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홍여정 기자] 서울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 앞. 붉은 벽돌로 쌓아진 아치형 입구를 지나 낡은 나무 계단을 내려가면 1980년대 음악다방이 모습을 드러낸다. 은은한 백열 조명과 붉은 벽돌, 낡은 갈색 소파, 설탕과 프림통, 클래식 음악, 옛날 공중전화, 벽면을 꽉 채운 낙서들까지. 최신식으로 변화한 지상 가게와는 다르게 시간이 멈춘 듯한 이 공간은 ‘중대 다방’, ‘중대생 아지트’라고 불리는 ‘터방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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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방내'의 내부 모습. 벽돌로 칸막이를 만들어 제법 아늑하다. (사진=홍여정 기자)

‘터방내’는 1983년 중앙대학교 앞 1호 원두커피 전문점으로 오픈했다. 음악다방이 우후죽순 생겼다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커피전문점이 들어서는 상황에서도 터방내만은 중대 앞 골목을 지켰다. 보수 작업 외에 리모델링은 전혀 하지 않아 80년대 그대로의 느낌을 경험할 수 있는 곳. 그래서일까. 당시 청춘들은 추억을 곱씹기 위해, 현재의 청춘들은 그 당시의 감성을 느끼기 위해 터방내로 모인다.

좋은 커피를 만들다

1992년부터 ‘터방내’를 운영하고 있는 조국현 사장은 가게 인수 당시 커피라곤 믹스커피밖에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인수 이후 기존에 있던 아르바이트생에게 가게 운영을 맡기고 커피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 당시 커피에 대한 전문 서적은 우리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었어요. 도서관에서도 커피 관련 자료는 구할 수 없었죠. 물론 지금처럼 바리스타 협회나 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죠.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에 우리 가게에 방문하는 손님 중에 일본에 대해 잘 아는 분이 한 명 있었어요. 그분이 한 책을 소개해줬고 제가 일본 지인을 통해 구하게 됐죠. 시중에는 절판됐던 책이라 출판사를 통해서 겨우 받아볼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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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현 사장이 인터뷰 중간 공부하던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홍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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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건너온 커피 관련 서적. 메모가 빼곡하다. (사진=홍여정 기자)

인터뷰를 중간 터방내의 시그니처 ‘브랜드 커피’를 맛볼 수 있었다. 6가지 원두를 섞어서 만든 블렌딩 커피다. 이 커피는 손님들에게 ‘사이펀 커피’로 불리기도 한다. 터방내의 모든 커피는 사이폰이라는 진공식 커피 추출 기구로 만들어진다. 사이폰 커피는 하단 플라스크에 물을 넣고 알코올 램프에 불을 붙이면 압력에 의해 물이 위로 빨려 올라간다. 위에 있던 커피 가루와 물이 만나 일정 시간 이후 알코올 램프를 끄면 커피가 추출된다. 특히 스트레이트 커피(원두 한 종류만 추출한 커피)는 2잔 이상 주문하면 직접 테이블에서 커피 내리는 모습도 관찰할 수 있어서 인기가 좋다.

볼거리도 있지만 커피 맛도 일품이다. 조 사장은 그 비결에 ‘로스팅’의 중요성을 말한다. 한 회사와 20년 이상 거래하며 품질과 맛을 유지하기 위해 꼼꼼하게 체크한다.

“로스팅이 간단한 게 아니에요. 온도, 습도에도 민감해 되도록 비 오는 날에는 안 볶아요. 로스팅 기계 가동할 때 온도 올라오거나 내려가는 처음과 끝 말고 꼭 중간에 넣게 해요. 미세한 차이인데도 저는 느껴지니까 그런 게 보이면 바로 돌려보냅니다.”

터방내의 커피는 약배전 방식으로 로스팅 한다. 은은하게 볶으며 맛까지 잡아야 하기 때문에 까다롭지만 조 사장은 그 방식을 고집한다. 손님에게 좋은 커피를 대접해야 한다는 조 사장의 철칙이 있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똥고집일 수도 있어요. 예전에 다이어트 커피 한창 유행할 때도 손님들이 찾으시니까 좀 알아봤는데 그게 카페인을 제거하려면 몸에 안 좋은 약품이 들어가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안 했고요. 3-4년 전 버블티가 유행할 때도 발암 물질 이야기가 있어서 직접 대만 회사에 연락을 취했더니 답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취급 안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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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희 사장이 사이폰 커피를 만들고 있다. (사진=홍여정 기자)

옛 다방에 몰려드는 손님들

터방내가 중앙대 앞에 자리한지 37년. 빛바랜 사진 속 풍경일 것 만 같은 음악다방은 현재 젊은이들에게 ‘힙’한 곳으로 입소문이 났다. 뉴트로 열풍 속 7080 복고 분위기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SNS 상에서는 흑석동 투어 시 가야 할 필수 코스로 ‘터방내’를 꼽기도 한다. ‘나 여기 갔다’라고 인증하는 사진들도 수두룩하다.

“사실 이곳이 그렇게 유명한 곳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최근 오시는 손님들 이야기 들어보면 인터넷에서 ‘반드시 들려야 하는 집’이라고 해서 왔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작은 딸도 이제 대학생인데 엄마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이야기를 안 했나 봐요. 그러다 친구들하고 이 동네서 약속을 잡았는데 하필 여기서 모이게 된 거죠. 친구들이 여기 유명하다고 가자고 했나 보더라고요. 딸이 아무 소리 안 하고 가게 와서 주인한테 엄마라고 하니까 그 친구들이 다들 놀라던데요(웃음).”

한곳에 오래 있다 보니 중앙대 학생들과 교수 중에서도 단골이 많다. 3월 초 신학기가 되면 신입생들은 교수님, 선배들과 함께 방문하는 일이 많다.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학생들이 나이가 들어 자녀와 함께 온 경우도 있었다. 중대 교수 퇴임한 7명이 모인 그룹의 이름은 ‘터방내’로 지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중앙대 학생들은 터방내에서 커피를 마시며 낙서 한 번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추억은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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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 안에도 빼곡한 낙서들 (사진=홍여정 기자)

시간이 멈춰버린 곳

조 사장이 손님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시간이 멈춰버린 곳’이라는 말이다. 사장 내외가 계속해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고, 메뉴, 인테리어, 가격 등 변한 것이 없다. 물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곳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에요. 소파나 홀에 있는 의자도 바꿔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다 단종된 제품이라 찾기 힘들어요. 전체적인 분위기라는 게 하나만 색이 바뀌어도 달라지거든요. 이 백열전구도 없어질까 봐 수백 개 사놨어요. 나중 되면 LED로 바꿔야 하는데 느낌이 많이 달라질 것 같아 걱정이죠.”

또한 터방내 커피 가격은 3000~4000원 선. 타 커피 전문점 가격보다 월등히 저렴하다. 물가와 인건비가 올랐지만 조 사장은 가격을 올릴 엄두를 못 낸다. 매일 오시는 단골손님들 얼굴이 계속 떠오르기 때문에 약 10년째 동결이다. 벽면에 빼곡히 채워진 낙서들도 그대로다. 몇 번 도배를 해도 한번 낙서가 시작되면 일주일을 넘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그 낙서를 찾는 손님들도 있어 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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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림과 설탕을 담아놓은 곳에도 낙서가 있다. (사진=홍여정 기자)

80년대만 하더라도 중대 앞까지 이어진 길목에는 음악다방이 빼곡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하나둘씩 가게들은 없어졌고 현재 프랜차이즈 커피들이 그 자리를 메꾸고 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시대에 37년을 굳건히 지켰던 터방내는 2019년 최초의 것을 지금까지 유지한 공을 인정받아 서울시 오래가게로 선정됐다. 오래된 가게지만 더 오래오래 사람들이 방문하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오래 할 수 있을지 묻자 조 사장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죠”라며 웃는다.

“지금은 내가 여기서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이 되니까 가능하지만 개발이 돼서 임대료가 올라간다든지 하면 어렵겠죠. 하지만 내가 운영하는 한 터방내의 이 시스템과 분위기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겁니다. 선배들이 후배들 데려오면서 커피 한잔 사주고... 그렇게 연결이 되는 집인데 다 바꿔버리면 우리만의 특별함은 없어지겠죠.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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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에 비치된 공중전화. 현재도 사용 가능하다. (사진=홍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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