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홍여정 기자] 검은 바탕에 자개(얇게 간 조개껍질)로 만든 문양의 장롱. 어릴 적 할머니 댁에서 본 듯한 그 추억의 물건은, 1960년대 혼수 희망 품목 부동의 1위였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의 주름과 흰머리는 늘었지만, 자개 가구들을 보는 마음만큼은 설렘이 가득하던 신혼 시절로 돌아간다. 섬세한 자개 화장대에 앞에 정신을 잃은 듯 한껏 멋을 부리는 새색시의 모습. 자개 가구를 장만하는 것은 그 시절 여성들에겐 일종의 로망이자 취미생활이었다.

시대가 변해 자개 가구들이 일상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자신만의 취향이 담긴 조립식 가구를 선호하는 데다 고가인 부분도 부담이다. 그 옛날 가가호호 한 개씩은 있었던 자개 가구들이 TV 속에서나 공예 작품으로 등장하곤 한다. 잊혀져 가는 영롱한 옛 것. 누군가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물건을 만드는 곳을 찾아가 봤다. 바로 먹거리 천국인 광장시장 내 특관 2층에 위치한 ‘국선옻칠’이다.

‘국선옻칠’은 나전칠기 제품을 판매한다. 명함케이스, 손거울, 연필꽂이, 보석함 등 종류도 다양하다. 알록달록 빛이 나는 이곳에서 40년 이상 나전칠기 제작에 종사한 오세운 대표를 만났다.

(사진=홍여정 기자)
국선옻칠 가게에서 만난 오세운 대표.  (사진=홍여정 기자)

관광상품으로서의 가치

경북 상주 출신의 오세운 대표는 어려웠던 시절 취업을 위해 아는 형님을 따라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당시 나이 19살. 잘 곳도 마땅치 않았던 그 시절 숙식을 제공해주던 한 공장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나전칠기와의 인연은 시작됐다.

“그 당시(1960년대)에는 일의 전망을 따지고 할 여유도 없었어요. 의식주 해결이 된다면 월급이 적은 건 문제가 아니었죠. 형 밑에서 2~3일 지내면서 일할 곳을 수소문했고 우연한 기회에 나전칠기 하는 공장을 가게 됐어요. 공장에 취직해 몇 달 일하고 오천 원을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약 3년간의 공장 생활을 끝내고 그는 한 나전칠기 가게에서 직원으로 일을 하게 된다. 이를 통해 제조와 유통, 판매를 모두 경험한 그는 1977년 광장시장 2층 후미진 곳에 ‘신일공예사’를 오픈한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광장시장을 떠나지 않았다.

나전칠기는 옻칠을 한 나무에 얇게 간 조개껍질(나전, 우리말로 하면 자개)을 붙여 문양을 만드는 공예품이다. 어릴 적 할머니 집에서 볼 수 있었던 검은 배경의 알록달록한 문양이 있었던 장롱이 바로 나전칠기다. 

생활 필수품이 아닌 호사품(豪奢品)에 가까웠던 나전칠기는 국내에서 그리 수요가 많지는 않았다. 고가다 보니 상류층을 중심으로만 구매가 이뤄졌다. 1960년대 들어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많이 판매됐다.

“1965년 한일수교 이후 일본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나전칠기 수요가 많이 늘었어요. 일본에도 자개가 있지만 큰 규모의 작품 위주로 비용이 비쌌죠. 대신 우리나라는 보석함 등 관광상품으로 내놨기 때문에 많이들 사갔고 그래서 나전칠기 시장도 커졌어요”

홍삼, 인형 등을 주로 사가던 외국 관광객은 점차 나전칠기에도 관심을 보였다. 1980년대 이후 국내 기업들이 해외 진출이 본격화되자 외국 바이어 선물용으로도 많이 구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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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옻칠' 전 제품에는 문화재기능인 낙관이 박혀있다. (사진=홍여정 기자)

아들, 문화재기능인이 되다

30년 이상 광장시장에서 자리를 지킨 ‘신일공예사’는 이제 ‘국선옻칠’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오세운 대표 옆에는 항상 아들인 오명호 대표가 함께 한다. 아들에게 약간의 압박을 한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들은 경찰 공무원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내가 먼저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죠. 근데 전망이 없다고 안 한다는 거예요. 누가 사냐 이거죠. 내가 닦아놓은 기반이 있어 먹고 살 수는 있겠지만 본인 전망은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더라고요.”

이에 오 대표는 아들에게 한 달만 가게에 나와 일해볼 것을 권유했다. 나중에라도 이 사업에 미련을 갖지 않게 현장 경험을 하고 판단하라고 한 것. 그래도 안 한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게에 나와 대뜸 컴퓨터부터 사달라고 한 아들은 오 대표의 표현을 빌자면 “하나도 도와주지 않았다"라고 한다. 땀 흘리며 일하는 아버지를 앞에 두고 컴퓨터 화면만 쳐다보고 하루를 보냈던 것. 한차례 고비도 있었지만 오 대표는 한 달을 꾹 참았다.

이쯤 되면 아들은 결국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떠나야 할 터. 오 대표는 답이 정해져있는 것 같은 질문을 아들에게 던졌다. 그런데 반전이었다. 일을 해보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서 역으로 ‘쇼핑몰’ 사업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얘기는 많이 들었어도 도통 감이 안잡히던 쇼핑몰 사업. 시작은 거의 의심이었지만 결과는 예상 밖의 성공이었다.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 오 대표는 세대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체감하는 일이었다.

이후 아들인 오명호 대표는 문화재기능인 자격증을 취득하고 자신의 이름을 건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 2012년 가게 이름도 ‘국선(國善)옻칠’로 변경했다. 나라를 선하게 하는 기업이 옻칠을 한다는 의미다. 대규모 납품을 위해 남양주에 공장도 마련했다. 현재 10명의 인원이 공장에서 제작을 하고 있다.

“아들이 함께하면서 사업이 한 단계 발전한 느낌이 들어요. 내가 혼자 계속했으면 기존의 것 그대로 이어가는 정도였겠지요. 젊은 세대의 아이디어는 기성세대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과감히 바꾸고 두려움을 떨쳐버리면 새로운 것이 보이는 것 같아요”

국선옻칠 사무실에 전시된 나전칠기 제품들 (사진=홍여정 기자)

백년가게의 시작점

나무 틀 위에 옻칠하고 말린 뒤 구부러진 조개껍질을 얇게 펴 모양을 내고 사포질. 이 과정을 5~6번 반복하며 하나의 제품이 나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한두 달. 장인의 인내와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나전칠기 작업을 40년 이상 해온 오세운 대표는 앞으로의 100년을 꿈꾸고 있다.

그는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세계에 알리기 위해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전칠기는 관광상품으로 외국인들이 사 가며 한국 홍보가 될 수 있는 업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 현실은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국제적으로 알리고 우리나라 전통을 홍보할 수 있는 망이 필요한데 지원이 너무 부족해요. 정부에서 전통산업에 종사하는 기업 중 대표 기업으로 육성해서 신생 기업들이 견학도 오고 자문도 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면 좋겠어요”

지난 2017년 선정된 오래가게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가게’는 서울시가 오랜 시간 한자리에서 명맥을 유지해오며 서울만의 정서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가게를 발굴해 브랜드를 붙인 것이다. 국선옻칠은 ‘오래가게’ 1차에 선정됐다.

“제도는 좋은 것 같아요. ‘오래가게’라고 이름 붙여서 홍보도 많이 해주고. 옛날보다 정부가 전통산업, 옛 것에 관심을 많이 가지는 것 같아요. 근데 이런 좋은 사업도 꾸준히 이어지면 좋겠어요. 그냥 선정만 하지 말고 사후 관리죠. 인증할 만한 팻말 같은 것도 안 주길래 내가 시청에 한두 번 전화했네요. 아니면 가게 사장들하고 박원순 시장하고 간단히 미팅 자리를 마련하는 거죠. 서로 고충도 듣고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훈훈한 자리가 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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