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대 장인 “일본도 ‘삼마이강’ 실제로는 엉망”
- 대학 진학 필요 없다 생각...이대로 칼만 만들었으면
- 이상선 장인 “칼로 돈 벌지 않을 거면 가르쳐 준다고 해”
- 일본도는 일본 정부에서 수매...우리나라 정부도 노력해야

평생직장이란 단어는 곰팡내 나는 책을 뒤적여야 찾는 빛바랜 훈장 닦는 소리가 된 지 오래다. 직장이 아닌 직업을 말하는 시대. 본지는 일찍이 자신의 업을 찾은 청년장인들을 만나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뉴스포스트=이상진 기자] 인류史는 칼의 바이오그라피다. 프로메테우스의 업적은 칼 가마에 불이 오르지 않았다면 별무소용이었을 것이다. 지나간 50만 년 인류의 이야기가 담긴 칼 자취는 문명의 흥망성쇠를 엿보는 열쇠구멍이다.

칼은 펜보다 강하다. 야만은 언제나 문명을 이겼다. 인문학을 바탕으로 사회 체계를 꾸렸던 민족은 날랜 칼을 앞세워 밀고 들어오는 타민족에 굴종해야만 했다. 기원전 1500년경 아리아인들의 침입에 밀려난 인더스 문명 창시자 드라비다족이 그랬고, 4세기 말 게르만족 침입에 로마 제국도 짐을 싸야 했다.

가장 극적인 칼의 역사는 우리 땅 조선에서 이뤄졌다. 인의예지를 천명으로 받든 조선 유학자들은 수준 높은 형이상학적 담론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들은 주리론이냐 주기론이냐, 기발설이냐 이발설이냐는 사단칠정논쟁으로 말(言) 탑을 쌓아올렸고, 덕분에 조선은 다가오는 말(馬) 먼지를 보지 못했다.

조선은 일본이 침략한 1592년 임진왜란과 청이 침략한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을 차례로 맞았고, 1910년 다시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왕조의 문을 닫아야 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조선이 청년 유학자들을 금지옥엽으로 키웠던 만큼 무인들을 양성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이 상상에 불을 지피는 사람이 있다. <뉴스포스트>가 14일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에 위치한 ‘고려왕검연구소’에서 만난 이승대(37) 청년장인은 “조선의 칼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칼”이라고 강조했다.

이승대 청년장인은 아버지 이상선(65) 야철대장과 함께 칼 가마에 불을 올리고 있다. 양녕대군 13대손인 아버지는 49년째, 14대손인 아들은 19년째다. 본지는 이들 부자를 만나 우리 전통 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상선 야철대장(왼쪽)과 이승대 청년장인(오른쪽). (사진=이상진 기자)
이상선 야철대장(왼쪽)과 이승대 청년장인(오른쪽). (사진=이상진 기자)

▶ 우리나라 전통 칼을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이상선 장인(이하 父): “16살 때였다. 영친왕 제사 때 본 사인검(四寅劍)을 보고 결심했다. 다른 큰 이유는 없었다. 사인검이 있었고 그걸 평생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승대 청년장인(이하 子): “평생 아버지가 대장간에서 칼을 만드는 것을 보고 자랐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칼을 두려워한다. 예리하고 날쌘 몸통을 보면 위협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하지만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칼을 보고 자라 그런지 전혀 칼에 대한 거리낌이 없었다. 본격적으로 아버지를 도운 것은 지난 2000년 인천에서 이곳 문경으로 아버지가 대장간을 옮기면서부터였다. 당시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으니까. 18살 때부터였다. 나는 대학 진학을 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야 칼을 가르쳐 주지?’라는 고민을 했는데 아무 데도 없다는 결론에서였다.”

父: “의사 아들 의사 되고 검사 아들 검사된다지 않나? 아들이 보고 큰 게 아비가 칼 만드는 것이었으니 자연스럽게 했던 것 같다. 나는 하지 말라 했다. 힘들뿐더러 사양길이다. 칼을 만들어 먹고사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 전통 칼을 만드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나?

父: “누가 전통 칼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면 나는 가장 먼저 부자냐고 묻는다. 당신이 칼을 팔아서 먹고살지 않는다고 하면 내가 가르쳐주겠다고. 하지만 칼을 팔아 돈 벌어서 식구들 먹여 살리려고 한다면 하지 말라 말해준다. 그만큼 전통 칼은 수요가 적다. 또 ‘총포·도검·화약류 등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에 영향을 받는다. 일반인이 칼을 사기 위해선 관할 경찰서에서 소지 허가증을 받아야 하는데, 이 과정이 까다로워 계약금을 돌려주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칼은 정해진 자리에서 벗어나 파는 것이 금지돼 있다. 아무 데서나 돗자리 깔고 팔 수 없는 것이다.”

▶ 이상선 장인은 양녕대군 13대손, 이승대 장인은 14대손으로 알고 있다. 왕손이 칼을 만드는 데 문중의 반대는 없었나?

子: “나는 문중과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아버지가 칼을 만들기로 결심한 이후부터 문중과 친하지 않아 교류가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아버지가 고향인 충남 예산을 떠난 시간이 길다.”

父: “이제 그쪽에는 잘 가지 않는다. 지금이 양반이나 상놈을 따질 게 아닌 시대인데도 당시에 칼을 만든다고 하니 그런 시선이 따가웠다.”

연마하기 전 쇠(위쪽)과 불로 달궈진 가마에 연마한 후의 쇠(아래 쪽). (사진=이상진 기자)
연마하기 전 쇠(위쪽)과 불로 달궈진 가마에 연마한 후의 쇠(아래 쪽). (사진=이상진 기자)

▶ 전통 칼을 만들기 위해서 정부의 허가나 기능전수자가 돼야 하는지.

子: “경찰청에 양식이 있다. 대장간의 규모가 어느 정도 돼야 하고 철장이 있어야 하고. 필수적인 연장도 구비해야 하는 등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직접 와서 실사도 하고. 하지만 준비만 모두 갖추고 허가를 신청하면 허가받는 것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허가제인데 신고제처럼 운영되는 형태다. 아버지는 지난 2007년 고용노동부로부터 인가받은 국내 최초 야철대장이다. 하지만 야철대장이 아니어도 전통 칼 대장간을 열 수는 있다.”

▶ ‘고려왕검연구소’라는 이름인데, 사인검과 사진검 등 주로 조선시대 칼을 만들다고 알고 있다. 만드는 칼의 시대를 구분한다면.

父: “칼을 만드는 사람들이 고려 시대의 칼은 손을 대지 않으려고 한다. 정확한 문헌으로 칼을 고증해야 하는데 고려 시대는 남아 있는 문헌이 없다. 조선시대와 신라는 칼에 대한 문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주로 전통 칼은 조선시대와 신라시대 칼을 복원해 만들고 있다. 칼을 만드는 입장에서 고증이 안 되는 것은 손을 대지 않는 게 좋다. 앞으로도 고려 시대 칼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고려왕검연구소’라는 이름은 문중의 의견이 컸다. 문중과 많은 교류는 하지 않았지만 문중의 의견을 존중해 따랐다.”

子: “고려 시대의 경우 박물관에 일부 남아있는 칼날이 전부다. 쇠 성분을 분석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조선시대 칼에 방점을 찍고 만들고 있다. 또 칼이 화려해지기 시작했을 때는 조선시대부터다. 조선시대 기법은 세계 어디를 가져다 놓아도 뒤지지 않는 우수한 기법이다. 옛날 도구도 시원치 않았을 시대에 어떻게 이런 세계에서 손꼽히는 칼을 만들었는지 그 시절 선배 장인들이 존경스럽다. 우리나라 전통기법이 소실된 것이 아쉽다.”

▶ 우리나라 전통 칼 제작의 맥이 끊기고 전통기법이 소실된 까닭이 궁금하다.

父: “일제강점기가 컸다. 일제가 정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 때문이다. 조선 사람은 칼이고 총이고 화약이고 만들지도 말고 갖고 있지도 말라는 법이다. 당연하다. 나라 뺏긴 조선 사람이 칼이나 총 갖고 있어봐야 저희들이 위협을 받으니까. 거기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다. 정말 먹고 살기 어려운 보릿고개인데 누가 맥이 끊긴 전통 칼을 만들고 있겠나.”

子: “도자기나 한복 등 이런 관련 문헌들과 유물들은 많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칼이나 총, 포에 관련된 문헌들은 거의 사라졌다. 당연한 결과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는데, 내가 이 나라를 침략했는데, 이 나라 무기 만드는 기술을 그대로 두겠느냐? 이런 개념이다.”

▶ 도와 검, 창 등 다양한 무기를 만들 것 같은데, 분류가 어떻게 되나?

子: “종류로 따지기에는 애매하다. 전통 칼도 만들지만 주문 제작 방식에 따라 만드는 것도 있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만드는 칼도 있다. 이 모든 것의 개수를 따지자면 거의 무한대라고 보면 된다. 특히 개인 맞춤형으로 칼 모양을 잡아주기도 한다. 검도하는 사람들이 주문하는 칼의 경우 체형에 따라 휘어지는 곡선의 모양과 길이 등을 모두 달리 만든다.”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만드는 사인검. (사진=이상진 기자)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만드는 사인검. (사진=이상진 기자)

▶ 대표적으로 만드는 전통 칼을 꼽는다면?

子: “조선시대 칼인 사인검(四寅劍)과 사진검(四辰劍)이 있다. 두 검 모두 만드는 때가 정해져 있다. 사인검의 경우 호랑이(寅)가 네 번 겹치는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만든다. 사진검은 용(辰)이 네 번 겹치는 진년(辰年), 진월(辰月), 진일(辰日), 진시(辰時)에 만들고. 결국 12간지 가운데 돌아오는 해에만 만드니 12년에 한 번 만드는 꼴이다.”

▶ 사인검과 사진검의 의미에 대해 말한다면.

父: “사인검은 고려 후기 때부터 존재했지만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에 오면서 임금이 되면 사인검이라고 하는 칼을 제작해 소지했다. 호랑이의 힘으로 삿된 귀신을 물리치고 왕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사진검의 경우는 문헌에서 많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인검과 마찬가지로 왕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제작했다.”

▶ 사인검과 사진검 등의 제작 기간은 얼마나 걸리나? 가격도 궁금하다.

子: “담금질하는 기간은 12년에 한 번으로 정해져 있다. 그 담금질이 끝나 칼날만 있다고 했을 때 칼질부터 상감 등 과정에 짧게는 4개월에서 길게는 1년 정도가 걸린다. 사인검과 사진검 등 전통 칼 중에서도 보검에 속하는 칼을 제작할 때는 일부러 작업 기간을 넉넉하게 잡는다. 그래야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 가격은 1000만 원~1500만 원 선이다. 검도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반 진검이 100만 원~150만 원 선인데 비해 10배 정도 높은 가격이다.”

▶ 제작한 칼이 영화나 드라마의 소품으로도 많이 사용될 것 같다. 대표작들을 소개한다면.

子: “대표작은 ‘왕의 남자’다. ‘물괴’라는 영화에도 우리가 만든 칼이 출연했고 ‘전설의 고향’ 시리즈에도 나갔다. 방송국이나 영화제작사와는 많은 교류가 없다. 여기서 칼을 빌려 가는 소품 담당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칼을 아낀다. 하지만 출연자 한 명 한 명에게 넘어가면 정말 그냥 막 쓰는 소품이 돼 버린다. 칼이 굉장히 많이 훼손돼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 거래가 조심스럽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주방용 칼에 도금을 해 제작했다. (사진=이상진 기자)
우리나라에서 쓰는 주방용 칼에 도금을 해 제작했다. (사진=이상진 기자)

▶ 우리나라 전통 칼이 중국과 일본 등 다른 나라들에 비해 특별한 점을 꼽는다면.

子: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은 칼 외형 자체가 다르다. 주방 칼을 예를 들면 중국은 중식도라고 하는 넓적한 칼을 많이 쓴다. 우리나라는 옛날 시장에 가면 생면 머리 자르던 칼. 일본 칼은 생선을 많이 다뤘기 때문에 날렵하고 예리하다. 일본 칼은 백제에서 넘어갔을 확률이 높다. 형태는 거의 백제시대 것과 비슷한 까닭이다. 조선시대 때 만들었던 칼은 상감 기법을 사용한 장식이 많이 들어가 있다. 일본 칼은 상감 기법 장식이 잘 들어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또 일본 칼은 계속 침략을 생각했던 나라답게 칼날을 예리하게 갈아서 썼다.”

▶ 일본의 전통 칼은 제작 기법 등이 잘 보존돼 내려오고 있다. 우리나라와 어떤 차이가 있나?

子: “일본은 일본도를 정부에서 수매를 한다. 일본도가 보통 우리나라 돈으로 1000만 원 이상 가는 고가다. 덕분에 일본에서 칼 만드는 장인들은 정부 사업으로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 그래서 칼을 제작하는 것도 세분화돼 있다. 철광석 녹여서 쇠를 만드는 사람, 쇠를 달궈서 접는 사람, 조각하는 사람, 성형하는 사람, 연마하는 사람, 칼날 가는 사람 등등. 이들이 전부 각 분야에서 장인으로 인정받는다. 일본 정부는 옛날부터 일본도를 세계적으로 홍보했고, 일본도는 서양의 로망이 됐다.”

▶ 일본도는 무른 쇠 안에 단단한 쇠를 넣는 시스템이라고 알고 있는데. 왜 그렇게 만드는 것인가?

子: “그런 일본도 특유의 시스템을 ‘삼마이강’이라고 한다. 그런데 얼마 전 미국에서 일본 장인들이 만든 칼을 잘라 단면을 살펴봤더니 일본 장인들이 주장하는 삼마이강 시스템이 아니라 엉망이었다. 분명히 무른 쇠와 단단한 쇠가 차이는 나는데, 단단한 쇠가 무른 쇠 바깥에 붙어있다거나 너무 소량 들어가 있다거나 이런 현상들이 많았다. 그 결과만 놓고 보면 ‘삼마이강’은 이론적으로는 좋은 시스템이지만 실제 구현이 잘 안됐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열처리나 쇠를 만드는 기술이 좋아 굳이 삼마이강 같은 시스템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반면에 일본은 단단한 쇠가 귀했고.”

이승대 장인은 전통 칼을 지키기 위해선 정부의 수매나 홍보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사진=이상진 기자)
이승대 장인은 전통 칼을 지키기 위해선 정부의 수매나 홍보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사진=이상진 기자)

▶ 전통 칼을 지키기 위한 우리나라 정부 정책에 대해 제언한다면.

子: “우리나라 전통 칼 만드는 사람들은 먹고 살 길이 닫혀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칼 만들겠다는 청년들도 없고. 우리나라도 정부에서 전통 칼을 수매를 하든 세계적으로 홍보를 하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라에서 약간의 보조를 해주거나 정말 조금만 힘을 실어준다면 결과물을 세계 어디를 내놔도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전통 칼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전통을 계승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고민을 할 것이다.”

▶ 전통 칼을 만드는 청년장인으로서 최종적인 목표는 뭔가.

子: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칼을 만들면서 경제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힘들어하시는 것을 지켜봤다. 아버지나 나처럼 힘든 길을 택한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대학 졸업해 안정적인 회사에 들어가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칼 만드는 일 이외에는 다른 일을 꿈꿔본 적도 없다. 잘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냥 뭐 계속 이대로만 만들고 싶은 칼 만들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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