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김혜선 기자] 최근 WTO(세계무역기구)에서 우리나라의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는 문제를 두고 정부는 “현 농산물 관세 인하가 없을 것”이라며 농민들을 안심시키고 있다. 정부가 이같이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최근 언론에서 보도되는 각종 농산물 관세 인하 예상치는 지난 2008년도 WTO 문서에 기반한 것인데, 이 문서 자체가 사실상 WTO 회의에서 ‘죽은 문서’가 됐기 때문이다.

25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 앞에서 농민단체가 한국의 WTO 개도국 지위 유지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25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 앞에서 농민단체가 한국의 WTO 개도국 지위 유지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정부가 말하는 ‘2008년도 WTO 문서’는 WTO의 도하개발아젠다 협상(DDA·Doha Development Agenda)에서 나왔다. DDA는 우리나라의 관세장벽 개방에 상당한 충격을 줬던 우루과이 라운드(UR) 협상의 ‘시즌 2’격인 다자간 무역협상으로, 국가 간 무역장벽 수준을 정하기 위해 지난 2001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DDA는 지난 수십년 간 의미 있는 수준의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그나마 지난 2008년 협상에서 관세감축 수준과 농업보조금 감축수준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잠정타협안이 나왔지만 결국 무산됐다. 농업개도국에 농산물 수입이 급증할 경우 ‘긴급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에서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이견을 좁히지 못했기 때문. 이 잠정타협안은 지난 10년 간 발전적 논의 없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결국 정부의 “관세 감축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적용되는 관세율은 기존 WTO 협정문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압박한다고 해서 쌀 관세율 513%를 포함한 농산물 관세율이 변동될 우려는 없다.

또 WTO 협상 자체는 최종적으로 모든 나라가 모든 분야에 동의를 해야 체결되는 ‘일괄타결방식’으로 진행된다. 단 한 군데라도 협상 결과에 반대한다면 협정은 체결되지 않는다. DDA에서 만장일치가 나와야 협상이 체결되기 때문에 향후 협상 과정과 실질적 타결 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게 정부의 예측이다.

DDA 농업협상 불확실성 떠안은 정부

문제는 향후 협상이다. 25일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우리나라의 개도국 특혜를 향후 DDA협상에서 주장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는데, 앞으로 협상의 방향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개도국 지위 포기를 두고 정부가 미래 불확실성을 떠안게 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24일 국제통상법 전문가이자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송기호 변호사는 <뉴스포스트>와의 통화에서 “비유하자면 그 강의 수심이 몇 미터인지 모르면서 강에 뛰어들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송 변호사는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다고 하면, 향후 협상에서 선진국 규정을 적용하겠다는 얘기다. 문제는 앞으로 타결될 DDA 농업협정의 골격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송 변호사는 “가장 최근의 농업협상 기본구조(Modalities·2008년 WTO문서)에 의하면 개도국 포기 경우 농산물 분야 관세 인하폭(감축률)이 최소 62%에서 최대 68%에 이른다”면서 “그런데 향후 협상에서는 그것보다 더 낮춰야 하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주장하는 ‘죽은 2008년도 WTO 문서’보다 더 강력한 수준의 관세 인하가 타결될 위험이 있다는 얘기다.

송 변호사는 “DDA에서 농업선진국이 어떠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지 알 수 없으면서 ‘당장 타결되지는 않는다’는 이유로 스스로 개도국 포기하는 것은 모순된다”면서 “농산물 관세 인하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 이야기를 하는 공무원이 향후 DDA 결과를 책임질 수 있을까 묻고 싶다”고 말했다.

또 지난 2008년 WTO 문서가 그동안의 DDA 중 가장 완성도 높은 합의점에 도달했던 협상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향후 DDA 협상도 이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거나 ‘선진국’이 된 우리나라에 더 불리할 수 있다.

정부도 향후 DDA에 대한 우려를 충분히 이해하는 눈치다. 홍 부총리는 이날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개도국 지위 포기 의사를 밝히면서 “우리 정부는 미래에 WTO 협상이 전개되는 경우에 우리 농업의 민감분야는 최대한 보호할 수 있도록 유연성(flexibility)을 협상할 권리를 보유·행사한다”는 전제를 뒀다. 홍 부총리는 “미래의 WTO 농업협상에서 쌀 등 국내 농업의 민감분야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면서 “미래의 WTO 농업협상 결과 국내 농업에 영향이 발생할 경우 피해 보전대책을 반드시 마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정부는 국내 농업의 근본적인 경제력 제고를 위한 대책을 추진할 방침이다. 홍 부총리는 “우리 농업의 경쟁력과 체질 강화는 지금부터 꾸준히 추진해야 할 최우선 과제인 만큼 여기에 정책역량을 집중하도록 하겠다”면서 “정부는 공익형 직불제가 도입된다는 전제 하에 2조 2000억 원의 예산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 중 농업분야 예산을 큰 폭으로 늘린 15조 3000억 원을 책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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