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홍성완 기자] 한일관계가 뜨겁다. 아베정권은 치졸하게도 삼권분립이 이뤄진 대한민국의 체계를 인정하지 않고 사법부의 결정에 대해 경제보복으로 나서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최근 들어 다시 충무공 이순신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을 바라볼 때 함부로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려도 될지 의문이 든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성웅(聖雄)이라 불리는 충무공 이순신. 사실 그는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 그리고 아들이 되지 못했고, 그의 삶 자체만 보면 너무나 불행했다.

이순신이란 이름은 "순(舜)임금 같은 성군을 모시는 신하(臣)"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 때문인지 이순신은 누구보다 나라에 충성했고, 그 나라의 주체 대상을 백성으로 삼았다. 그런 그의 철학을 알았던 것일까. 선조는 끊임없이 그를 의심했다.

또한 청렴하고 강직한 그는 상사에게 청탁하거나 주변에서 들어오는 청탁들을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같은 덕수 이씨 인물이었던 율곡 이이가 이순신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으나, 이순신은 이이가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만나지 않겠다며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성품은 편협하고 옹졸한 사람들에게 좋게 비춰질 리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순신을 모함하는 일이 잦았다. 이로 인해 함경도에서 재직할 시절, 여진족들을 상대로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파직 당하며 첫 번째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하게 된다.

함경도 재직 시절에는 또 그의 부친이 별세하는데, 겨울에 많이 내린 눈으로 인해 그 소식을 두 달 여가 지나서야 알게 된다. 그는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에 자책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삼년상을 치르게 되지만, 이로 인해 그의 가슴 한편에는 늘 한스러움이 자리 잡게 된다.

이런 일은 임진왜란 시기에도 반복된다. 충무공은 그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주변의 모함으로 인해 한양으로 압송되어 고문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때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대패하며 제해권을 상실하자, 선조는 그에게 두 번째 백의종군을 명하며 다시 수군에 합류할 것을 명한다.

아들이 압송돼 고문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충무공의 어머니는 무리하게 아들을 보러 오다가 병을 얻어 별세하게 된다. 모진 고문을 견디고 나와서 그가 마주한 것은 싸늘한 어머니의 주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의 위급함에 이순신은 모친상마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남쪽을 향해 내려간다. 

당시 유교사상이 바탕이 되었던 조선에서 모친상을 핑계로 국가의 명령을 거부해도 될 일이었지만, 그는 고문으로 인해 피폐해진 몸과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억누르며 고통 받는 백성들을 위해 또 다시 길을 나섰다.

억울한 누명과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의 임종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이순신은, 그 고난 속에서도 그나마 남아 있는 수군들을 수습해 배 13척을 가지고 최소 133척이 넘는 일본 수군을 맞아 싸워 승리한다. 바로 세계 전쟁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전투로 기록된 명량해전이다.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왜군은 이순신에 대한 복수를 위해 충무공의 본가가 있는 아산을 공격한다. 이때 왜군에 맞서 싸우다 충무공의 셋째 아들 ‘이면’이 전사한다.

난중일기는 대체적으로 사무적으로 기술돼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이순신이 자신의 슬픈 감정을 표현한 부분이 거의 유일하게 나오는데, 바로 면의 사망 소식에 관한 것이었다. 

1597년 10월 14일자 난중일기를 그대로 옮겨보면 “하늘이 어찌 이리 어질지 못하시더냐,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맞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아 있으니 이렇게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으랴. 천지가 흑암에 덮이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네가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네 재주가 뛰어나 하늘이 이 세상에 놔두지 않는 것이냐. 내 죄가 많아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지금 세상에 살아 있으나, 이제 어디에 의지하랴.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겠으니 아직은 참고 살겠으나 마음은 죽고 몸만 남아 통곡하고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도다”라고 적혀있다.

이 때 충무공은 소금창고에 들어가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소금가마니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슬픔을 억누르고 다음 전쟁을 철저하게 준비한다. 국가를 위해 그는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먼저 따랐다.

사실 그의 고난과 공로들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자면 끝이 없다. 그렇지만 특별히 충무공의 고난의 삶에 대해 언급한 이유는 공직자들이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을 포함하는 공직자의 뜻은 말 그대도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국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희생하려는 마음은 보이지 않고 있다. 충무공은 백성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먼저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었고, 이로 인해 칠천량에서 완전히 무너진 수군 재건에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아울러 충무공은 왜군을 이기기 위해 그들의 움직임과 정보들을 철저히 연구했다. 대표적으로 항왜병들을 기용하고, 그들의 주력무기인 조총을 분해해 원리를 깨달아 제작한 뒤 역으로 왜군을 공략하는데 쓰기도 했다. 그는 또 왜군의 동선 파악을 위해 많은 척후병들을 보냈고, 그들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파악해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내 이길 수 있는 방안들을 마련했다. 그의 무패의 기적은 우연이 아닌 철저한 준비 속에 이뤄진 것이다.

요즘 일부 정치인들은 일본과의 경제마찰과 관련해 국민들보다 더 무지한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다. 상대를 알아야 하는데 자신들의 위치조차 망각하고 맞서야 할 상대에 대해 정보를 얻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 중대한 국가적 사안을 정쟁의 도구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무기로 삼는 모습들만 보이니 한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충무공을 모함하던 조선의 썩어빠진 정치인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충무공은 이들과 반대로 전공을 세우는데 연연하거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 전공을 부풀리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일본 역사연구가들 중 일부도 명량해전에서 300척이 넘는 왜군 배가 참여한 것으로 분석하는데, 충무공은 난중일기와 조정에 자신의 눈으로 정확히 세어 본 133척만을 보고했을 정도였다.

아울러 수급을 베기 위해 무리하게 왜군선에 접근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많은 조선 수군이 상하지 않았다. 자신의 전공을 위해 병사들을 희생시키지 않은 것이다. 이런 그의 행보는 조선군의 장수들뿐만 아니라 조선왕마저도 무시하기 일쑤였던 명나라의 수군 제독 ‘진린’조차 그를 존경하도록 만들었다.

공직자라면 응당 권력보다 명예를 좇아야 한다. 그 명예는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해냈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충무공의 일생처럼 말이다. 공직의 길을 택했다면 충무공만큼은 아니어도 자신들이 먼저 희생하고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할 상대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건 의무다.

정치가들이 충무공의 정신을 언급하려면 적어도 이런 의무를 시행하려는 노력과 함께 충무공의 삶에 대해 고찰하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그리고 국민들의 희생보다 자신들이 먼저 희생하는 모습을 묵묵히 보여준다면 아무리 강한 상대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국민들과 함께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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