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 씨 "나는 문화재청 등 관제 조작 사건의 피해자"
- "소유권 인정받으면 당장이라도 상주본 공개할 것"

[뉴스포스트=이상진 기자] 만만치 않을 줄은 알았다. 낮 최고기온 33도, 최고습도 70%를 기록한 24일 경상북도 상주시. 장마 끝나고 가장 더위가 심하다는 대서(大暑)를 하루 전 떠나보낸 그날, 새벽 일찍 채비를 마친 기자는 아침 7시 50분 상주시를 향하는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을 떠났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56) 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상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사진=이상진 기자)
상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사진=이상진 기자)

2시간 30분. 시원스레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상주종합버스터미널. 불볕더위로 곤욕을 치르는 서울은 양반이었던가. 상주시는 더위에 습도가 더해진 찜통더위로 시름하고 있었다. 태풍 다나스가 몰고 온 고온다습한 공기가 상주를 포위했고 기진맥진한 기자는 어서 인터뷰를 끝내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상주시 낙동면에 위치한 배 씨의 작업실 ‘훈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넉살 좋은 버스 기사님이 넉넉하게 챙겨주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훈민관으로 향하는 시간 동안, 버스 뒷좌석에 온순히 몸을 포개 조금 살만 해진 기자는 어렵게 성사된 이번 인터뷰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참으로 기연(機緣)이라 할만 했다.

20일 늦은 밤. 갑작스레 스님 한 분이 전화를 해 기자가 쓴 상주본 관련 대법원 판결 기사에 감동을 받았고 자신이 배 씨의 지인이라며 인터뷰를 주선하겠다고 하더니, 인터뷰가 잡힌날 아침 일찍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자료들을 건네주려 먼 지방에서 서울까지 자비로 KTX를 타고 왔다. 스님이 건네준 자료에는 200년 된 통감절요 한 권도 포함돼 있었는데 스님은 해당 통감절요가 상주본과 두께와 질감, 크기가 유사하다고 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 씨 작업실 옆에는 낙동파출소가 이웃해있다(사진=이상진 기자)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 씨 작업실 옆에는 낙동파출소가 이웃해있다(사진=이상진 기자)

2008년 7월 30일.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은 한 지역 방송사를 통해 우리에게 그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졌다. 상주본이 나오기 전까지는 간송미술관에 보관돼 있는 국보 제70호 간송본이 유일한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세상 빛을 보자마자 관련 학계는 물론 대중들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던 상주본은 소유권 분쟁으로 첫 공개 일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기초 연구조차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이 <뉴스포스트>가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 씨를 인터뷰했던 이유다.

훈민관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기자의 ‘귀여운 공격성(Cute Aggression)’을 자극한 흰 멍멍이 한 마리였다. 배 씨가 밥을 챙겨주는 강아지였다. 곧 배 씨가 도착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 씨는 '모든 게 관제 조작 사건'이라며 억울함을 토로했다(사진=이상진 기자)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 씨는 '모든 게 관제 조작 사건'이라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사진=이상진 기자)

배 씨는 인터뷰 내내 줄곧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집 수리 과정에서 나온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문화재청은 물론이고 검찰과 다른 골동품 관계자들, 최근에는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까지 가세해 빼앗기 위해 혈안이라는 것이다.

배 씨에 따르면 처음 일을 꾸민 사람은 구미에서 유명한 골동품계 거물인 정 모 씨였다. 배 씨는 “내가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문화재청에 등록하려고 신청하고 방송을 통해 그 존재를 밝히자 정 모 씨가 골동품계에서 자신의 위상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상주에서 골동품계의 큰 손이라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던 조용훈(2012년 사망) 씨를 선동했다”고 말했다.

골동품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유명세’다. 비싼 골동품을 취급하고 이름이 날수록, 더 희귀한 골동품이 손에 들어온다. 더 비싸게 사줄 것이란 기대가 있기 때문이란다.

배 씨가 한 스님이 준 200여 년 된 통감절요를 보고 있다. 배 씨는 해당 책이 상주본과 크기와 질감, 두께가 비슷하다고 설명했다(사진=이상진 기자)
배 씨가 스님이 <뉴스포스트>에 단독 제보한 200여 년 된 통감절요를 보고 있다. 배 씨는 해당 책이 상주본과 크기와 질감, 두께가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사진=이상진 기자)

배 씨는 무가지보(無價之寶)의 가치를 가진 상주본 소장자인 자신이 정 모 씨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됐고 그래서 정 모 씨가 자신에게서 상주본을 빼앗기 위해 조용훈 씨를 부추겼다고 주장했다.

배 씨는 “정 모 씨의 동생이 당시엔 모 법원 부장판사였고 퇴직 후에는 법대 교수로도 재직해 법조계에 연줄이 있어 골동품계에서는 유명한 브로커로 알려져 있다”며 “하지만 정 모 씨는 정작 조용훈 씨가 상주본을 조 씨로부터 내가 훔친 것이라고 주장하도록 선동해놓고는 모른 척 나에게 접근해 자신에게 상주본을 넘기면 자신이 알아서 상주본을 처리해주겠다고 말했다”라고 토로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조용훈 씨는 무엇을 얻기 위해 정 모 씨의 의도대로 움직였을까? 이에 대해 배 씨는 “조용훈 씨는 본래 골동품계에서 자기가 손이 크다고 자랑하고 다녔는데 까짓것 상주본 얻는 데 무고 8개월 정도 위험을 감수하는 거면 하자고 해서 하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와중에 문화재청이 끼어들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배 씨는 강신태 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이 전후 사정을 살펴보다가 상주본의 소유권을 빼앗기 위해 발을 걸쳤다고 주장했다.

배 씨는 “70년대 말부터 도굴하고 장물을 팔던 조용훈 씨가 2000년도에 강신태 반장에게 한 번 잡힌 적이 있는데 이때부터 둘의 인연이 시작됐고 중간에 여러 다른 골동품 상인들도 상주본을 빼앗으려고 이들 무리에 합세해 상주본의 소유권을 탈취하기 위해 움직였다”고 했다.  

배 씨가 조용훈 씨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배 씨는 조용훈 씨가 집안의 가보로 내려왔다는 상주본의 가치를 몰랐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조 씨 본인도 골동품을 매매하는 골동품상이고 본인이 한문을 모른다고 해도 가보라면 주변의 서지학자나 한문학자들을 통해 해당 내용을 확인해보는 게 상식이라는 것.

또 배 씨는 조용훈 씨가 2008년 7월 28일 오후 4시쯤 자신에게 책을 팔면서 상주본을 도난당했다고 주장하는데, 자신은 28일 이틀 전인 26일 이미 변호사와 상주본 국보 지정 상담을 했고 27일에 문화재청에 상주본의 문화재 등록을 신청했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조 씨가 가보라는 상주본을 잃어버리고도 지역 방송사가 30일 보도한 상주본을 보고 나서야 도난 사실을 알았다는 게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용훈 씨는 대법원까지 가서 결국 민사재판에서 상주본의 소유권을 인정받은 뒤 해당 소유권을 문화재청에 넘겼다. 배 씨는 조 씨가 대법원까지 변호사 비용 등을 감수한 뒤 기껏 얻은 소유권을 문화재청에 넘긴 배경에는 강신태 반장 등 문화재청 관계자들의 협박과 회유, 그리고 지역 유지인 조 씨 일가의 압력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배 씨가 조용훈 씨로부터 상주본을 훔쳤다는 형사재판에서 대법원은 배 씨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형사와 민사 사이의 대법원 판결이 다소 모순되는 상황. 현재 문화재청은 조 씨가 넘긴 소유권을 토대로 배 씨로부터 상주본을 회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2008년 문화재 등록을 위해 문화재청에 상주본의 존재를 알렸던 배 씨는 이처럼 소유권을 주장하며 상주본을 회수하려는 문화재청의 태도 때문에 문화재 등록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재청이 상주본만 보면 뺏으려고 혈안이 돼 있는데 문화재 등록을 하려면 실물을 공개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개하기가 어렵다”며 “문화재청이 사건을 이렇게 만들어놓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상주본은 연구가 다 되고 보관도 잘 되고 있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배 씨가 상주본이 1조 원 가치가 있다는 근거를 제시했다고 제공한 자료. (사진=이상진 기자)
배 씨가 상주본이 1조 원 가치가 있다는 근거를 제시했다고 제공한 자료. (사진=이상진 기자)

‘그럼 지금이라도 문화재청에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배 씨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면 상주본을 공개할 것이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배 씨는 “그렇다”며 “하지만 검찰에서도 상주본을 장물로 만들어 회수하려고 하는 와중에 관제 조작 사건을 주도하는 문화재청이 그렇게 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1,000억 원. 수차례 보도된 내용처럼 1조 원 가치가 있다는 상주본의 10분의 1 정도인 1,000억 원을 준다면 배 씨는 독지가에게 상주본을 팔까? 이에 대해 배 씨는 “1,000억 원 이야기는 하도 상주본을 빼앗으려고 해 한 말이고 팔 것 같으면 문화재청에 신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1,000억 원이 갑자기 다 필요한 것도 아닌데, 그걸 팔아서 뭐 한다는 말이냐”며 “상주본을 가지고만 있어도 영광과 부귀가 계속 따라오게 돼 있고 저는 이게 세종대왕이 제게 내린 사명이라고 생각을 하고 저부터 연구에 앞장서고 싶다”고 말했다.

배 씨는 “지금도 안민석 의원 쪽에서 상주본을 빼앗기 위해 내가 일부러 상주본을 불에 태웠다는 등 정신 나간 소리를 하면서 온갖 의혹을 제기하고 여론전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하고는 “지금은 이런 상황 때문에 상주본을 공개하기가 어렵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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