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통수 맞은 MB, ‘재계의 난’ 세금으로 진압?

[뉴스포스트=도기천 기자] 정부가 ‘재계의 난’에 칼을 빼들었다.
지난 6월 한나라당이 의원총회에서 ‘추가 감세 철회’를 당론으로 정하자 허창수 전경련 회장이 “반값등록금을 의식한 포퓰리즘”이라며 발끈한 데서 비롯된 재계와 정치권의 충돌은 이제 대기업들의 ‘일감몰아주기 과세’라는 정부의 극약 처방으로 치닫고 있다.
재계는 정부의 과세 방침에 대해 “마녀사냥식 위헌 행위”라며 격분하고 있지만, 정부는 “물량몰아주기는 변칙적 증여행위”라며 과세방침을 거듭 확인하고 나섰다.

최근 ‘일감몰아주기’ 과세로 정치권과 갈등을 겪고 있는 재계 총수들(전경련 회장단). 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 효성 조석래 전경련 회장, 이건산업 박영주 회장, 두산 박용현 회장, 롯데 신동빈 부회장, 삼환기업 최용권 회장, 허창수 전경련 회장(GS그룹), 포스코 정준양 회장, 대림 이준용 회장, 코오롱 이웅렬 회장, SK 최태원 회장, 한화 김승연 회장.

정부 “물량몰아주기는 변칙적 증여행위”
재계 "일감 몰아주기 과세 법적근거 없다"

정부안대로 실제 과세가 이뤄질 경우 국내 대기업들은 많게는 수천억원에 이르는 부당이익금을 토해내야 할 처지가 됐다. 정치권은 영업이익증가분은 물론 주식가치증가분도 소급적용해서 증여세를 물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실은 ‘정부 일감 몰아주기 과세방법 평가 및 납부세액 보고서’에서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이 가장 많은 증여세를 납부하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8일 밝혔다. 정 부회장은 2004년 상속·증여세법의 완전포괄주의 도입 이후 지난해까지 7년 동안 주식가치 증가분에 과세할 경우 총 7287억원, 영업이익 증가분에 과세할 경우엔 858억원의 증여세를 내야 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정 부회장은 상장회사인 글로비스의 지분 31.9%를 비롯해 현대엠코와 현대위스코 등의 지분을 갖고 있다.
최태원 에스케이(SK) 회장은 각각 7038억원, 437억원의 증여세를 납부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각각 5084억원, 478억원으로 나타났다. 최 회장은 에스케이시앤시의 지분 44.5%를, 정 회장은 글로비스의 지분 20.3%를 비롯해 현대엠코 등의 지분을 갖고 있다.

정치권 “주식가치증가분도 소급적용 해야”
대기업 "형평성 위배…마녀사냥식 발상" 반발

이는 최근 한국조세연구원의 한상국 전북대 교수가 발표한 ‘주식가치와 영업이익 증가분에 대한 증여세 과세 방안’을 토대로 산출한 세금이다. 정부출연 기관인 조세연구원의 이번 발표는 사실상 정부안을 제시한 것.

한 교수는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5가지 과세방안을 제안했다.
우선 특정 계열사가 특수관계 기업과의 거래 비율이 30%를 초과할 경우 주식가치 증가분에 대해 과세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주식가격이 하락할 경우에는 과세하지 않는다. 여러 방안 중 상대적으로 변칙적인 상속·증여에 대해 철저하게 과세할 수 있지만, 주식가치 상승이 물량 몰아주기로 인한 것인지 그 외의 요소에 의한 것인지 정확히 구분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영업이익에 증여세를 과세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주가하락 여부와 상관없이 세후 영업이익이 발생할 경우 과세가 가능하지만, 국제회계기준(IFRS) 도입 이후 영업이익 산정 범위에 대한 논란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국세청을 우선 이 두 가지 방식을 중점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둘 중 한 가지 방식을 택할지, 둘 다를 택할지는 아직 윤곽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이밖에 영업이익에 대한 배당소득세 분리과세, 수혜기업에 대한 법인세 추가과세, 물량 몰아주기를 한 특수관계기업에 대한 손금불산입 등의 방안도 제시됐다.

한 교수는 "2004년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기업 간의 몰아주기식 거래를 통해 상속·증여세를 회피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면서 "물량 몰아주기를 통한 부의 무상이전은 전통적인 증여방식은 아니나 그 경제적 실질은 증여행위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감몰아주기 과세 법적근거 ‘모호’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한 교수가 제시한 5개 과세방안 중 주식가치 증가분에 증여세를 과세하는 방안과 관련, 주식가치 상승과 일감 몰아주기 간의 연관성을 명확히 규명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또 일감몰아주기를 세법으로 규제하는 것 자체가 형평성에 위배돼 위헌적 요소를 안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전오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감몰아주기 과세 방침에는 찬성하며, 과세 방식으로는 주식가치 증가분에 대한 증여세 과세를 지지한다"면서도 "정상가격으로 물량을 몰아주는 것에 대해 세금을 물리는 사례가 없기 때문에 '정상가격이지만 기업간 거래 형태로 포장해 물량이 늘어 이익을 볼 경우 과세할 수 있다'는 식으로 증여세 정의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과세 대상에 대해서도 "6촌 이내는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4촌 이내로 좁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석 대한상공회의소 조사본부장은 "우리나라 헌법은 기업의 자율을 존중하고 있으며 이를 불가피하게 제한하더라도 본질적인 자유와 권리는 제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면서 "물량 몰아주기에 대한 과세는 헌법정신에 위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본부장은 "토지초과이득세 역시 1989년 도입된 후 5년만에 헌법불합치 판정으로 폐지됐다"면서 "명분이 아무리 좋아도 수단이 적절치 못하면 조세저항을 받을 수 있다. 물량몰아주기 과세도 무리하게 추진하면 토초세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현행 공정거래법에서도 부당지원행위에 대해 과징금을 부과하는 만큼, 굳이 허점이 많은 과세 방안을 모색하는 것보다 현행법을 활용하는 게 합리적이다"고 밝혔다.

반면 최영태 참여연대 조세개혁센터 소장은 "증여세로 과세하기 힘든 부분에 대해서는 주식양도차액에 대해 과세를 해야 한다"면서 "현재 20~30%밖에 안되는 세율도 50%로 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소장은 "윈드폴 프로핏(불로소득) 텍스를 신설해 증여 부분은 증여세로 과세하고, 증여가 아니지만 국민의 정서상 너무 많은 부분이 자녀세대에 이전될 경우에도 과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정부는 이와 관련, 과세한다는 원칙을 명확히 했다. 김형돈 기획재정부 재산소비세정책관은 "물량몰아주기는 변칙적 증여행위로 보며 과세 필요성이 있다"며 "논의된 과세 방식 중 단점으로 지적된 부분에 대해서는 위헌성을 심도 있게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한 교수는 "애초 일감몰아주기는 변칙 상속인만큼 개인에게 상속세로 물리는 게 맞다"며 "법인에게 물리는 부분도 함께 고려해볼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경제계는 과세 방안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반발하고 있지만, 정부는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과세를 어떻게든 추진할 태세다.

정운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과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대 중소기업 동반성장,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 및 MRO 등에 대한 공청회'에 참석해 의원들의 질의를 경청하고 있다.

여야 친서민 경쟁, 재계로 ‘불똥’

내년 총선과 대선 등 중요한 정치일정을 앞두고 MB정부가 임기 말에 이같은 무리수를 던진 연유는 뭘까?
이는 지난 4.27재보선이 여권의 참패로 귀결된 후, ‘이대로는 내년 선거를 치르기 힘들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동남권신공항 백지화와 저축은행 사태 등으로 악화된 민심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친서민 정책을 강화하는 것. 특히 7.4전당대회를 통해 당 조직이 재편되면서 소장개혁파들의 목소리가 높아진데다, 당서민특위 위원장 출신의 홍준표 최고위원이 당대표에 선출되면서 서민행보에 가속도가 붙었다.

한나라당이 재계에 포문을 연 것은 지난 6월16일로 거슬러간다. 이날 한나라당은 의원총회에서 ‘감세정책 철회’를 결정했다. 며칠 뒤에는 대기업이 오너일가 소유의 회사와 내부거래할 경우 정부에 신고토록 하는 사전신고제 도입을 들고 나왔다. 또 대기업 법인세 감세를 철회하기로 야당과 합의했다.

그러자 재계는 발끈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법인세 감세 철회, '반값 등록금' 등에 대해 '포퓰리즘'이라고 정면 비판하고 나섰다. 며칠 뒤에는 ‘수장의 입’이 아닌 ‘싱크탱크’를 통해 전선을 확대하고 나섰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유관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이 반값등록금을 바판하는 보고서를 내놓은 것.
한경연은 지난 6월27일 ‘반값등록금의 문제점과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반값등록금은 소득 재분배와 수익자 부담 원칙 등 경제 원칙에 어긋나는 동시에 학력 인플레를 심화시키면서 대졸 실업자를 양산할 수 있다”며 “등록금은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결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권과 재계의 기싸움이 정점에 이른 때는 경제단체장들이 6월29일 국회에서 열린 '대·중소기업 동반 성장 공청회'에 집단으로 불참하면서부터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이희범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 등 경제 3단체장은 이날 국회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예정됐던 국회 환노위의 한진중공업 청문회에서도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은 신병상의 이유로 불참했다.

정치권 한목소리 재계 비난

그러자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도 대기업 총수들의 오만함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김영환 국회 지경위원장은 “대기업들이 지금처럼 오만해진 적이 없다”며 “기업들이 공청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대화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공청회를 출석 의무가 부과되는 청문회로 격상하고, 그래도 출석하지 않는다면 국회법에 따라 고발 조치할 계획이다. 국회 차원의 국정조사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격노했다.

7.4전당대회에서 친서민정책 강화를 모토로 당대표에 당선된 홍준표 대표는 직접 대기업들을 겨냥한 발언은 자제하면서도 “당이 살 길은 서민행보를 강화하는 길 뿐”임을 거듭 강조해왔다.
홍 대표는 2일 정당대표 연설을 통해 "참보수를 지향하는 한나라당으로서는 부자에게는 자유를 주되 의무와 책임을 다하게 하고, 서민에게는 더 많은 기회를 주되 떼를 쓰는 풍토를 없애는데 정책 방향의 본질이 있다"며 "대기업의 추가감세 철회를 두고 일각에서는 '좌클릭'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좌클릭이 아니라 서민정책을 강화하는 정책“이라고 강조하며, 대기업의 시장 독과점을 우회적으로 비난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반(反)대기업’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하고 있다. 특히 세금은 ‘기업 경쟁력 약화’로 연결될 수 있기에 신중하게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대기업들이 세금을 많이 낼수록 수익성이 악화돼 결국엔 서민 경제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이론이다.
이현석 대한상공회의소 전무는 "대기업을 지나치게 비판하거나 경영활동을 압박하는 것은 기업의 사기를 저하시키게 된다"며 "결국 투자와 고용에도 도움을 주지 못해 경제활성화에도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세율을 높이면 기업들의 경쟁력이 악화되기 때문에 복지 재원 마련이 더 어렵게 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세금을 낮춰야 한다"고 밝혔다.

‘보여주기식’ 정책으로 끝날 수도

재계와의 ‘기 싸움’에서 정치권이 내놓은 최후의 카드는 ‘세금’이다. 이는 여야정치권이 서로 이견이 없는 사안이라 ‘재벌 손보기’에 현실적인 결정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의지가 확고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들어 "국민들은 공정사회 구현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로 공정한 과세를 꼽고 있다"며 “국세행정을 공정하게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다. 이 말에는 집권초기부터 ‘욕 먹어가면서’ 꾸준히 기업들에게 베풀어온 감세정책에도 불구하고 ‘재계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는 불만이 스며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오랜 정경유착의 고리가 쉽사리 끊어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보여주기식’ 정책으로 ‘반짝’했다가 흐지부지될 여지도 충분히 안고 있다.
민주당 모 중진의원은 “한바탕 태풍이 지나고 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호흡을 맞춰가는 게 정치권과 재계의 생리”라며 “결국 재벌들이 적정한 선에서 양보하는 액션을 취하게 될 것이고 정치권은 마지못해 수용하는 듯한 모양새를 만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기천 기자 dogich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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