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한 차림·간편식 선호…변화하는 소비 지형도
지치는 인간관계에 '자발적 아싸' 등장

[뉴스포스트=이해리 기자] 지난해 천만 관객을 동원한 ‘극한 직업’과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엑시트’ 등 특별히 전하는 메시지는 없지만 코믹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화가 흥행하고 있다. 자기개발서가 대다수를 차지했던 도서 베스트셀러도 현재는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등 편안한 삶을 이야기하는 도서들이 인기다.

서점에 진열돼 있는 베스트셀러 도서. (사진=이해리 기자)
서점에 진열돼 있는 베스트셀러 도서. (사진=이해리 기자)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최근 복잡하고 심오한 콘텐츠를 기피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귀차니즘(게으름을 피우는 현상이 고착화된 상태),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대충티콘(대충 만든 이모티콘) 등의 신조어는 적당하고 편안한 것을 즐기는 현대인의 상태를 나타낸다.

이 같은 사회 현상은 빅데이터 분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광고대행사 HS 애드가 트위터·네이버·블로그·커뮤니티·인스타그램 등 현대인이 주로 활용하는 SNS 게시물 168억 건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13년 약 40만 건이던 ‘편하다’의 SNS 언급량 추이는 2019년 110만 건에 육박하며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또한 2016년에 비해 2018년에는 ‘신나다’, ‘즐겁다’, ‘즐기다’ 등 활동적인 감성 대신 ‘행복하다’, ‘편하다’, ‘여유’ 등 차분한 감성의 순위가 높아졌다. 활발하고 다양한 활동을 SNS에 자랑하던 사람들은 점차 이러한 활동에 피로를 느끼고 온전히 자신의 상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HS애드는 빅데이터 인사이트 리포트에서 사회 전 분야에서 경쟁보다 안정,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편안함을 찾는 사람들을 컴포터리안(Comfortable+ian)으로 지칭했다. 이들은 남을 의식하기보다는 ’나‘에게 집중된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등의 행태를 보이며 새로운 소비지형을 만들고 있다. 

'지치다', '피곤하다'의 2013년~2019년 버즈량 추이. (사진=HS애드)
'지치다', '피곤하다'의 2013년~2019년 버즈량 추이. (사진=HS애드)

여행의 일상화

HS애드에 따르면 ‘호캉스’와 ‘한 달 살기’ 등의 버즈랑(특정 주제에 대한 언급량)은 2017년부터 2018년까지 1년 사이 각각 9배, 2배 증가했다. 호텔에서 휴가를 즐기는 ‘호캉스’가 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특별히 여행을 준비하지 않아도 간단히 여유를 즐기며 휴식을 취하는 여행의 일상화가 이뤄지고 있다.

또한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는 ‘제주도 한 달 살기’, ‘동남아 한 달 살기’ 등의 게시글도 인기를 끌며 컴포터리안은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과 재충전을 추구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가격이 늘더라도 조금 더 만족도 있고 편안한 여행을 하고 싶다는 고객들의 수요가 늘었다”면서 “호텔에서도 자체적으로 호캉스 상품을 선보이고, 여행사에서도 한 도시에 장기 체류하는 ‘반 달 살기’ 등 트렌드와 관련된 다양한 상품이 나오고 있다”라고 말했다.

6살 자녀를 둔 직장인 박 모(41) 씨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호캉스를 즐긴다”라며 “호텔은 가는 이유는 편해서다”라고 말했다. 아이들을 위한 키즈 프로그램이 다양해 특별한 외부 일정 없이 호텔에만 머물러도 액티비한 휴가를 즐길 수 있다는 것. 이처럼 바쁜 휴가 일정을 소화한 후 후유증을 겪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호캉스족은 더 늘 것으로 보인다.

매달 한 번씩 호캉스를 즐기는 직장인 박 씨.
매달 한 번씩 호캉스를 즐기는 직장인 박 모씨. (사진=뉴스포스트)

단순, 간편함을 추구하는 소비

패션에서도 운동화와 단화, 백팩 에코백 등 편안함을 추구하는 의류가 선호되고 있다. HS 애드가 소셜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 2009년부터 ‘편한 차림’의 버즈량 ‘격식 있는 차림’의 언급량을 앞지르기 시작해 지난 1월을 기준으로 3.3배 수준으로 늘어났다.

하이힐의 경우는 부정적인 언급이 증가했고, 격식을 차리지 않는 맨투맨 패션이나 백화점 문화센터 갈 때 입는 옷이라는 뜻의 ‘문센 룩’, 트레이닝복 등이 많이 언급됐다. 

식음료 부분에서는 시간을 절약하고 빠르게 준비할 수 있는 HMR(가정간편식)에 대한 버즈량이 높아지고 있다. HMR의 버즈량은 2017년부터 급증하기 시작해 2018년 말부터는 월 8,000건을 넘어서고 있다. 

실제로 국내 HMR 시장규모는 2017년 2조 7,421억 원으로 3년 사이 63% 성장했으며, 2018년에는 3조 2,000억 원을 기록했다. 2022년에는 5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와 함께 레시피를 보고 조리만 하면 되는 밀키트 시장 역시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자발적 아싸’ 등장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비 트렌드를 형성한 컴포터리안은 사회적으로는 어떠한 특징을 보이고 있을까. 

HS애드가 2018년 1월부터 2019년 2월까지 인간관계와 관련된 주요 SNS 키워드를 분석한 결과 ‘힘들다’, ‘어렵다’, ‘상처’, ‘스트레스’ 등 부정적인 내용의 비중이 높았다. 

HS애드는 “현대인은 노력하면 할수록 불편해지는 인간관계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서 “안 그래도 지치는 일상 속에서 억지로 관계를 유지하며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 힘들다고 느낀다”라고 분석했다. 

인간관계와 관련된 주요 SNS 키워드. (사진=HS애드)
인간관계와 관련된 주요 SNS 키워드. (사진=HS애드)

또한 현대인의 바쁜 삶에 집에서의 휴식이 필수적 요소로 여겨지면서 집돌이와 집순이에 대한 버즈량과 긍정적인 언급도 증가했다. 이들의 소비와 취미활동도 변화됐다. 과거 수면바지 차림으로 영화나 드라마 감상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면, 최근에는 생화와 조명 등을 구매하고 홈 카페와 홈스타일링을 연출하는 등 능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호화스러운 것보다는 오히려 평범해 보이지만 실제적 이익이 있는 것들을 선호하는 문화”라면서 “‘편안함’이라는 단어는 감정적인 부분에 호소하는데, 감정적인 편안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거꾸로 현대인들이 지쳐있다고 볼 수 있다”라고 분석했다. 

이어 “경쟁도 치열하고 경제적으로 힘들어 지쳐있기 때문에 정서적인 위로를 받는 편안함을 추구한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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