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거리 없는 협력사 즉각 피해 '위기'
수출 규제 장기화 가능성에 대책 마련 시급

[뉴스포스트=이해리 기자] 한국에 대한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가 본격화된 가운데 대기업보다는 규모가 작은 2, 3차 협력사에 즉각적인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수출 규제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규제 품목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하청업체 직원들이 실직 위기에 놓인 것이다.

경기 용인시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전경. (사진=이해리 기자)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전경. (사진=이해리 기자)

지난 24일 기자는 국내 반도체 업체 3차 협력사에 근무하는 A 씨를 경기 용인시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인근에서 만났다.  A 씨 최근 일본의 수출 규제와 관련해 “우리 같은 작은 회사는 일거리도 예전 같지 않고, 계속 회사에 남아있는 것이 눈치가 보여 퇴사까지 고민하고 있다”라고 토로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1일부터 리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세 가지 소재의 한국 수출을 제한했다. 이 세 가지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사용되는 주요 소재다. 

A 씨는 일본이 현재 수출규제 조치를 건 반도체 핵심소재 중 불화수소를 이용한 식각 공정(에칭 공정) 설비 엔지니어다. 그는 외부 경제상황으로 인한 시장 변화에 업계 전체가 불안감에 쌓여 있다고 말했다. 

이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르는 게 몸값이었는데 지금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돼버렸다”라며 “회사에서 TF 팀을 꾸려 중국으로 내보내려 하는데, 출장비는 사실상 밥값만 지원하는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원청이 불화수소 물량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 공장 가동을 예전처럼 못하고, 일거리가 줄어 엔지니어도 많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으로 저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가라는 얘기다”라며 “TF 팀으로 꾸려진 직원들은 사실상 해고되는 거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호소했다. 

반도체 피해 도미노...장기화 우려

국내 반도체 제조사업장은 수많은 하청업체를 바탕으로 돌아가고 있다. 하나의 원청 공장에 200~300개의 하청업체가 상주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사업장의 라인 5개에서 1,000여 명이 일한다고 한다면, 1개의 라인에는 원청 소속 노동자 200명이 근무하고 나머지 4개의 라인에는 하청 노동자들이 200명씩 근무하는 형태다. 

문제는 이번 수출규제의 여파가 소규모 하청업체들에 즉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수출 규제 품목 중 불화수소는 반도체를 깎아내는 데 사용하는 ‘액체 불화수소(에천트)’와 세척에 쓰이는 ‘기체 불화수소(에칭 가스)’로 나뉜다.  

이 중 액체 불화수소는 국내 반도체 기업인 솔브레인이 이를 제조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솔브레인은 지난 4월부터 공주공장에 정제 공장 증설 작업을 해왔고 오는 9월부터 생산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본격적인 생산이 이루어지면 액체 불화수소의 국산화로 소재 확보에 숨통이 트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에칭 가스의 경우는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에칭 가스는 성분의 순도 차이가 제품 불량률과 1:1로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불량률과 밀접해 있다. 일본산 에칭 가스는 품질이 뛰어나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일본산에 의지하고 있다. 

일본이 이에 대한 수출을 규제하면서 중국이나 러시아, 국내산 등으로 눈을 돌리고 있지만 이를 실제 생산라인에 적용해 불량률을 파악하려면 생산 가능성을 따지는 데만 몇 달이 걸리기 때문에 에칭 가스의 물량 확보는 최대의 난제로 꼽힌다. 

아직은 긴급 물량을 확보하는 데 성공해 큰 차질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에 따르면 일본 정부의 국내 반도체 소재에 대한 수출규제에 맞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체들은 고순도 불화수소 등의 한두 달 치 정도의 재고는 확보해둔 상태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용 소재의 유통 단계에서 최종 종착지인 ‘엔드 유저(end user)’를 일일이 확인해 한국 수출을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수출규제 장기화에 대한 대책 마련에 차질을 빚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도체의 경우 대체품을 찾을 때까지 생산량을 조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3차 협력사와 같은 소규모의 협력사는 당장의 일거리가 줄었다. 그 타격을 고스란히 직원들이 받고 있다. 정부나 기업 측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려 힘쓰고 있다고 해도 실직 위기에 놓인 협력사 직원들을 사실상 구제해 줄 방법이 없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편, 정부는 일본이 수출 규제를 하고 있는 품목을 다른 나라에서 들여올 경우 관세를 깎아주는 ‘할당 관세’ 정책 등을 검토하고 있다. 할당 관세란 국내 수급 물량이 부족한 특정 수입 품목에 대해 한시적으로 관세를 최대 40%까지 감면해주는 제도다. 지난 2017년 살충제 달걀 파동 때 달걀 수입을 늘리기 위해 쓴 적이 있다. 

이와 함께 국내 반도체 업체들은 반도체 부품 공급 협력업체가 원천기술을 개발해 국산화할 수 있게 지원하고, 국산 소재의 품질 테스트를 진행하는 등 핵심소재의 일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기술적인 한계가 있어 일본산 소재를 국산화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지만, 국내 기업들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고 공급망을 다각화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뉴스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