 그의 능력이 가려진 측면이 크고,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조조의 능력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유비보다 조조를 더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예전부터 있어왔다. 여기에 연의에서조차도 조조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도 전무후무한 천재성과 함께 양면성을 지닌 입체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천재성을 지녔기에 가능했던 그의 방식들을 쫓으려는 경영자들과 리더들이 너무나 많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다.

조조를 비판하거나 그와 같은 사람이길 바라는 CEO들을 비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어째서 우리가 조조라는 인물이 왜 될 수 없는지… 아니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이야기 해보려 한다.

▲ 1천년에 한 번 나올 천재임에도 조조가 비판받은 이유

조조라는 인물을 살펴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100년에 한 번, 아니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후한 말 환관이었던 조등의 양아들 조숭의 아들이다. 조숭은 원래 하후씨 집안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조는 황건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고, 십상시의 난에 이어 동탁이 실권을 잡은 시기의 혼란함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힘을 길러온 인물이다.

그 절정에 이른 것이 절대적인 열세였던 관도대전에서 한나라 최고 명문가 집안의 후손인 원소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면서다.

사실 이전까지 조조는 원소에 비해 그 영향력이 미비했다.

조조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연주(현재의 산둥 성 서남부와 허난 성 동부) 자사였던 유대가 전사하자, 그 세력을 온전히 흡수해 황건적을 물리치고 연주목에 등극한다. 

그가 연주목에 임명되도록 한 인물이 바로 원소였다. 이 때까지 조조는 원소 세력 내에 속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연주는 100만에 이르는 인구를 가진 곳으로, 조조는 여기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세력을 구축하며 독자적인 군벌로 성장한다.

그러나 조조가 서주 원정을 나간 사이, 자신의 책사 중 한명이었던 진궁이 장막이라는 군벌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연주를 여포에게 바치게 된다. 이로 인해 조조는 연주의 지배권을 대부분 상실하게 된다. 

여포는 양아버지인 동탁을 죽인 인물로, 무력에서만큼은 최강자로 불린다. 

비록 그의 능력을 탐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자마다 배신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줬기에 인격 자체에 대해서는 좋은 평을 못 받았으나, 초월적인 그의 무예와 이를 바탕으로 군을 통솔하는 능력만큼은 높게 평가받는 인물이다.

잠시 여기서 이 진궁의 반란사건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조조의 극단적인 성격을 나타냄과 동시에 능력이나 업적에 비해 그가 저평가 받는 가장 큰 원인이 되는 ‘서주대학살’ 사건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진궁이란 인물은 당시 조조가 가장 신임하던 인물이었고, 진궁 또한 조조가 연주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신하였다.

장막은 원소, 조조와 함께 반동탁 연맹의 의용군을 결성한 인물로, 조조가 가장 힘들 때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인물이다. 따라서 조조가 가장 의지하기도 했다.

그런 진궁과 장막이 조조를 배신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많은 평론가들은 ‘서주대학살’을 막기 위함이라고 보고 있다.

서주대학살은 조조의 잔악한 면모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그로 인해 후대에서도 그가 이뤄낸 업적에 비해 존경받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사건의 발단은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가족들과 함께 서주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아들 조조가 있는 연주로 돌아오는 길에 도겸의 병사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원술을 격파하고 연주로 돌아온 조조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서주 침공을 강행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도겸이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식량이 고갈됐고, 이로 인해 조조는 서주자사인 도겸을 잡는데 실패한다.

조조는 군사를 철수시키는 길에 이번 전쟁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포함해 서주의 백성들을 수탈하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죽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때 죽은 서주의 백성(민간인)만 무려 10만이 넘었으며, 조조의 군사들은 죽인 백성들의 닭과 개를 잡아먹는 것도 모자라 집들을 허물어 폐허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서주에 흐르던 사수라는 강이 시체에 막혀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는 기록이 여기저기 나오는 것을 보면, 이 당시 참사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조조는 도겸을 죽이기 위해 재차 서주를 침공한다. 2차 침공에서도 조조는 지나는 곳 마다 마을을 약탈해 풀 한포기 남기지 않고 모두 초토화 시켰다. 이 때 도겸을 돕던 유비는 처음으로 조조와 맞서게 되는데, 조조의 맹렬한 공격에 패퇴하고 만다.

한편, 이 같은 조조의 악행을 지켜보던 진궁과 장막은 그에게 실망감을 안게 되고, 결국 믿을만한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여포에게 연주를 넘기며 배신한다. 

조조는 이들이 배신했다는 소식에 서주에서의 복수전과 대학살을 멈추고 연주로 돌아온다. 이런 행적들을 보면 이들의 배신이 조조의 악행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부분이다.

연주로 돌아온 조조는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원소의 지원으로 승기를 잡아 연주를 다시 평정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서주대학살로 인해 조조에 대한 민심은 완전히 돌아섰고, 그의 업적에 비해 저평가 받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조조는 연주를 평정한 뒤 후한의 마지막 황제이자 14대 황제인 헌제를 옹립하는데 성공하며 황실의 실권을 잡게 된다. 아무리 망하기 직전의 한나라라 할지라도 조조 입장에서는 헌제를 앞세워 명분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됐고, 이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급속도로 키울 수 있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 때부터 조조는 원술과 여포, 유표 등을 차례대로 격파하며 세력을 키워나간다.

특히 이 시기부터 동맹관계에 있던 조조와 원소는 조금씩 대립하기 시작했는데, 조조가 급성장하자 원소의 견제는 점점 극에 달한다.

이런 갈등이 표출된 것이 바로 관도대전이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조조는 결국 원소를 대파하며 원소와 대등한 관계에 올라섰다. 이후 원소가 죽으면서 그의 아들들인 원담과 원상이 후계자 다툼을 벌이며 내부분열이 일어났고, 조조는 이 기회를 틈타 과감한 결단을 통해 이들을 격파하고 원소 세력을 온전히 흡수하게 된다.

이로써 조조는 중국대륙의 60% 이상을 차지하며 명실공히 최고의 권력자로 우뚝 서게 된다. 비록 참칭을 하지 않았지만 조조는 헌제보다도 더 높은 권력을 휘둘렀으며, 스스로를 위왕으로 봉한다.

▲ 악행에도 가려지지 않는 타고난 재능과 비범함

조조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연의의 저자 나관중이 아무리 그에 대한 능력을 깎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재능과 비범함은 가려지지 않았다.

조조는 군사적으로 전략과 전술에 능했고, 통솔하는 능력도 매우 탁월했다. 큰 전투에서 이따금 패배하는 모습이 보이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승리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줬으며, 손자병법에 주석을 달아 현재의 손자병법으로 완성시키는 등 군사학적인 부분에서도 뛰어난 모습을 나타냈다.

이런 재능을 바탕으로 그는 여러 전투에 직접 참여하며 많은 성과를 냈고, 장수들을 강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카리스마의 원동력이 됐다. 조조는 여러 불리한 상황에서도 결국에는 승리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고 이를 통해 삼국시대 최고의 세력과 권력을 지닌 인물로 서게 된다.

조조는 또 소박한 민요였던 악부(樂府)를 공식 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시키며 당시의 최고 시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등 문학적인 재능에서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그는 ‘건안문학’을 발전시킨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데, 당시 문학이 역사서나 기록 중심이었던 반면, ‘건안문학’은 창작문화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나라를 경영하는 모습에 있어서도 부족함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몰락해 가는 한나라 말기 내정을 빈틈없이 관리해 국력을 다지고 안정을 찾도록 한 인물이다.

이처럼 다재다능함을 갖춘 조조는 철저하게 계산된 움직임을 보인다. 이는 장점이자 단점으로 평가받는 것 중 하나인데, 공적으로는 가장 최적화된 방법으로 보일지 몰라도 인간미는 떨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그는 장수들에게는 후한 편이었으나, 책사들에게는 매우 가혹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책사들이 아무리 비상한 능력을 가졌어도 나중에 원흉이 될 만한 모습을 보이거나 권력에 욕심을 부리는 인물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제거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인물로 양수라는 인물이 있다. 양수는 매우 비상한 머리를 가져 여러 부분에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는 일명 ‘계륵’ 사건으로 처단 당하게 된다.

‘계륵(鷄肋)’은 ‘닭의 갈비뼈’라는 뜻으로 ‘큰 쓸모나 이익은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사물 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닭의 갈비뼈에는 살이 거의 붙어있지 않지만, 나름 뼈 사이사이 붙어 있는 살들이 있어 버리기에도 아까운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이 ‘계륵’의 유례가 된 사건을 잠시 설명하자면, 조조는 한중전투에서 가장 유능한 신하였던 하후연을 유비의 장수 황충에게 잃고 전쟁이 장기화 되자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런 시기에 어느 날 닭고기가 식사로 나왔는데, 이를 먹던 조조가 닭의 갈비뼈를 보고 한중이 꼭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에 한중을 포기하고 철수해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된다.

이 때 병사가 조조에게 오늘 암구호를 무엇으로 할지 묻자, 무심코 “‘계륵’으로 하라”고 명했다.

이 날 양수는 병사로부터 암구호를 듣고는 갑자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짐을 싸는 연유에 대해 묻자, 그는 조조의 이런 생각들을 간파해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하면서 “내일 주군께서 철수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군사들도 양수를 따라 짐을 미리 챙겨 놨다. 다음날 조조는 실제로 군사들에게 철수할 준비를 하라고 영을 전달했는데, 이미 군사들이 철수 준비를 마쳤다는 보고를 듣게 된다.

조조가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묻자 부하들은 양수가 했던 말들을 조조에게 전했다. 그러자 조조는 이 같은 보고를 듣고 양수에게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분하여 양수를 처단했다. 그리고 오기가 발동했는지 바로 군대를 진군시킨다. 그러나 유비에게 다시 패하면서 결국 군사적 요충지였던 한중을 내주고 만다.

정사에서는 조조가 후계자 선정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차에 양수가 조식을 뒤에서 몰래 돕고, 여기에 원술의 생질이기도 하다 보니 뒷날 걱정거리로 여겨 트집을 잡아 처형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조조가 아무리 쓸모 있는 책사일지라도 후에 원흉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후에도 일관되게 나타났다.

양수의 사례는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의 능력만 믿고 오만하게 자신이 관여하지 않아도 될 곳까지 관여한다면 어떤 경영자들도 좋아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 재능이 오히려 본인에게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양수와는 반대로 유비의 의형제이자 군신(軍神)으로 까지 추앙되는 관우와 관련된 일화는 조조의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유비의 충신이자 의형제였던 관우는 당시 ‘만인지적(만 명의 사람을 대적할 만한 지략과 용맹을 갖춘 사람)’이라 불릴 정도로 그 능력이 검증된 인물이다. 사람들은 삼국지연의를 읽지 않아도 관우만큼은 다 알고 있을 정도니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서주에서 유비는 조조에게 패하면서 원소진영으로 도망가게 되고, 관우는 이 때 유비와 함께 퇴각하지 못하고 조조군에 포위당한다. 

관우의 인품과 능력을 탐내왔던 조조는 그에게 항복을 권하는데, 이에 관우는 ‘조조가 아닌 황제에게 항복하는 것’, ‘유비가족(부인들)의 안전보장’, ‘유비의 생사와 거처가 확인되면 즉시 떠난다’는 3가지 조건을 내세워 이를 받아주면 항복하겠다고 답한다. 

조조는 이 3가지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약조하고, 관우는 조조에게 항복하게 된다. 그러나 관우는 시간이 흘러 원소 진영에 유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 형수들과 함께 원소에게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조조는 관우를 떠나보내는 게 싫어 일부러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관우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조조에게 받은 재물들과 편지를 써서 자신의 거처에 두고 유비에게 떠난다.

그러나 조조로부터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던 그의 부하들은 관문마다 관우를 막아섰다. 이에 관우는 이들을 목 베거나 제압하며 다섯 개의 관문을 통과한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조조는 말을 달려 그와 만나게 된다. 조조는 자신의 부하들을 죽었음에도 관우에게 이를 문제 삼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 고생한 것에 대해 미안함을 표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배웅한다.

이 이야기가 바로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이다.

후에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후 관우에게 목숨을 구제받으면서 충분한 보상(이 내용은 연의의 창작으로 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을 받게 된다.

조조의 이런 행보들을 보면 능력 있고 인격적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는 사람에게는 과할 정도로 호의를 베풀지만, 능력이 없거나 인격적인 수준이 낮으며 후환이 될 염려가 있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제거하는 철저한 ‘능력주의자’로 추측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진궁의 경우에도 배신한 그를 다시 사로잡은 뒤 처형한 후에는 그의 가족과 후손들을 잘 대해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면에서 공적으로는 철저한 ‘능력중심'과 ‘이성적’이고 '냉철한 판단'을 내리면서도, 그 사람의 능력에 대한 예후만큼은 확실하게 인정해줬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 천재의 방식은 천재에게만 통용된다

당대와 후대 사람들은 조조의 정책들에 대해 대부분 좋은 평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생전에는 이 제도와 정책들이 빛을 발했으나, 그가 죽자 모든 폐단의 원흉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즉 그의 정책들은 천재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모든 것들을 통솔할 수 있을 때에 가능한 것들로서 대부분 허점이 어느 정도 존재한 제도로 보는 게 대부분이다. 제도의 정비와 활용적인 측면에서 개인적인 역량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본받을 점이 있다면 냉철한 판단력과 능력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예우를 해줬다는 점이다. 즉 손권과 마찬가지로 인재에 대한 중요성을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와 관련해 앞서 관우에 대한 일화만 소개했으나 비슷한 일들은 여러 면에서 나타났다.

그는 또 천재적인 능력에 비해 인격적으로 자신의 단점이 크다는 점을 잘 알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이를 메꿔줄 수 있는 방안과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영입하려 하면서 방안들을 실행했다.

서주대학살 이후 자신에게 대적하던 유비를 받아들여 그에게 후한 대접을 했던 것도 흩어진 민심을 다시 모으기 위한 방책으로 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또한 조조 주변 사람들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헌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라고 권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황실을 지키는 모습도 보여준다. 

손권은 조조를 도탄에 빠트리기 위함이었는지 그에게 참칭을 하라고 부추겼는데, 조조는 자신이 한 황실의 신하라는 점을 오히려 강조함으로써 명분을 쥐게 됐고, 이를 통해 내부적으로 자신의 권한을 절대적으로 강화시키는데 이용했다. 이는 자신의 아들인 조비가 위나라를 세우는데 기틀이 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만약 조조가 스스로 참칭을 했다면 반발하는 세력이 더 거세게 일어나 원소나 원술을 포함해 참칭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유표 등과 같은 길을 갔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점들을 볼 때 조조가 얼마나 현실을 잘 파악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조조의 처세술 덕분에 조비는 헌제로부터 선위(황제가 자신의 지위를 물려주는 것)를 받아 황제가 되고, 자신의 아버지인 조조를 초대 황제로 추존했다.

▲ 경영자들이 본받기엔 어려운 인물 ‘조조’

그의 정치 능력에 대해 진수는 현실주의적이고 유연하며, 과감한 결단력이 있다고 평했다.

그는 자신의 단점이 무엇인지 알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방법들이 있다면 과감하게 추진했으며, 좋은 장수들과 책사들을 거느리며 그들이 해야 할 일과 역량에 대해 누구보다 잘 파악했다.

조조는 또 통치체제를 안정시키는 한편, 호조제와 둔전제, 원호법 등을 시행하여 국력의 신장을 이뤄냈다. 다만, 이 제도들은 조조 개인의 능력이 전제됐을 때에는 효과가 극대화됐지만, 그의 사후에는 오히려 여러 폐단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즉, 그의 방식들은 천재성을 가진 그였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보통 경영자가 조조와 같은 운영방식으로 경영을 하게 되면, 그 경영자 한 사람의 역량이 기업의 한계성이 되어 어느 순간 성장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조조와 같은 인물이라면 충분히 성장할 수 있으나, 그와 같은 인물들은 매우 한정적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그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점들 또한 한정돼 있는데, 우선 자신을 알고 내부적인 직원들의 성향을 객관적으로 파악해 이에 맞는 방법을 찾는 능력이 있었다는 점은 참고할 만 하다.

조조의 주변에는 대표적으로 순욱과 순유, 가후 같은 유능한 책사들과 문무를 함께 갖춘 호랑이 같은 장수들인 하후연, 하후돈, 장합, 장료, 서황 같은 장수들이 존재했다. 이들을 통해 조조가 사람 보는 능력과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용병술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진수의 평에 나오는 것처럼 조조는 환경과 시대적인 변화에 민첩하게 반응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갖추고 있었다.

조조는 시대적 변화와 변해가는 상황들을 냉정하게 파악하며 적재적소에 매우 변화무쌍한 전략들을 사용하는데, 이를 통해 손해는 최소화하고 이득은 극대화 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많은 경영자들과 리더들은 시대적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 얽매여 도태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 생각의 유연함은 시대를 불문하고 매우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조조는 이런 부분을 제대로 갖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워낙 천재적이고 다재다능함을 넘어 하늘에서 내린 인물처럼 모든 걸 통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재능 있는 사람들을 알아보고 그들의 말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줄 알았다. 이는 그들이 말하는 의도를 잘 파악하고 그걸 통해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판단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 조조가 되려 하지 말라

조조라는 인물은 그 자체로 범접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닌 인물로 창업주로서의 면모는 흠잡을 수 없으나, 일반적인 사람들이 모델로 삼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조조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갔다. 이게 가능할 수 있었던 점은 바로 그가 1천 년에 한 번 나오기도 힘든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영자들과 리더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하며 조조와 같이 자신이 중심이 되어 회사를 끌어가길 바란다. 하지만 그건 그와 같은 재능이 전제되었을 때 가능한 방식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을 부하직원들에게 강요하고 주입시킬 경우 결과적으로 좋은 인재들보다 자신의 방식에 수동적으로 따라오는 직원들만 남게 되는 경우가 많다. 리더들은 이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우리나라 대부분의 경영자들과 리더들은 다른 집단에서의 성공을 듣고 이를 그대로 따라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자신의 역량이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우리는 조조가 될 수도 없을 뿐더러 꿈꿔서도 아니 된다. 자신 스스로 냉철한 판단력과 능력이 조조와 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몰라도 말이다.

당신은 과연 조조의 방식을 꿈꾸고 추구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 모두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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