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문학관] 청년 시인, 일제 생체실험에 절명하다
[윤동주문학관] 청년 시인, 일제 생체실험에 절명하다
  • 이상진 기자
  • 승인 2019.08.20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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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신사참배 강요 항거해 학교 자퇴하기도
- 독립 위한 일본 유학... 창씨(創氏)에 대한 고뇌
- 정지용 “윤동주는 뜻이 약하고 뼈가 강한 시인”
서울 종로구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윤동주문학관'. (사진=이상진 기자)
서울 종로구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윤동주문학관'. (사진=이상진 기자)

[뉴스포스트=이상진 기자] 2019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은 해다.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대한국민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천명해 올해는 헌정사적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사이다. 최근 과거사 문제에서 촉발된 한일 갈등의 불씨는 수출 규제와 불매운동 등으로 몸집을 불렸다. 분업과 공조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경제 체제가 화마에 위협 받는 상황. 양국 간 지나간 역사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반성, 그리고 진정성 있는 사과가 절실한 때다.

이에 <뉴스포스트>는 16일 ‘윤동주문학관’을 찾았다. 본지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순국한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이었던 청년 윤동주를 조명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 윤동주. 육첩방(六疊房) 남의 나라에서 절명하다

윤동주의 장례식은 용정에 위치한 시인의 고향 집 앞마당에서 치뤄졌다. (사진=이상진 기자)
윤동주의 장례식은 용정에 위치한 시인의 고향 집 앞마당에서 치러졌다. 윤동주의 직접적인 사인은 일제가 지속적으로 투여한 성분 불명의 주사였다_윤동주문학관 (사진=이상진 기자)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 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_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쉽게 씌어진 시. 1942.6.3.>
 

스물일곱 청년은 얕은 외침을 남기고 절명했다. 육첩방(六疊房) 남의 나라에서 청년은 영어의 몸으로 옥사했다. 그의 모국어를 몰랐던 후쿠오카 형무소 간수에게 청년의 외침은 단말마의 비명소리일 뿐이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청년의 마지막 육성을 들은 일본인 간수는 “윤동주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고함을 지르며 절명했다”고 증언했다.

윤동주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 (사진=이상진 기자)
윤동주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_윤동주문학관 (사진=이상진 기자)

1945년 2월 16일 새벽 3시 36분. 민족 시인 윤동주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시퍼런 옥 같던 시인의 용모와 학창시절 축구선수를 했을 정도로 장골이었던 육체는 19개월에 걸친 형무소의 고된 노역과 성분 불명의 생체실험 주사로 무너졌다. 그가 사망하고 불과 여섯 달 뒤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 흉측한 괴물이 삼킨 조선 땅, 깊어지는 고뇌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불을 켜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간판 없는 거리. 1941.6.2.>
 

청년 시인이 모국을 떠나 일본으로 향하기 전 조선의 상황이 <간판 없는 거리>에 잘 나타나있다. 윤동주는 <간판 없는 거리>를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에 썼다.

시를 보면 본래 조선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은 이제 모두 손님이 됐다. 집집마다 간판이 없다. 그러니 집을 찾을 근심 걱정이 없다. 빨갛고 파란 문자도 없다. 문자가 없으니 생각이 없고 생각이 없으니 다툼이 없고 다툼이 없으니 다들 자애롭고 어진 사람으로 보인다.
 

하나, 둘, 셋, 네
..................
밤은
많기도 하다.

<못 자는 밤. 1941.6.>
 

주인 자리는 일제 차지다. 생각도 일제가 한다. 윤동주는 다툴 문자를 갖지 못한 조선인, 싸울 의지를 잃은 조선의 상황을 서정적으로 표현했다. 이에 윤동주의 밤은 많아진다.
 

▲ 조선 집어삼킨 괴물 잡기 위해 창씨(創氏)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한 성이 나온 연희전문학교 학적부. 성명을 붉은 글씨로 지우고 '히라누마'라는 성이 나와 있다. (사진=이상진 기자)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한 성이 나온 연희전문학교 학적부. 성명을 붉은 글씨로 지우고 '히라누마'라는 성이 씌어 있다_윤동주문학관 (사진=이상진 기자)

윤동주가 일본으로 떠난 이유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기 위해서였다. 윤동주는 조선을 집어삼킨 일본 제국주의라는 괴물을 잡기 위해선 괴물의 오장 육부부터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일본 유학을 결심한 것이다. 유학을 위해선 창씨(創氏)를 해야 했다. 일본식으로 씨(氏)를 바꿔야 했던 것.

1942년 1월 29일, 윤동주는 재학 중이던 연희전문학교에 창씨개명계를 제출한다. 창씨개명계를 제출하기 며칠 전 윤동주는 <참회록>을 쓴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참회록. 1942.1.24.>
 

<참회록>에서 일본 제국주의 뱃속에 들어간 조선을 구해내기 위해서라지만, 창씨를 하는 데 대한 시인의 고민과 참담함이 엿보인다. 1936년 숭실중학교 재학 시절 신사참배를 하라는 일제에 항거해 학교를 자퇴한 바 있는 그였다. 결국 윤동주는 히라누마(平沼)로 창씨하고 같은 해 4월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훗날 1943년 7월 14일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는 일본 유학 중이던 윤동주를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한다. 검거된 후 일본 유학 동기를 묻는 경찰에 윤동주는 “조선 독립을 위해서 자신이 민족문화를 연구하려면 다만 전문학교 정도의 문학 연구로서는 부족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 뜻이 약하고 뼈가 강했던 시인

시인 정지용은 1948년 간행된 윤동주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서문을 적었다. 정지용은 생전 윤동주가 가장 동경하던 시인이었다. 정지용은 서문에서 노자에 전하는 말을 인용한다. ‘허기심(虛其心) 실기복(實其腹) 약기지(弱其志) 강기골(强其骨)’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하라는 노자 구문과 윤동주의 시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정지용의 서문은 서정시로 널리 알려진 윤동주의 글에 뼈가 있는 까닭을 절묘하게 설명한 명문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1941.11.20.>     
 

윤동주의 시는 느린 유속으로 고향을 끼고 돌아나가는 시냇물과 같다. 하지만 그의 시를 읽는 우리의 목 언저리에는 어느새 파란 멍울이 맺힌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윤동주의 시에 섬뜩하게 날이 선 뼈가 있어 안으로는 통렬한 자기반성을 이끌고, 밖으로는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에게 침을 뱉는 까닭이다.
 

▲ 시인 오르던 인왕산 기슭에 자리 잡은 ‘윤동주문학관’

‘윤동주문학관’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 119(청운동)에 위치해있다.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재학할 당시 종종 인왕산에 올라 시상을 떠올리곤 했다고 한다.

이에 지난 2012년 종로구는 인왕산 자락에 있던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 윤동주문학관을 만들었다.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친필원고. (사진=이상진 기자)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친필원고_윤동주문학관 (사진=이상진 기자)

윤동주문학관은 △시인채 △열린 우물 △닫힌 우물 등 모두 3개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시인채 전시실은 시인의 일생을 연대기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방문객은 윤동주 시인의 사진과 친필원고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열린 우물과 닫힌 우물 전시실은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서 모티브를 따 만들었다. 열린 우물은 제1전시실과 제3전시실을 잇는 통로 역할을 한다. 제3전시실에선 윤동주의 삶과 문학세계를 소개하는 영상물을 감상할 수 있다. 윤동주문학관의 관람료는 무료다.


▲ 참고자료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청월, 2017.
송우혜, 『윤동주 평전』, 서정시학, 2017.

이상진 기자 elangvita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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