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리더론⑤] 평범함으로 천재를 넘어선 ‘유비’(上)
[삼국지 리더론⑤] 평범함으로 천재를 넘어선 ‘유비’(上)
  • 홍성완 기자
  • 승인 2019.07.08 0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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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방랑에도 떠나가지 않는 사람들
-수직적 관계 아닌 수평적 관계 추구가 가져온 ‘권위’
-떠나지 않는 민중과 재야인사들의 지지
-눈앞의 이득보다 명분… 패배에도 빛나는 그의 가치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힌 책 중에서 삼국지와 관련된 책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까지 많은 영웅들과 호걸들이 나타났다 사라졌고, 호족과 군벌세력들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 때의 이야기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건 등장인물들과 사건들이 현 시대에도 많은 의미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건 유비와 조조, 그리고 손권 정도다. 삼국지 이야기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나관중이 집필한 ‘삼국지연의’(이하 ‘연의’)인데, 현재 많은 사람들이 연의에 대해 ‘역사를 바탕으로 한 허구소설’이라고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연의를 통해 중국의 삼국시대가 알려졌고, 당시의 인물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계기가 됐다는 것은 어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연의로 인해 진수가 집필한 정사 ‘삼국지’(이하 ‘정사’)까지 주목을 받았다. <뉴스포스트>는 창간을 맞아 삼국지의 연의와 정사 등을 통해 중국 삼국시대 인물들을 조명하고, 경영자들과 리더들이 갖춰야 할 덕목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려한다. (편집자주)

▲ ‘조조’의 유일한 라이벌 ‘유비’

[뉴스포스트=홍성완 기자] 조조는 말 그대로 전무후무한 천재였는데, 이런 조조가 인정한 유일한 라이벌이 바로 유비다. 실제로 많은 사관들은 유비가 아니었다면 조조가 충분히 중국 대륙을 통일했을 것이라 평한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승리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비가 좋은 집안과 재산을 가진 군벌들을 넘어 천재 중의 천재로 평가받는 조조와 대등해질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그가 연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염립본의 제왕역대도권 중 촉주 유비 부분 (출처=위키백과)
염립본의 제왕역대도권 중 촉주 유비 부분 (출처=위키백과)

▲ 유비에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유비의 자는 현덕으로 ‘한나라’의 황손이다. 그러나 황실의 후손이라는 배경과 별개로 매우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외모는 정사와 연의 등에서 모두 비슷하게 묘사되는데, 팔이 길어 무릎까지 닿고 귀는 남달리 커 부처의 귀와 비슷했다고 기록돼 있다. 

유비는 어려서 아비를 여의었는데,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돗자리를 짜서 생계를 이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집안 어른이었던 유원기의 지원으로 당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는 노식의 문하생이 된다. 참고로 이 때 함께 공부를 했던 인물이 공손찬이다.

노식의 문하생이라고 하면 현재로 치면 명문대 학생 출신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에 몇몇 사람들은 유비가 바닥부터 시작한 건 아니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유원기가 유비를 지원할 때 그의 부인이 이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원기는 자신의 아들인 유덕연과 함께 똑같이 학비를 대주며 유비를 지원했으니, 그의 아내 입장에서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만큼 눈치가 보였을 것이었고 배움에 있어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유비는 공부를 즐겨 하는 모범생이 아니었다. 그는 동물들을 좋아하고 음악을 듣는 일에 관심을 보이는 등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 보면 친척 어른이 어렵게 대학 다니라고 등록금 대주고 지원해줬더니 한량 같은 생활이나 하는 꼴이었다. 만약 여기에 유비와 같이 공부하는 아들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부인이 전해 들었다면 화가 날 법도 했다.

아울러 화려한 의복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외적인 부분에도 많이 신경 썼던 것으로 추측된다. 주제 모르고 공부는 안 하면서 외모에 신경 쓰는 그를 어른들이 좋게 봐줬을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그러나 유비는 사람들과 교류하길 좋아했고, 외적인 화려함과는 달리 그는 말수가 적으면서도 남들을 공손히 대하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에 많은 젊은 호걸들이 그와 함께하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공부를 안 하는 대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자신의 장점을 활용해 많은 이들과 교류를 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관우와 장비를 만나 도원결의를 맺은 것도 이 시기로 추정된다. 아울러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책사 간옹과도 이 당시에 만나 우정을 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는 관‧장 의형제들과 함께 의병들을 모집하고 난을 진압하는 데 참여한다. 이 시절 유비는 여러 전공을 세우게 되는데, 이런 전공을 인정받아 한 지역의 현령으로 부임했으나 반군들에게 패하면서 공손찬에게 도망치게 된다.

이후 조조가 서주를 침공하며 서주대학살을 일으키자 서주목이었던 도겸을 도와 이에 맞섰고, 도겸이 병사하면서 서주목의 지위를 넘겨주어 서주에서 첫 기반을 마련한다. 하지만 자신이 받아준 여포의 배신으로 서주를 잃게 된다.

이후 조조에게 귀부했는데, 조조는 자신과 대립했던 유비를 예주목으로 삼는 등 매우 후하게 대접했다. 특히 조조는 유비와 함께 수레에 타고, 앉을 때는 항상 같은 위치의 자리에 앉게 하는 등 귀빈으로 대우했다.

그러나 조조 진영에서는 유비를 좋게만 보지 않았다. 이는 유비가 조조 밑에 있을 그릇이 아니라는 판단과 함께 후환이 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특히 조조의 뛰어난 책사 중 한명이었던 정욱은 유비에 대해 “크고 뛰어난 재주가 있고 인심까지 후하게 얻고 있으니 끝내 아래 있을 사람이 아니다”라며 “지금 그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다.

하지만 조조는 정욱를 비롯한 책사들의 이야기를 물리치고 유비를 매우 아꼈으며, 여기에 더해 조정에 표를 올려 유비가 ‘좌장군’ 직위를 받을 수 있게 했다.

천하의 조조가 왜 이렇게까지 유비를 후대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철저히 계산적인 조조가 그만큼 유비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조조는 서주대학살로 인해 민심이 완전히 떠난 상태였고, 그런 와중에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유비가 제 발로 들어와 줬으니 조조의 입장에서는 굴러온 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울러 이 시기는 유비와 함께하는 관우와 장비가 ‘만인지적’이라 불리며 중원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시기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유비 그 자체도 정사에서는 연의에서와 다르게 꽤 능력 있는 야전사령관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워왔다. 

당시 조조는 헌제를 옹립하는 데 성공한 상황이었고, 당장 원술과 대립하면서 원소와도 추후 일전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는 아주 큰 힘이 될 수 있는 존재였다.

능력을 중시하고 계산적인 면이 강한 조조 입장에서는 당연히 유비를 후하게 대접하며 자신의 수하로 두고 싶었을 것이고, 그를 충분히 자신의 부하로 부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을 것이다. 

▲ 많은 이가 두려워한 조조, 그런 조조가 인정한 유비

그 대단한 조조가 유비를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조조는 유비와 함께하는 주연 자리에서 “현덕(유비)께선 원소와 원술을 어떻게 보시오”라고 물었고, 이에 유비는 “영웅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조조는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직 사군(유비)과 나 조조 뿐이오. 원소 같은 무리는 족히 여기에 낄 수 없소!”라고 말한다.

자신의 어릴 적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세력을 가졌던 원소를 폄하하는 동시에 유비에 대해서는 영웅이라 칭찬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정욱 역시 유비에 대해 높게 평가한 부분이 있고, 당대 최고의 문무를 겸비한 것으로 평가받는 오나라의 주유도 “유비는 영웅다운 자태를 갖고 있어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손권에게 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대부분의 참모들이 유비의 그릇이 큰 것을 알고 추후에 후환이 될 것이라고 하나같이 이야기 하는데, 당시 유비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때부터 이미 꽤 이름을 날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유비가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정사를 살펴보면 유비는 뛰어난 야전사령관이었다. 

그는 삼국시절 3대 전투로 불리는 적벽대전을 비롯해 파촉지역을 다스리던 유장을 공격할 때에는 직접 군을 이끌고 나가 뛰어난 통솔력을 발휘해 결국 승리를 거둔다. 

이로써 유비는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는데 기틀이 되었던 파촉지역을 손에 넣으며 드넓은 중국의 한 땅을 차지하고 삼국시대를 이끈 인물 중 하나가 된다.

유비가 나중에 이런 업적을 세울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명분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차곡차곡 자신의 명성과 이미지를 쌓아갔기 때문이다. 

여기서 살펴볼 것이 익주자사였던 유장 역시 덕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장은 덕장임에도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으나, 반대로 유비는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기서 유장과 유비의 차이점은 능력이 뒷받침되었느냐의 여부다.

능력을 갖춘 유비가 덕까지 갖추고 있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고조 유방’이 다시 돌아왔다는 소문이 서서히 퍼져나갔고, 중국 전역에서 모두에게 환영받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런 점이 있었기에 조조 역시 그를 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어느 순간 조조와 갈라서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길이 조조와 같을 수 없음을 자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유비는 헌제의 국구인 동승의 밀책을 받아 조조를 암살하는데 동참한다는 뜻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동승의 이러한 계획이 발각되면서 숙청이 시작됐고, 유비는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원술을 토벌하겠다는 핑계로 조조 곁을 떠난다.

원술 토벌 이후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공격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원소와 동맹을 맺고 조조를 견제하기에 이른다. 이에 분개한 조조는 유비를 토벌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인 ‘왕충’과 ‘유대’를 보냈으나 유비에게 패하고 만다.

결국 조조가 직접 나서 유비를 공격하고, 이에 유비는 패배해 간신히 원소 진영으로 도망가게 된다. 이때 얼마나 급박했는지 관우를 비롯해 자신들의 부인들과 가족들은 챙기지도 못하고 원소에게로 도망친다.

이로 인해 관우는 3가지 조건을 들어 형수들을 모시고 조조에게 항복하게 된다.(‘조조편’ 오관참육장 참고)

조조에게 패한 뒤 원소 진영에 의탁하게 된 유비는 본격적으로 조조와 대립한다. 원소 진영에 유비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된 관우는 형수들을 모시고 조조에게서 달아나 유비와 합류한다.

유비는 원소에게 유표와 협공해 조조를 공격하도록 조언했고, 이에 원소는 유비를 직접 유표에게 보내 조조 공격에 합류하도록 설득하라 명한다. 이에 유비는 유표에게 조조를 공격하자고 제안하는 동시에 자신은 여남이라는 지역에 진을 쳤다. 

이에 맞서 조조는 자신의 부하인 채양을 시켜 유비를 공격하도록 했으나, 채양은 유비에게 패하며 전사하고 만다. 이에 조조는 원소를 내버려두고 직접 군을 이끌고 가 유비 정벌에 성공한다.
 
▲ 실리가 아닌 명분을 택한 유비, 민중의 영웅으로 떠오르다

여남에서 조조에게 패한 유비는 이번엔 유표에게 귀의한다. 이 때 유표는 유비가 온다는 소식에 멀리까지 마중 나와 영접했다. 조조와 원소, 도겸, 공손찬 등 큰 세력을 지닌 군벌들에 이어 유표 역시 유비를 귀빈으로 모신 것이다.

이처럼 많은 군벌들이 그를 환대할 정도로 유비의 명성과 덕망은 매우 높았는데, 이게 가능했던 것이 앞서 언급한대로 실리보다 명분을 앞세우고 행동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비는 대의명분에 따라 백성을 보호하는 정의로움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군벌들은 그를 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이미지를 올리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심지어 서주자사였던 도겸은 객장이었던 유비에게 서주를 양도했으니, 그를 만나본 사람들이 얼마나 유비를 신임하고 자신의 휘하에 두려고 했는지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유표에게 의탁하며 형주의 작은 신야성을 맡아 머물고 있을 시절에도 유비의 주변에는 끊임없이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다. 

이로 인해 유비세력이 커지자 유표 역시 유비를 경계했다. 결과적으로 유비의 그릇이 크다 보니 유표가 품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조조의 책사 곽가는 “유표가 유비를 쓴다면 그를 제지하지 못할 것이고, 그를 안 쓰면 쓸모없어질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진언한다. 당장은 유표의 세력이 컸을지라도 당대 사람들은 유비의 그릇이 유표보다 크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장면이다.

한편, 유비가 이처럼 착실하게 내실을 다져가고 있는 동안 원소가 사망한다. 원소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원담과 원상 형제가 원소의 후계자 다툼을 벌여 분열이 일어난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조조는 그들을 모두 굴복시키면서 원소 세력을 온전히 흡수한다. 

이 시기 유비는 조조가 근거지인 허도를 비운 틈을 타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이를 알게 된 조조는 자신이 가장 믿는 장수였던 하후돈에게 10만의 군사를 주며 유비를 상대하도록 했다.

양 군은 박망파라는 곳에서 격돌하게 되는데, 유비는 적은 병력으로 매복과 유인계를 활용해 하후돈의 10만 대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다. 

연의에 의해 박망파 전투는 제갈량의 데뷔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이 시기는 공명이 합류하기 전이었고 정사와 여러 기록을 보면 직접 유비가 이를 지휘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후 유비는 적벽대전을 시작으로 한중공방전에서는 당대 최강의 전략가인 조조를 상대로 직접 승리하는 등 조조 못지않은 전투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연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제갈량은 이 박망파 전투 이후 유비에게 발탁된다. 

유비는 책사인 서서가 제갈량을 추천하자, 그를 만나기 위해 세 번 찾아간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이야기다.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직접 유비를 찾아간 것으로 나오고, 이에 몇몇 사람들은 삼고초려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제갈량이 유비 사후 위나라를 침공하기 전 후주(유선)에게 올린 출사표에서 자신을 알아봐주고 세 번 찾아와 준 유비의 은혜에 대해 직접 언급하며 이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북벌에 나서야 한다는 이야기를 남긴다. 이 내용이 정사에서도 기록된 것을 보면 삼고초려 이야기는 사실일 것으로 판단된다.

여하튼 제갈량을 영입하고 난 뒤 유비는 그를 매우 아끼면서 많은 권한을 부여해주기 시작한다. 이에 관우와 장비는 자신들보다 20살이나 어린 제갈량에게 많은 권한을 주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에 유비는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으니 괜한 소리 말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의 유례다.

이 수어지교의 이야기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바로 유비가 자신은 물고기에 비유하고 공명은 물에 비유한 것이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으나, 물은 물고기가 없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즉, 유비는 공명보다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유비는 이처럼 늘 부하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관우‧장비와는 한 침상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함께하는 등 군신 관계라기보다 한 형제의 모습으로 지냈고, 유비가 죽은 후에도 촉한에 충성을 다한 장수 조운과도 마찬가지의 모습을 보여줬다. 

유비의 이런 행보들은 다른 군벌들에 비해 가진 것이 없었음에도 그들보다 큰 업적들을 세울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유비는 자신을 낮춤으로써 부하들과 백성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고, 이로 인해 대외적인 권위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던 것이다.

▲ 헤어지지 못하는 인재들, 떠나가지 못하는 민중들

한편, 하북을 완전히 평정한 조조는 다음 목표인 형주를 향해 거침없이 진격한다. 

조조의 형주 침공 직전 유표가 병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이후 장남 유기와 차남 유종 간에 내부분열이 일어난다. 형주의 토착 세력인 채씨 일가는 차남인 유종을 지지한 반면, 유비는 유경승(유표)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장남 유기를 후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채씨 일가는 유종에게 조조에 항복할 것을 권했고, 이에 유종은 어이없게도 형주를 조조에게 홀라당 넘겨버린다.

조조가 5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친히 형주를 정벌하기 위해 나선 상황에서 이를 막을 준비에 한창이던 유비는 이를 뒤늦게 알고 유종의 사자를 꾸짖었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몇 가지 사료들을 조사한 기록에 따르면, 이 때 공명은 유비에게 형주의 유종을 공격해 차라리 형주를 차지하라고 했으나, 유비는 “그럼 나중에 유경승(유표)을 볼 낯이 없다”며 거절했다.

결국 유비는 강릉성으로 후퇴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 때 유비를 따라 나선 무리가 무려 10만이라고 기록돼 있다. 서주대학살로 인해 조조에 대한 공포와 증오심이 가득했던 민중들은 조조와 대척점에 있는 유비가 자신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란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그가 지금까지 보여 온 행보들을 볼 때 모든 것을 걸고 따를만한 사람으로 인식됐던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 유종의 일부 장수들도 유비를 따라나섰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유비에 대한 장수들과 민중들의 믿음은 굳건했다.

연의와 정사 및 각종 기록들을 보면 이 때 유비일파는 백성들을 버려야 한다고 진언했다. 강릉이 이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가 될 터인데, 10만의 무리를 데려간다면 속도가 늦어져 조조에게 빼앗길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조조군의 기병이 빠르게 추격해오는 상황에서 이런 판단은 당연한 것이었다.

조조는 유비가 형주 중에서도 큰 성에 속하는 강릉으로 후퇴해 농성할 경우 형주 원정에 차질이 생길 것을 염려했다. 강릉성에 유비가 자리 잡을 경우 장강 수로를 통해 강하에 자리 잡은 유기와 연계할 수 있고, 형주 수군에 의해 형주 지방을 수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이에 조조는 기병 5000기를 뽑아 급하게 추격시키는 한편, 자신은 5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계속 남하했다. 

유비와 조조 양측 모두 강릉성이 이번 전쟁에 중요한 요충지라는 판단을 동시에 내린 것이다. 

하지만 유비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백성들을 딱하게 여기면서 ‘자신만을 바라보고 오는 백성들을 버릴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단 한 명의 백성도 버리지 않는다. 

10만에 이르는 백성들이 이끌고 가다보니 유비군의 행군이 매우 늦어졌는데, 겨우 하루에 4km 정도 밖에 갈 수 없었다고 하니 어찌 보면 유비의 이런 행동들은 매우 답답해 보일 정도다. 

유비는 10만의 백성들을 끌고 갈 식량도 없었고, 그들을 호위할 군사들도 많지 않았다. 당장 뒤에 적군이 쫓아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짐 덩어리나 마찬가지인 그들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유비에게 민중은 명분이었고, 조조와 대척점에 있어야 자신의 가치가 빛난다는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렸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비의 신념이 당장 위기를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신념을 져버리지 않으면서도 가장 최적의 상황을 만들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야 했다.

유비는 우선 무리를 나눠 관우에게 앞서 가 유기에게 구원을 요청할 것을 명했고, 자신은 가족들과 함께 뒤에 남아 백성들을 호위하면서 피난행렬을 이어갔다. 

그러나 조조군은 이내 유비일행을 따라잡아 급습했고, 유비는 또 다시 가족들을 내팽개치고 혼자서 급하게 도주하게 된다. 

이로 인해 유비의 참모진인 미축과 손건의 행방은 묘연했고, 유비의 두뇌 역할을 하던 서서 또한 자신의 노모가 조조군에게 붙잡혔다며 노모를 모시기 위해 조조진영으로 가겠다는 뜻을 전한다.

이를 들은 유비는 눈물을 흘리며 서서를 배웅했고, 서서는 “조조를 위해 자신의 계책을 쓰지 않겠다”고 유비에게 다짐한 뒤 조조에게 항복한다.

▲ 현실판 ‘미션 임파서블’ 수행하는 유비의 장수들

한편, 군사를 수습하는 중 한 병사가 유비에게 “조운이 조조에게 항복했다”며 조조 진영으로 말을 타고 갔다고 보고했다. 적진에 혼자서 말을 타고 갔으니 보통은 배신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자룡(조운)은 절대 나를 배신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일축하면서 조운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드러냈다.

유비의 믿음대로 조운은 조조에게 항복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유비의 두 부인과 아두(유비의 아들)가 조조군에게 붙잡혔다는 말을 듣고 필마단기(匹馬單騎)로 50만에 이르는 조조의 대군 속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연의에 따르면 조운은 먼저 미축과 감부인을 구출해 장비에게 보내고, 미부인과 아두를 찾기 위해 또 다시 조조진영으로 뛰어든다. 

조운은 혼자서 이리 날뛰고 저리 날뛰면서 조조군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고, 결국 미부인과 아두를 발견해 낸다. 유비의 둘째부인이었던 미부인은 조운을 만나자 아두를 넘겨주고, 자신은 부상이 심상치 않아 탈출하는데 짐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 우물에 뛰어들어 자결한다.

조운은 이런 미부인의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두를 품에 안고 다시 조조군을 혼자 휘저으며 탈출에 성공한다. 이 때 조운이 베어버린 조조의 이름 있는 장수들만 무려 50여명이라고 전해진다.

아두를 구해온 조운은 “아두는 구했지만 미부인의 죽음은 막을 수 없었다”며 죄를 청했다. 이에 유비는 아두를 내던지고는 “이깟 아이 하나 때문에 큰 장수를 잃을 뻔 했다”며 그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워줬다는 일화가 있다.

정사에서도 조운이 단기필마로 유비의 아들을 구해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보면, 연의에서의 내용이 어느 정도 과장이 있었을지 몰라도 대체적으로 사실로 인정된다. 연의에서는 조조가 이 모습을 보고 감탄하며 조운에게 이름을 물었고, 조운은 “내가 바로 상산의 조자룡(조운의 자)이다”라고 외치면서 유유히 적진을 빠져나갔다고 전해진다.

한편, 장비는 유비의 명에 따라 조조군의 추격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해 단 2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장판교를 막아선다.

장판교에 도착해 다리를 끊은 장비는 조조군이 이르자 “내가 장익덕이다. 누가 앞으로 나와 생사를 두고 싸울 것이냐”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에 조조군에서 감히 접근하는 군사가 없었고, 그 덕에 유비는 시간을 벌게 되어 조조군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조조군과 오랫동안 눈싸움을 벌이며 장판교를 막아섰던 장비는 유비가 무사히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서서히 물을 건너 유비에게 돌아갔다. 

이 내용 또한 정사와 각종 사료들에 기록된 내용이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명백한 사실인 것이다. 조운과 장비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들을 망설임 없이 수행해냈고, 패배 속에서도 유비군의 이름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관우 역시 그 많은 인력을 무사히 피난시키는 한편, 유기에게 지원군까지 얻어 유비군을 구원하러 달려온다. 이로 인해 유비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비는 또다시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고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장비로 인해 유비에 대한 추격을 실패한 조조가 그 대신 강릉으로 빠르게 이동해 강릉성을 먼저 점거했기 때문이다. 조조는 형주만 얻으면 중국대륙의 통일을 눈앞에 둘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남은 건 아직 호족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손권과 아둔한 익주자사 유장, 그리고 한중의 장로와 서량의 마등 등은 그 시기까지 조조에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 조조군의 기세는 드높았고, 그런 조조의 위세는 중국 전역에 떨쳐지고 있엇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유비는 끝까지 조조에게 대항할 마음을 꺾지 않았다. 

▲ 기반은 잃었으나 사람은 잃지 않았네

이때까지 유비집단은 특별할 것 없는 그저 떠돌이 용병단에 가까웠다. 여기에 조조를 대항할 마땅한 세력은 보이지 않았고, 유비는 조조라는 바위에 비하면 달걀 수준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유비 주변에는 인재들이 떠나가기는커녕 더 모여들고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조조에 대항하는 유일한 대항마라는 인식이 민중들 사이에 굳건하게 잡혀 있었고, 조조에 반감을 가진 재야인사들의 지지도 여전했기 때문이다.

또한 유비는 조조나 다른 군벌들처럼 특출한 재능을 보이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무엇 하나 부족하진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항상 유비가 조조에게 패배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조조가 직접 나서지 않을 경우에는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오히려 조조군을 자주 격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대 최고의 세력이었던 원소를 군세에서 밀리면서도 관도대전에서 크게 이긴 조조다. 그런 조조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토벌할 수 없는 인물이 유비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크고 작은 군벌들과 대중들 사이에서는 ‘조조의 유일한 대항마는 유비’라는 강한 인식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유비는 조조의 부하들을 격파하면서 “조맹덕(조조)이 직접 온다면 모를까 너희들은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일갈하는 등 조조 외에는 모두 격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별히 조조만큼의 천재적인 재능은 없었어도 여러 부분에서 중간 이상의 능력은 보여줬던 것이다. 이런 그의 모습은 평소 나름 전장을 누비면서 착실히 능력을 쌓아가고 노력하는 모습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 판단된다.

또한 자신이 집단을 이끌어가기 보다 이들 하나하나가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유비가 인재들을 알아봐준다는 인식도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여기에 유비는 장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버리지 않았으며, 역설적이게도 이런 모습들은 장수들에게 ‘그가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않을 것’이란 믿음을 확고하게 만들어줬다.

장판파 전투 이후 흩어졌던 많은 병사들과 백성들이 다시 유비에게 합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에 대한 민중과 부하들이 신뢰가 얼마나 굳건했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장수들은 유비가 자신들의 결정을 반대하고 위험을 감수함에도 기꺼이 그 위험 속에 망설임 없이 함께 뛰어들었고, 모두 각자 목숨을 바쳐 성공하기 어려운 역할들을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전혀 기반도 없고 당장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유비를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랐을지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관우는 당시 최고의 이름난 군주이자 떠오르는 권력의 핵이었던 조조가 대놓고 총애했으며 이로 인해 출세가 보장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다른 군벌에 빌붙어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던 유비에게 다시 돌아왔다.

서주의 대부호였던 미축도 마찬가지다. 서주에서 손에 꼽히는 부자였던 미축은 유비가 도겸을 도와 서주에 있을 시절 처음 만났다.

여포의 배신으로 유비가 가장 힘들었을 때 미축은 자신의 재산뿐만 아니라 누이를 두 번째 부인으로 내어주고 끝까지 방랑길까지 함께한다. 아두를 조운에게 맡기고 스스로 우물에 뛰어든 미부인이 바로 이 미축의 누이다.

미축은 서주에서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편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일정한 기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유비군을 먹여 살리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유비에게 투자했으니, 유비에겐 무언가 특별함이 있었다는 의심(?)마저 든다.

유비는 또한 그들과 함께하며 그 위기를 함께 감당하려 했다. 추후에 다루겠지만 유비는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책임을 지려 노력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며 위기의 순간 그를 믿고 망설임 없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나섰고, 자신들의 능력을 100% 이상 발휘하며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을 해냈다. 관우와 장비가 그러했고 조운도 목숨을 바쳐 그의 가족들과 아들을 구해낸 것이다.

유비는 부하들의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고, 나름 인정받을만한 능력을 지닌 그가 부하들을 대등하게 대우해 주는 것을 넘어 뒤에서 밀어주는 역할들을 충실히 해냈다. 그러니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따르고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비는 강릉이라는 요충지를 잃었지만 그를 따르는 많은 부하들과 민중의 지지는 여전했다. 이로 인해 유비는 위기 속에서도 빛났으며, 바위를 깰 수 있는 단단한 달걀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편에 계속)

 

홍성완 기자 seongwan626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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