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0 추억가게] ④ 신발에 건강을 수놓는 '송림수제화'
[5060 추억가게] ④ 신발에 건강을 수놓는 '송림수제화'
  • 홍여정 기자
  • 승인 2019.08.28 17: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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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포스트=홍여정 기자] 과거 ‘가죽 구두’는 서양식 신발이라는 뜻으로 ‘양화’ 혹은 ‘양혜’라고 불렸다. 모던보이와 모던걸로 불리던 그 당시 청년들은 광택 나는 구두 한 켤레가 ‘잇템’이었고 그에 따라 양화점도 생겨났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통해 구두를 만들었기에 가격대는 높았지만 인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분위기를 타 1947년 칠성제화, 1954년 금강양화(現 금강제화), 1961년 에스콰이아 제화 등 수제화 가게들이 생겨났다. 기성화가 없었던 시절, 수제화 가게에서 나만의 신발을 구입하는 것도 일종의 재미였다.

기성화가 나오면서 신발이 대량 생산되고, 흔한 물건이 되면서 수제화 가게는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제화 기술을 배우겠다는 젊은이들도 점차 줄어들며 제조업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서울 시내에 오래된 구두가게라고 인증을 받은 곳이 있다. 서울 중구 수표교 근처 ‘송림수제화’다. 80년 이상 한자리를 지키며 수제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3대 사장 임명형 대표를 만나봤다.

송림수제화 임명형 대표가 본지 카메라에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소는 송림수제화 작업실 (사진=홍여정 기자)
송림수제화 임명형 대표가 본지 카메라에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소는 송림수제화 작업실 (사진=홍여정 기자)

제화공서 ‘발 건강 전도사’로

송림수제화는 일제 강점기인 1936년 서울 중구 수표교 근처에 ‘송림화점(松林靴店)’으로 시작한다. 창업주는 이규석 씨(1996년 별세). 여성화, 남성화 등 단일 품목으로 시작했던 다른 가게들과 달리 ‘송림화점’은 다양한 품목, 질 좋은 제품으로 손님들의 입소문을 탔다.

특히 ‘송림수제화’가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등산화’다. 6·25전쟁 직후 영국군 군화를 개조해 등산화창 몰드를 개발했고 1950년 한국 최초의 등산화를 만들었다. 송림의 등산화는 1995년 탐험가 허영호씨가 신고 남극과 북극을 횡단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까지 허 씨는 송림의 단골손님이다.

이후 1977년 산악인 고상돈 씨 안나푸르나 등반 신발 제작, 1985년 한국 최초 족형(발바닥모양) 콜크 신발 개발, 1988년 한국 최초 산악스키화 제작(군납), 1988년 88올림픽 사격화 협찬, 2006년 한국 최초 수제 숙녀화 족형 콜크 신발 개발, 2010년 스위스 쉘러 원단 수제 등산화 최초 개발 등 송림수제화는 한국 신발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1대 사장에 이어 외조카인 임효성 대표(2014년 작고)가 운영했고 현재는 아들인 임명형 대표가 송림수제화를 지키고 있다. 그는 가게 셔터맨으로 아버지의 일을 돕다 눌러앉았다. 시작은 엉뚱했지만 임 대표는 수제화 만드는 일에 금방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신발 때문에 발이 불편한 손님들을 만나며 그 원인을 찾고, 해결해주는 과정을 거치며 그 만의 노하우도 쌓여갔다. 그게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다. 그러면서 거의 반 ‘발’ 박사가 됐다.

“언젠가 가게에 한 손님이 오시더니 발을 꺼내놓고 신발 때문에 고생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발을 딱 보고 불편한 점, 이유 등을 설명해줬더니 놀래면서 명함 하나를 건네던데요. 보니까 정형외과 교수였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엑스레이로 불편함을 잡아내는데 사장님은 발만 보고 더 세밀하게 잡아낸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내가 원하는 디자인의 신발’이었던 수제화는 어느덧 ‘건강’까지 생각하게 됐다. 디자인적으로 선택의 폭이 넓은 것은 기성화(기계화)였지만 신발의 기능을 100% 다하지 못했고, 2000년대 초반 ‘발 건강’에 대해 미디어에서도 조명하면서 발이 편한 신발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그러면서 신발에 발을 맞추기보다 발에 신발을 맞추는 수제화가 다시 각광받았다.

“신발은 신고 다니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 돼요. 디자인, 멋도 중요하지만 발의 편안함도 중요하죠. 발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병원도 가보고 신발도 바꿔봐도 그 원인을 찾지 못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 수제화가 그 부분을 다 보완해줄 수 있어요.”

그의 ‘신발론’은 계속됐다.

“사람마다 발 생김새는 다 달라요. 볼이 넓은 사람, 엄지발가락이 살짝 휜 사람, 기장이 긴 사람 등 여러 유형이 있죠. 그런데 기성화는 240mm, 250mm 등의 크기만 정해져 있고 세부적이지는 않죠. 모든 사람을 다 맞추기는 힘들다는 겁니다. 기성화는 신발에 발을 맞추지만 수제화는 시작점이 달라요. 발에 신발을 맞추는 거죠.”

송림수제화 4층 작업실. 여기서 송림의 모든 신발이 만들어진다. 입구부터 작업실임을 알리는 본드냄새가 올라오고 벽면에는 고객들의 목형이 걸려있다. (사진=홍여정 기자)
송림수제화 4층 작업실. 여기서 송림의 모든 신발이 만들어진다. 입구부터 작업실임을 알리는 본드냄새가 올라오고 벽면에는 고객들의 목형이 걸려있다. (사진=홍여정 기자)

송림의 수제화는 100% 장인의 손을 거쳐 탄생하는 신발이다. 발의 편안함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가봉도 여러 차례 거친다. 지난 1960년대 없어졌던 가봉 작업은 임 대표가 약 12년 전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불편함을 줄어주기 위해. 가봉 작업은 만족할 때까지 진행된다.

그러나 편안함을 생각하면 자연히 디자인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어려운 일. 그러나 임 대표는 주관이 뚜렷하다.

“언젠가 80세 정도 된 어르신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이 사람아, 나도 여자야!’(웃음). 여성분들은 젊으나 나이 먹나 디자인을 포기 못하죠. 그래도 무조건 발이 먼저에요. 일단 발에 대해 정확한 자료를 수집한 뒤 그다음에 디자인을 잡아야죠. 발과 맞지도 않는 신발을 요구하시면 저는 그냥 손님을 돌려보냅니다. 어차피 불편하실 게 뻔한데 굳이 그런 신발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요.”

신발에 대한 철학이 확고한 임 대표. 인터뷰 내내 ‘내 발에 맞는 신발’을 통해 발 건강에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발 건강에 더 많이 신경 쓰면 좋겠어요. 몸이 아프면 약 먹고 나으려고 하는데 발은 조금 불편해도 그냥 넘겨버리죠. 신발도 잠깐 신고 마는 거라는 인식도 많아요. 그런데 발은 한번 망가지면 재활능력이 진짜 없어요. 망가졌던 만큼의 세월 동안 관리를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아이를 데리고 온 손님이 있으면 아이들부터 챙깁니다. 빨리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송림수제화 신발장에는 목형, 등산화, 스키화 등 옛 물품 등도 전시돼있다. (사진=홍여정 기자)
송림수제화 신발장에는 목형, 등산화, 스키화 등 옛 물품 등도 전시돼있다. (사진=홍여정 기자)
1961년 당시 송림수제화 팜플렛. 신발 한켤레 값은 그 당시 한 달 봉급보다 더 비쌌다. (사진=홍여정 기자)
1961년 당시 송림수제화 팜플렛. 신발 한켤레 값은 그 당시 한 달 봉급보다 더 비쌌다. (사진=홍여정 기자)

‘손님’이 곧 송림의 역사

송림수제화는 서울미래유산, 오래가게 등으로 지정되면서 80년의 역사를 이미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에는 국립민속박물관 ‘세대를 넘어-수제화 장인’ 전시회를 통해 송림수제화의 이야기를 관람객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임 대표는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모두 손님 덕분이라고 이야기한다.

“고객들이 스승이에요. 지금의 저를 만들어주셨죠. 사람마다 다양한 발을 가지고 있고 그 발이 100% 편안한 신발을 위해 계속 연구해요. 그런 경험들이 계속 쌓이면서 새로운 손님을 만날 때마다 응용이 되죠. 또 저희 손님들 입김이 좀 세요(웃음). 본인이 좋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추천을 해주시더군요.”

입소문을 타고 하나 둘 맺어진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한 번 맞춘 신발을 여러 번 제작하기도 하고, 단골손님이 손주들을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다. 미국, 일본 등 해외에서도 주문이 들어오고 직접 구입하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손님도 있다.

신발의 작은 재료 하나까지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임명형 대표. 그건 송림수제화의 1대 사장부터 이어온 정신이다. ‘송림수제화는 바보입니다’라는 경영 철학도 여기서 탄생했다. 이문을 남기려고 하지 않고 손님이 원하는 데로 가는 것. 그는 손님들에게 항상 이렇게 당부한다. ‘나를 괴롭히라고.’

“원하는 걸 계속해서 요구해달라는 뜻이에요. 신어보고 불편하면 또 이야기하고 이런 과정을 통해 정말 완벽한 신발을 만들 수 있거든요. 남들처럼 똑같이 만들어내는 건 저희 집과 맞지 않아요.”

이제 송림수제화는 50대인 임명형 대표에 이어 20대인 아들이 기술을 전수받고 가업을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 100년 가게를 넘어 더 먼 미래를 계획하고 있는 송림수제화. 그 신발에 대한 자부심과 확고한 철학이 계속되길 바란다.

홍여정 기자 duwjddi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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