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홍여정 기자]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누구나 하나쯤 있을 법한 추억들이 있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 부리나케 등교를 준비하고, 학교에서 쉬는 시간 친구들과 한 책상에 모여앉아 수다를 떨고, 수학여행을 가서 단체사진도 찍는 것 말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간 탓에 가슴 깊이 묻어두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다른 형제가 공부를 해야 해서 등의 이유로 학업이 필요한 시기 살림을 돕거나 일터로 나가야 했던 어르신들이 그랬다.

그 시절 어릴 적 소년소녀는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됐지만 남편과 아내 또 부모의 삶을 살아내느라 그 꿈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렇게 반 백 살의 머리 희끗희끗한 노인이 됐다.

나이는 먹었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에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계신 어르신들이 있다. 알아가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이들. ‘만학도’라고 불리는 어르신 학생들이다. 지난 24일 <뉴스포스트>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위치한 신갈야간학교 수업 현장을 찾았다.

(사진=홍여정 기자)
(사진=홍여정 기자)

열정가득한 수업시간

“차렷, 경례!” 인사와 함께 중학교 3학년 과정반 국어 수업이 시작됐다. 남자 2명, 여자 11명으로 구성된 이 반은 신갈야간학교에서 가장 고학년 반이다. 수업은 월, 화, 목 주 3일 4시간씩 진행된다. 배우는 과목은 국어, 영어, 사회, 수학, 과학 등이다.

이 반은 1학년 과정부터 3년간 이어져오기 때문에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는 아주 끈끈하다. 서로 오라버니, 언니 등의 호칭으로 부르고 교사는 이름 끝에 ‘님’을 붙여 호명한다. 누군가의 엄마, 아빠로 살았을 그들에게 그 순간만큼은 ‘나’라는 존재로 불리는 경험을 하게끔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숙제 검사로 시작한 수업. 여느 교실과 다르지 않는 풍경이 연출된다. 숙제를 해왔다고 말하는 학생, 못해왔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학생, 몰랐다고 말하는 학생. 다들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어르신 학생들의 모습이다.

오늘의 수업은 ‘내용을 판단하며 듣기’ 시간. 사실과 의견에 대해 설명하며 최근 핫이슈인 조국 장관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정치적인 문제는 많이 들어보고 많은 근거를 접하다 보면 판단력이 생길 거라는 선생님의 설명이 있자 어르신 학생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거린다.

(사진=홍여정 기자)
열심히 교과서에 필기하고 있는 한 어르신. (사진=홍여정 기자)

교과서에 있는 예문을 읽는 시간. 교사가 ‘최학원님’을 지목했다. 거침없이 예문을 읽어 내려가는데 ‘새 천년’을 ‘사천 년’이라고 발음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러자 학우들이 우렁차게 ‘새 천년’ 이라고 고쳐준다. 그러면서 힘내라는 듯 문장이 끝날 때마다 추임새도 넣어준다. 마지막에는 최학원님 말고 모든 학생들이 함께 읽는 것으로 끝이 났다. 최학원님을 따라 작은 목소리로 다 따라 읽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반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바로 ‘고등학교 반 신설’이다. 이 중학교 3학년 반의 학생들은 내년 졸업을 하면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 신갈야간학교에는 고등학교 과정을 배울 공간이 없기 때문. 학습에 대한 의지가 크기 때문에 여기서 멈출 수 없고 될 수만 있다면 이곳에서 학우들과 함께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한다.

어느 순간 이 이야기가 나오자 학생들이 너도나도 자신들의 의견을 말한다. 교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그러면 건의문을 한번 써보자고 제안하며 수업과 연관 지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기술을 보여줬다.

개인 일정이 있는 몇몇의 어르신을 빼고 한글 맞춤법에 대한 보충수업이 30분간 진행됐다. 수업은 1시 정각에 딱 맞춰 끝이 났다.

계속 공부하고 싶다는 학생들

평생에 이루지 못할 것 같은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어떤 기분일까. 배움의 한이 마음속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던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최학원 씨(78세)는 2016년 말, 초등학교 검정고시 시험을 5~6개월 준비하고 합격해서 중학교반에 들어왔다. 공부를 못하고 가사를 하다가 평생을 보냈다. 직장을 43년 다니고 퇴직한 뒤 배움의 열망이 더 커졌다. 그런 와중에 신갈야간학교를 알게 됐고, 입학해서 지금 3년째 다니고 있다.

최 씨는 올해 9월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진행한 시화전에서 배움과 공부를 식량에 비교한 작품으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작년 추석에는 KBS 골든벨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학교에서 하는 활동은 되도록 참가하는 편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 좀 벅찰 때도 있지만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며 “배움으로 인해 내 마음이 내 나이 같지 않고 많이 젊어진 기분으로 살고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수업 중간 일정이 있어 가셔야 했던 최학원 어르신. 간단히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홍여정 기자)
수업 중간 일정이 있어 가셔야 했던 최학원 어르신. 간단히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홍여정 기자)

이 반의 반장은 주덕순 씨(64세)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에 합창단 반장, 학교 총회장까지 맡고 있다. 학업도 봉사도 열심히 하다 보니 재미가 붙고 삶에 활력이 생긴다고 말한다.

결혼하며 남편하고 대화를 할 때 틀리면 어떡하지라는 긴장감에 속을 끓였고, 자녀 학교 입학 후 숙제를 제대로 봐주지 못했던 게 한으로 남았다. 그래서 수도학원을 다니면서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했고 세월이 지나 신갈야간학교 중학교 과정으로 입학하게 됐다.

그는 “이곳은 저에게 너무 감사한 공간이다. 수업 들으려고 아침에 새벽 4~5시에 일어나서 밥하고 청소 다 해놓고 나온다. 열심히 사니까 재밌다”라며 “앞으로 공부를 계속하겠지만 이 공간에서 할 수 있는 방안이 생겼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한영희 씨(64세)도 3년 전부터 중학교 과정을 함께 해왔다. 시골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결혼하고 도시로 나왔다. 배움의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삶이 여유롭지 않아 시기를 놓쳤다. 그러던 중 이 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한 씨는 학교를 다니며 옛날에 경험하지 못한 학창시절을 지내고 있는 느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어렸을 적에 초등학교는 졸업했고 그 이후에는 시골에서 일만 하고 살다 보니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했는데 여기 와서 친구들과 활동하고 여행도 가고 하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재밌다”라며 “앞으로도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꼭 마련됐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한영희 씨의 교과서와 노트. 필체가 정갈하다. (사진=홍여정 기자)
한영희 씨의 교과서와 노트. 필체가 정갈하다. (사진=홍여정 기자)

3년째 이 반의 국어 수업을 담당하고 있는 홍인애 씨(58세)는 “이곳에 계신 분들은 배움의 기쁨도 크시지만 예전에 못했던 학교생활을 경험하는 것에 대해 더 큰 행복감을 느끼고 계신다”라며 “수업하는 동안 그런 에너지가 저에게도 전달된다. 너무 보람있다”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이곳은 단순히 학문을 배우는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이 바빠 잃어버렸던 학창시절의 추억을 되찾아주는 곳. 부디 이들이 꾸준히 공부할 수 있는 교실이 하루빨리 생기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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