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홍여정 기자]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서울의 모습. 그 시간 속 묵묵히 한 곳에서 자리를 지키며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가게가 있다. 켜켜이 추억을 쌓으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이 공간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삼각산(북한산)의 양지바른 남쪽 동네 ‘삼양동’에는 46년 동안 주민들의 일생을 담아온 사진관이 있다. 바로 나복균 대표가 운영하는 ‘서울스튜디오(前 서울사진관)’다. 그의 옆에는 항상 막내아들인 나승보 대표가 함께 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왔던 아들은 그 업을 이어받아 ‘설담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강북구 삼양동에 위치한 '서울스튜디오'에서 나복균, 나승보 부자를 만났다(사진=홍여정 기자)
강북구 삼양동에 위치한 '서울스튜디오'에서 나복균, 나승보 부자를 만났다. (사진=홍여정 기자)

◇ 사진업이 인기였던 시대

나복균 대표는 1967년 월남 군대생활 시절 만난 분대장을 통해 사진사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 나주가 고향이었던 그는 군 제대 이후 서울로 올라와 1969년 사진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사진관은 그의 표현에 의하면 ‘노다지를 캘 정도로 붐’이었다.

“친척분의 권유로 디피점(DP-E, 필름을 현상·인화·확대하는 가게)을 운영하게 됐어요. 시작할 당시에는 사진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기술자를 고용했고 그 사람한테 사진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 시절에는 사진 수요가 많아 인기 직종이었죠.”

1970년대 섬유 공장 여공들, 버스 안내양 등 직장동료나 친구들과 단체사진 찍는 문화가 유행함에 따라 사진업도 함께 발달했다.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카메라를 대여해주는 일종의 렌탈샵도 있었다.

이후 나 대표는 1973년 지금의 삼양동 자리에 ‘서울사진관’을 연다. 매번 임대 계약기간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에 고충을 느낀 그는 아예 터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큰 고민이 사라지자 사진관은 훨씬 안정적으로 운영됐다.

나 대표는 사진사는 어디 가나 환영받았다고 회상한다.

 “카메라 메고 출장을 참 많이 다녔어요. 여공들 사진 찍는다고 창경원도 많이 갔죠. 돌, 생일잔치 등 집안 행사가 있을 때는 집으로 출장을 가기도 했어요. 자전거나 리어카에 평풍, 플래쉬 등을 싣고 열심히 다녔네요.”

◇ 더 좋은 사진을 위해서라면

아들인 나승보 대표는 “아버지는 아이디어뱅크”라고 얘기한다. 나 대표는 손님들에게 보다 좋은 환경에서 만족할만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계속 고민했다. 사용하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장비를 개조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요새 스튜디오에서도 돌상 해주죠? 제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가 일층 스튜디오에 돌상을 만드셨어요. 아마 저희가 최초일 겁니다. 그것 말고도 인물 사진을 찍을 때 손님들이 옷이나 머리를 바로 만질 수 있게 카메라 바로 옆에 거울을 둔 것, 찍은 사진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화면을 설치했던 것 모두 아버지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죠.”

나 대표는 좋은 사진을 위해 장비 투자도 욕심을 냈다. 사업 초창기 방 세 30만 원일 당시 카메라를 40만 원 주고 사기도 했고, 1억 원의 비용을 들여 필름 현상기계를 구입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사진 잘 나오는 집’으로 소문이 난 서울사진관은 동네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였다. 뿐만 아니라 전직 대통령 등 이름난 정치인들도 이곳을 찾았다. 여기서 찍고 당선된 사람들이 많다는 소문에 강북구 내 선거 벽보는 거의 대부분 서울사진관에서 찍었다고 한다.

필름에 수정 작업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나복균 대표(사진=홍여정 기자)
필름에 수정 작업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나복균 대표. (사진=홍여정 기자)

◇ 아날로그 감성의 특별한 ‘백일사진’

호황을 누리던 사진업은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들어서며 사양길에 접어든다. 36방 필름에 어떤 사진을 찍을지 고민하며 셔터를 누르고 어떤 사진이 나올까 설레던 아날로그 시대에서 손쉽게 사진을 찍고 확인하는 디지털 시대로 변했기 때문이다. 각종 도구로 필름 수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하던 나 대표는 이런 변화를 어떻게 생각할까.

“옛날 아날로그 시대에는 필름, 인화지 모두 암실에서만 작업해야 했어요. 아주 답답하고 예민한 작업이라 시간, 온도에 민감하고요. 그런데 이 디지털은 물 한 방울 안 묻혀도 되고, 암실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니까 굉장히 편리하다고 느껴요.”

나 대표는 포토샵도 직접 작업한다. 이 배경에는 아들의 노력이 있다. 아들은 아버지만을 위해 포토샵 과정을 직접 영상으로 찍고 책을 만들었다. 나 대표는 아들이 녹음한 내용을 계속 들으며 하나하나 배웠고 어려운 부분은 질문하며 습득했다.

46년의 시간 동안 30대의 사장은 70대가 됐고, 어렸던 아들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사진사’의 길을 가고 있다. 시대에 흐름에 맞게 구입했던 장비들은 이제 새로운 기계로 교체가 됐다.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고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나 대표는 자기 계발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백일사진에는 나복균 대표의 손글씨가 더해진다(사진=홍여정 기자)
백일사진에는 나복균 대표의 손글씨가 더해진다. (사진=홍여정 기자)
나복균 대표가 쓴 '백일사진' 글씨 (사진=홍여정 기자)
나복균 대표가 쓴 '백일기념' 글씨. (사진=홍여정 기자)

뚝심을 내세워 득으로 작용한 것도 있다. 서울스튜디오에서는 아직도 백일사진을 찍을 때 옛날 스타일을 고수한다. 나복균 대표가 직접 한자로 쓴 ‘백일기념’ 문구를 사진 오른쪽에 새겨주는 것이다. 젊은 부부들이 전통 방식의 백일사진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감지되자 나승보 대표는 아버지에게 제안을 했다.

“제가 백일사진을 담당하면서 처음에는 글씨 없이 나갔어요. 그런데 3~4년 전부터 전통방식으로 찍는 것이 유행이 되자 예전에 아버지가 먹으로 글씨를 써서 사진에 나갔던 것이 기억이 난 거죠. 지금은 아버지가 종이에 붓펜으로 써주시면 그걸 스캔해서 사진에 넣고 있어요.”

서울스튜디오는 지난 1973년 문을 열었다(사진=홍여정 기자)
서울스튜디오는 지난 1973년 문을 열었다. (사진=홍여정 기자)

◇ “초저가 영정사진 괜찮지 않나요?”

디지털시대를 거쳐 핸드폰에 카메라가 달리며 사진을 찍고 인화하는 사람들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수십 개가 넘던 삼양동 내의 사진관들은 거의 다 영업을 중단했다. 그래도 남아있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뭘까.

나승보 대표는 “찾아와주시는 손님들이 있기 때문이죠. 아버지가 백일 사진 찍어줬던 아이가 성인이 돼 자녀와 함께 사진을 찍으러 와요. 또 제가 취업사진을 찍어줬던 청년이 알고 보니 저희 아버지에게 돌 사진을 찍었고요. 동네 주민 이외에도 타 지역에서도 많이 찾아오시죠. 예전 기억 더듬어가면서 찾아와주시니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 같아요.”

46년 ‘사진사’ 나복균 대표는 이제 영정사진 사업에 관심이 간다고 말한다. 누구나 다 죽을 때 필요한 영정사진인데 비싼 값에 실상 못 찍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영정사진을 좋은 카메라로 찍어 저렴한 값에 만족할만한 품질의 사진을 얻도록 사업을 구상하고 있어요. 남들 좋은 자동차 타고 으리으리하게 사는 데 그 대신에 나는 고급 카메라 사서 내가 죽기 전에 이 영정사진을 최저가로 좀 진행해보고 싶어요. 내가 건강할 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서울스튜디오’를 지키며 사진을 찍고 싶다는 나복균 대표. 아들 나승보 대표는 다가오는 50주년을 위한 여러 이벤트를 구상 중이다. 자나 깨나 ‘사진’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사진이란 무엇일까.

“사진은 하나의 작품이에요. 사진을 보면 그 때 어떤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대화를 했는지 생각이 나죠. 시간 있으실 때 가족들과 사진관에 방문하셔서 가족사진 하나 남겨놓으세요. 시간이 지나면 굉장한 추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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