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나는 간첩이 아니다”...남영동 대공분실서 외친 목소리
[르포] “나는 간첩이 아니다”...남영동 대공분실서 외친 목소리
  • 이별님 기자
  • 승인 2019.11.01 15: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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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사진전...민주인권기념관 전시
무고한 시민 고문·투옥...군사 정부, 조작으로 정권 유지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군사독재 정권으로부터 국가 폭력 피해를 당한 당사자들의 트라우마 치유 과정이 담긴 사진 전시회가 고문 수사로 악명 높았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렸다. 전시회는 간첩 조작 사건이라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 일어난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조명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피해자들 개개인의 삶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를 담아냈다.

지난달 31일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나는 간첩이 아니다-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그들의 이야기’이란 사진 치유전이 열렸다. (사진=이별님 기자)
지난달 31일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나는 간첩이 아니다-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그들의 이야기’이란 사진 치유전이 열렸다. (사진=이별님 기자)

지난달 31일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는 ‘나는 간첩이 아니다-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그들의 이야기’란 제목의 사진 치유전이 열렸다. 총 200여 점의 사진들로 구성된 전시회는 군사독재 정권 시절 무고한 이들에게 고문 등 폭력이 가해졌던 이른바 ‘남영동 대공분실’ 5층 조사실에서 진행됐다. 민주인권기념관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활용해 만든 건물로 현재 조성 단계에 있다. 2022년 정식 개관 예정이다.

사진 치유전이라는 명칭답게 전시회는 간첩 누명을 쓴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상처 치유 회복 과정을 담아냈다. 이를 총괄 기획한 사진치유자 임종진 ㈜공감아이 대표는 앞서 국가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지금 여기에’의 의뢰를 받아 지난 3년간 피해 당사자들과 사진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사진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한 피해 당사자는 총 5명. ▲ 강광보 (86년 재일교포 간첩 사건 연루/징역 7년형 확정/17년 7월 대법원 무죄 확정) ▲ 김순자 (79년 삼척 고정 간첩단 사건 연루/징역 5년형 확정/13년 11월 대법원 무죄 확정) ▲ 故 김태룡 (79년 삼척 고정 간첩단 사건 연루/무기징역 확정/98년 석방/16년 9월 대법원 무죄 확정) ▲ 이사영 (74년 울릉도 간첩단 사건 연루/징역 15년 확정/13년 후 출소/14년 1월 대법원 무죄 확정) ▲ 최양준 (82년 재일교포 간첩 사건/징역 15년 확정/9년 후 출소/11년 3월 재심으로 무죄 확정)이다.

전시에 참여한 이들은 현재 모두 사법부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지금까지도 고문과 수감 등으로 상처를 안고 있다. 이번 전시는 국가폭력 피해 당사자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스스로 극복하고, 어떻게 자기 치유 행위를 이뤄냈는지 보여주고자 기획됐다고 전시회 측은 전했다. 이들은 3년간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고문 현장을 대면하고, 사진 촬영 등을 통해 감정 회복 과정을 거쳤다.

민주인권기념관 5층 전시회장 복도. (이별님 기자)
민주인권기념관 5층 전시회장 복도. (이별님 기자)

사실 조명 넘어서 피해자 중심으로

<뉴스포스트>는 전시회 관람을 위해 이날 민주인권기념관 5층을 방문했다. 입구에서부터 적막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길게 이어진 복도와 복도 양옆으로 놓인 조사실들이었다.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에 압도됐다. 적막감이 감도는 전시회장은 이곳이 과거 무고한 시민들에게 가혹한 폭력을 가했던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전시는 ▲ 남영동 대공분실이나 교도소 등 자신을 옥죄었던 공간과 대면하는 장면 ▲ 가족이나 자연 풍경 등 본래 자기 충족적 대상과 마주하는 장면 ▲ 여행이나 여가 활동으로 국가 폭력에 의한 상처를 치유해 가는 장면 등을 담아냈다. 총 200여 점의 사진들은 조사실 내부 벽면에서 전시됐는데, 안에는 군사독재 정권 당시 사용됐던 변기와 세면대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사진들이 국가폭력의 흔적과 함께 전시돼 더욱 뇌리에 박힌다.

무고한 시민들에게 국가 폭력이 자행됐던 남영동 대공분실의 흔적이 가득한 전시회장. (사진=이별님 기자)
무고한 시민들에게 국가 폭력이 자행됐던 남영동 대공분실의 흔적이 가득한 전시회장. (사진=이별님 기자)
국가 폭력 기억과 마주한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들의 모습. (사진=이별님 기자)
국가 폭력 기억과 마주한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들의 모습. (사진=이별님 기자)

과거의 트라우마를 마주한 피해자들이 울부짖는 사진들은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오래도록 지속했는지 일부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오랜 시간 고통을 줬던 국가 폭력의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밝은 미소를 짓는 피해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이들이 간첩이 아닌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말없이 보여준다. 또 국가보안법 폐지 집회에 참석하는 등 트라우마 치유를 넘어 국가 폭력의 본질을 반대하는 피해자들의 모습도 전시됐다.

이날 전시회에는 유수 언론사와 전시회의 주인공들인 피해 당사자들이 방문하기도 했다. 故 김태룡 선생을 추모하는 공간에는 같은 피해자이자 고인의 누나인 김순자 선생이 방문했다. 그는 밝은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는 동생의 생전 사진을 보고 본지 취재진에 “내 동생이 교회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라며 “어쩌다 이렇게 갔을까...”라고 말끝을 흐렸다.

삼척 고정 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 故 김태룡 씨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들. (사진=이별님 기자)
삼척 고정 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 故 김태룡 씨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들. (사진=이별님 기자)

‘반공’의 이름으로 희생된 이웃들

군사독재 정권은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북한과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했다. 독재에 대한 반발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국민들 사이에서 꿈틀거릴 때마다 일어났던 것은 간첩 조작 사건이었다.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국민들이 분노하면서도 두려워했던 북한. 그런 북한과 내통을 했다는 간첩 사건은 군사독재 정권의 지지를 올리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됐다.

독재 정권 유지를 위해 수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간첩 조작 사건으로 희생돼 갔다. 간첩과 무관한 이들이 형장의 이슬이 되기도 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끔찍한 고문 후유증과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출소 이후에는 ‘간첩 사범’이라는 오해 때문에 사회로부터 배척됐다. 이뿐만 아니라 남은 가족들은 간첩의 가족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연좌제의 굴레에 빠지게 됐다.

김순자 선생이 남동생 등과 함께 연루된 ‘삼척 고정 간첩단’ 사건은 1979년 유신 정권 말기에 벌어졌다. 김 선생의 부모와 형제 등 일가족 12명은 간첩 누명을 쓰고 모진 고문과 억울한 옥살이를 당했다. 이 사건으로 김 선생의 아버지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 선생은 37년 만에 대법원으로부터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보낸 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가족 또는 지인과 함께 일상을 보내고 있는 국가 폭력 피해자들의 모습. (사진=이별님 기자)
가족 또는 지인과 함께 일상을 보내고 있는 국가 폭력 피해자들의 모습. (사진=이별님 기자)

이번 전시회에 참여한 또 다른 피해자는 ‘울릉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됐던 이사영 선생이다. 1974년 유신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울릉도를 거점으로 대규모 간첩망 일당을 검거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정권은 무고한 시민 47명을 붙잡아 고문했고, 이들 중 32명을 구속했다. 3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국가가 이들의 무죄를 인정하기까지에는 무려 40년이 넘게 걸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 하에서도 간첩 조작 사건은 계속됐다. 특히 재일교포 유학생들은 군사 독재 정권의 단골 희생양이었다. 사진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한 최양준 선생과 강광보 선생은 각각 1982년과 1986년 억울하게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다. 이들 역시 국가로부터 수십 년 후에야 무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번 전시회는 사진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한 국가폭력 피해 당사자들이 겪은 간첩 조작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의 상처를 대면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생생히 담아내면서 한 개인의 삶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를 보여주고, 더 나아가 국가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편 전시회는 오는 17일까지 진행된다. 평일과 주말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열린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시민 누구나 방문이 가능하다. 단 월요일은 휴무다.  내일인 2일 오후 4시에는 이번 전시회에 참여한 국가폭력 피해 당사자들과 만날 수 있는 오픈 행사가 열린다. 이 역시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이별님 기자 leestarnim@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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