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청각장애인 1만 추산...법적 보호 못 받아
의사소통·이동 제약 심각...헬렌켈러법 조속 촉구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헬렌 켈러는 시력과 청력을 잃었지만, 사회활동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이에게 희망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헬렌 켈러가 그런 삶을 살기까지는 일평생 그의 곁에서 눈과 귀와 입이 돼준 설리번 선생이 있었습니다. 한국에도 1만여 명의 헬렌 켈러가 있습니다. 한국의 시청각장애인들은 그들에게 ‘설리번’이 돼 줄 헬렌켈러법 통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화통역사 고경희 씨(좌)와 시청각장애인 당사자 손창환 씨(우)가 촉수화로 대화하고 있다. 헬렌켈러센터는 시청각장애인들의 주요 의사소통 수단인 촉수화 교육을 진행할 방침이다. (사진=밀알복지재단 제공)
수화통역사 고경희 씨(좌)와 시청각장애인 당사자 손창환 씨(우)가 촉수화로 대화하고 있다. 헬렌켈러센터는 시청각장애인들의 주요 의사소통 수단인 촉수화 교육을 진행할 방침이다. (사진=밀알복지재단 제공)

생후 19개월부터 시력과 청력을 상실한 헬렌 켈러는 가족들과도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7살 무렵 앤 맨스필드 설리번 선생을 만난 헬렌 켈러는 선생의 지속적인 노력 끝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미국 사회의 노동 문제, 인권 문제 등에 목소리를 높였다. 헬렌 켈러는 설리번 선생과 같은 조력자의 도움과 자신의 불굴 의지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인들의 뇌리에 위대한 사회운동가로 남아있다.

우리나라에도 헬렌 켈러와 같이 시각과 청각 능력을 상실한 이른바 시청각장애인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미국 사회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사회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가는 시청각장애인들을 보기가 쉽지 않다. 철저히 비장애인 중심으로 운영되는 한국 사회에서 시각과 청각 장애를 동시에 겪는 중복 장애인들이 사회 활동을 하기란 매우 어렵다.

다행히 지난 4월 사회복지법인 밀알복지재단에서 ‘헬렌켈러센터(이하 ‘센터’)’를 개설해 이들의 자활을 돕고 있다. 센터는 전국의 시청각장애인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이들에게 맞춤형 교육 및 서비스를 제공할 방침이다. 또 헬렌 켈러의 설리번 선생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봉사자들을 발굴·육성한다. 그 밖에도 비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인식 개선 교육을 하고, 시청각장애인 자조 단체 지원을 한다.

본지는 지난달 30일 한국 시청각장애인 실태와 센터 활동 등에 대해 들어보기 위해 센터에 재직 중인 홍유미 팀장과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홍 팀장은 센터에서 시청각장애인 서비스 지원을 담당한다. 그는 “센터는 시청각장애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이들의 완전한 사회통합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사단법인 밀알복지재단에서 시청각장애인들의 자활을 위한 헬렌켈러센터를 개설했다. (사진=밀알복지재단 제공)
지난 4월 사회복지법인 밀알복지재단에서 시청각장애인들의 자활을 위한 헬렌켈러센터를 개설했다. (사진=밀알복지재단 제공)

시청각장애인, 몇 명인지도 알 수 없다

홍 팀장에 따르면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시청각장애인 정확한 인원수 조차도 알 수 없다. 그는 “시청각장애인은 현행 장애인복지법상 별도의 장애 유형으로 분류돼있지 않다”며 “실태조사조차 이뤄진 적이 없어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명확한 법률 용어조차 정의되지 않아 한국에 시청각장애인이 어디에 얼마나 거주하는지 통계로도 잡히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다만 센터는 전국에 약 1만 명의 시청각장애인이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법적으로 정의되지 않은 탓에 시청각장애인들은 정부로부터 맞춤형 서비스를 지원받지 못하는 등 권익을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홍 팀장은 “일례로 시청각장애인들이 외출을 하기 위해서는 활동지원서비스가 필요한데, 현재 우리나라 활동지원사들 중 시청각장애인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는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며 “시청각장애인들이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해도 활동지원사와 원활한 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여러 제약을 받는다”고 말했다.

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복지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시청각장애인들은 사회 활동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큰 제약을 받는다. 홍 팀장은 “시청각장애인들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큰 어려움으로 이동 문제와 의사소통문제를 꼽는다”며 “혼자서는 거의 외부 활동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꼭 활동지원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의사소통권과 이동권 필수”

홍 팀장은 시청각장애인들의 인권 보호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는 ‘이동권’과 ‘의사소통권’이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고 특히 강조했다. 그는 “(시청각장애인) 전문 활동지원사와 촉수화 통역사들을 통한 서비스 제공이 매우 중요하다”며 “선진국처럼 (우리나라도) 전문 활동지원사를 양성해야 하고, 시청각장애인들의 주요 의사소통 보조기구인 점자정보단말기를 보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촉수화란 사람의 손을 만져 이해할 수 있는 수화를 뜻한다.

시청각장애인들이 의사소통권 등 기본권을 보장받기 위해선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홍 팀장은 말한다. 그는 “점자정보단말기는 가격이 매우 비싸 시청각장애인들이 개인적으로 구매하기 매우 힘든 상황”이라며 “정부에서 보조기구로 지급해 주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어 “의사소통과 사회활동을 위해서는 점자와 촉수화를 시청각장애인들과 봉사자들에게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홍 팀장은 비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인식개선 교육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홍 팀장은 “시청각장애는 단순히 두 가지 장애가 더해진 게 아니라 두 장애가 합쳐진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장애”라며 “소통 장애를 가진 시청각장애인들은 자신의 의견을 스스로 내기 어렵다는 점에서 다른 장애인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민들이 이런 시청각장애의 특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들을 배려하는 시민의식을 갖는 게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16일 시청각장애인 당사자 손창환씨와 홍유미 팀장 등이 국회에서 김세연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에게 헬렌켈러법 제정촉구 시민서명을 전달하고 있다. 홍 팀장은 오른쪽에서 세 번째. (사진=밀알복지재단 제공)
지난달 16일 시청각장애인 당사자 손창환씨와 홍유미 팀장 등이 국회에서 김세연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에게 헬렌켈러법 제정촉구 시민서명을 전달하고 있다. 홍 팀장은 뒷줄 왼쪽에서 첫번째. (사진=밀알복지재단 제공)

헬렌켈러법, 조속 제정 촉구

센터가 진행하는 주요 업무에는 시청각장애인지원법 이른바 ‘헬렌켈러법’ 제정을 위한 온·오프라인 서명운동도 있다. 지난달 16일에는 헬렌켈러법 제정 촉구를 선언하고, 시민 1만 8천여 명의 서명문을 국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헬렌켈러법은 올해 2월 자유한국당 이명수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으로 시청각장애인의 특성과 복지 욕구에 맞는 지원이 체계적으로 제공될 수 있도록 규정한다. 현재 7개월째 국회에 계류 중이다.

홍 팀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복지 정책 수립을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3년마다 시청각장애인과 이들 가족에 대한 실태조사를 해야 한다”며 “아울러 ▲ 정보 접근 및 의사소통 지원 ▲ 활동지원사 및 시청각통역사 양성 및 지원 ▲ 자조 단체 결성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다”고 해당 법안에 대해 설명했다.

아울러 해당 법안은 시청각장애인을 명확하게 법률 용어로 정의하고, 시청각장애인지원센터의 설치 및 운영도 규정한다. 홍 팀장은 “(시청각장애인지원센터는) 이들의 의사소통 등을 위한 복지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업무를 한다”며 “국가와 지자체가 이를 통해 시청각장애인에 대한 통합적 지원 체계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센터는 헬렌켈러법의 제정으로 시청각장애인들의 삶에도 변화가 생기리라 기대하고 있다. 홍 팀장은 “법 제정을 통해 시청각장애인들의 기본권이 지켜지고, 맞춤형 서비스가 제동된다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시청각장애인들의 교육과 사회 통합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헬렌 켈러는 시청각을 잃었지만, 작가와 사회활동가로 활동해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전했다. 그가 그런 삶을 살기까지는 일평생 헬렌 켈러의 곁에서 눈과 귀가 돼준 설리번이 있었다”며 “우리나라에도 1만여 명의 헬렌 켈러가 있는데, 이들은 그들에게 설리번이 돼 줄 헬렌켈러법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적절한 지원제도가 마련된다면 시청각장애인들도 헬렌 켈러와 같이 충분히 사회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 수 있다”며 “홀로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전국의 시청각장애인들을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여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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