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국 문제 농-정 간담회...원론만 오간 수준
트럼프, 무역 압박...農 “미국 눈치 보지말라”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세계무역기구(WTO) 농산물 무역 부문에서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라는 미국의 압력이 들어온 가운데, 한국 정부는 갈팡질팡하는 모양새다. 선진국 지위에 들어서면 우리 농가에 피해가 우려되지만, 미국 정부의 압력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상황. 이에 농업계는 기존 지위를 유지하라고 정부에 분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편집=김혜선 기자)

24일 서울 영등포구 나라키움여의도 회의실에서는 기획재정부 김용범 1차관 주재로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 유지 여부 관련 민관합동 간담회를 개최했다. 회의에는 한국농축산연합회·한국농업인단체연합·축산관련단체협의회·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국여성농업인중앙연합회·한국농촌지도자중앙연합회·한국쌀전업농업중앙연합회·한국낙농육우협회·한국토종닭협회·한국생활개선중앙연합회 등 농민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이번 간담회는 지난번 결렬 이후 이틀 만에 마련됐다. 앞서 지난 22일 첫 번째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간담회를 비공개로 하자는 정부 측 입장에 농민단체 관계자들이 반발하면서 무산됐다. 이들 단체는 다음날 성명문을 통해 “정부가 관련 대책 마련에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함에 따라 간담회 파행은 이미 예견된 일”이라며 “간담회가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를 위한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냐”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김 차관은 이날 간담회에서 “농민들이 우려하는 WTO 개발도상국 지위 여부 포기와 관련해 정부 입장이 확정되지 않았다”며 “농업계 의견까지 두루 고려해 이달 중 결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농업의 중요성과 농민분들의 노고를 알기 때문에 이번 WTO 개발도상국 특혜 관련 결정을 앞두고 어느 때보다도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김 차관은 농민단체 측이 WTO 개발도상국 지위 유지와 함께 제시한 6가지 사업에 대해서도 답변했다. 농민단체 측은 정부를 향해 ▲ 공익형 직불금제 ▲ 최저가격안전보장제 ▲ 청년농업인 지원금 ▲ 농업 관련 예산 확대 ▲ 농업 상생기금 조성 ▲상생기금 관련 총리실 산하 위원회 설치 등 6가지 사항을 이행해 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공익형 직불제와 관련해 김 차관은 “WTO에서 규제하는 보조금에 해당하지 않아 안정적으로 지급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요하다”라며 이행 의사를 밝혔다. 민관합동 위원회 설치와 관련해서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민관합동 특별위원회 구성은 제가 약속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지만, 농업계 의견을 수시로 듣고 수렴할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기타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충실히 검토해보겠다”고 덧붙였다.

정부 당국이 농업계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겠다는 입장을 보였지만, 농업계의 불만은 사그지지 않았다. 구체적인 대책 마련에 대한 언급은 사라지고 원론적 이야기만 오가 실망스러웠다는 게 농민단체 관계자들의 의견이다. 한국농축산연합회 김광천 사무총장은 <뉴스포스트>에 “원론적인 부분만 얘기됐고, (실질적인) 대책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수립된 것이 없었다”며 “간담회 자체가 소모적이었다”고 말했다.

24일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나라키움 여의도빌딩에서 농업단체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24일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나라키움 여의도빌딩에서 농업단체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농-정 갈등의 씨앗은 트럼프

정부 관계자와의 간담회가 진행됐음에도 농업계의 분노는 여전한 상황. 농-정 갈등의 씨앗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뿌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지난 7월 WTO 개발도상국 지위 혜택 중단과 관련한 대통령 메모를 발표한 바 있다. 충분히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들이 개발도상국 지위를 유지해 과도한 무역 혜택을 누린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트럼프가 지목한 국가에는 한국을 포함해 중국, 멕시코, 싱가포르 등 총 11개국이 있다.

한국은 1996년 OECD 가입 이후 공산품과 서비스 분야에서는 선진국 지위를 결정했지만, 농업 분야에서만큼은 개발도상국 지위를 유지해왔다. 개발도상국 지위 유지 국가는 WTO 협정에서 높은 관세를 매겨 자국의 상품을 보호하거나, 농업보조금으로 국내 가격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선진국 지위에 오르면 관세율과 농업보조금이라는 최소한의 보호막이 허물어질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 농업계의 반발은 자명했다.

농업계는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시 농업 부문의 피해가 불가피한 만큼 포기 선언 전에 피해 대책 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정부가 개발도상국 지위 사수를 위한 의지도 보이지 않는 데다, 관련 대책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게 이들 단체의 주장이다. 이들 단체는 정부에 지위를 반드시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미국 측과 협상에 임할 것을 주문했다.

간담회가 끝난 후에도 농민단체 측은 서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유지하라고 다시 한번 촉구했다. 이들은 “개발도상국 지위는 WTO의 협정에 따른 것일 뿐”이라며 “한국이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한다면 미국의 농산물 추가 개방 압력이 우려되고, 중국산 농산물의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난 18일 WTO 개도국지위 유지관철을 위한 농민공동행동 회원들이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WTO 개도국 지위 유지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 18일 WTO 개도국지위 유지관철을 위한 농민공동행동 회원들이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WTO 개도국 지위 유지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정부 “당장 변화 없어” vs 농업계 “향후 협상은?”

농업계의 우려대로 WTO 개발도상국 지위가 상실된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농민들의 피해액을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구체적인 통계가 정부 부처에 남아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현재 수입쌀은 513%의 관세를 물린다. 참깨는 630%와 대추는 611.5%, 고구마 389.3%, 마늘 360%다. 특히 홍삼의 경우 754.3%의 관세가 붙는다. WTO 선진국 지위에 오르면 이 관세율은 현저히 낮아질 전망이다.

관세율뿐만 아니라 농업보조금에도 타격을 입는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연간 1조 4,900억 원의 농업보조금을 쓰고 있지만, 선진국이 되면 농업보조금 총액도 8,195억 원 대로 무려 절반 가까이 떨어진다. 쌀 가격이 내려갈 때 이를 보전해 주는 변동형 직불제 축소도 불가피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정부는 WTO 개발도상국 지위 결정 여부로 당장 관세율이나 농업보조금에 변화가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뉴스포스트>와의 통화에서 “현재 적용하고 있는 농산물 관세나 보조금은 차기 농업협상 타결 때까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차기 농업협상이 언제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는 “현재 정해진 바가 없어 예상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WTO 개발도상국 지위 유지가 중단돼도 당장은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정부 측 주장에 농민들의 신뢰는 크지 않다. 김 사무총장은 “당장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겠지만, 차기 협상 개최 여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며 “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한다면 향후 협상에서 직접적인 피해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우려했다.

농업계와 정부 당국의 갈등이 깊어지지만, WTO 개발도상국 지위 유지 여부는 이달 중으로 확정된다. 현재까지 어떤 결론 날지는 장담할 수 없다.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해야 할 상황이 올 것을 대비한 명확한 정부 대책은 드러나지 않았고, 농업계는 강력히 반대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들의 우려대로 개발도상국 지위를 상실하면 당분간 농-정간의 갈등은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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