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어요. 그곳에 가면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속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터라, 어머니를 입원시키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죠.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입원 절차를 밟았고 그렇게 몇 해가 흘러 살만해지나 했더니... 이번엔 장모님이 치매 판정을 받았습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건너가 장모님을 보살피는 아내를 보며 얼른 병원으로 모셨으면 싶지만, 처가댁 식구들은 아직 아무런 말이 없어요. 이러다가 아내가 먼저 쓰러질 판입니다.“ 

<뉴스포스트>가 만난 김 모(63) 씨는 양가 부모가 잇따라 치매에 걸리면서 남들이 겪을 고통의 두 배를 겪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치매로 거동이 불편했던 노모를 돌봐왔던 김 씨는 그간의 세월을 돌아보며 “치매는 본인보다 주변을 힘들게 하는 병인 것 같아요. 바람이 있다면 훗날 자녀에게 이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치매 인구 100만을 바라보는 지금. 이는 비단 그의 고민만은 아닐 것이다. 본지는 4번의 기획을 통해 치매 관리 인프라를 점검하고, 치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박점순 할머니댁 입구에 놓인 신발 한 켤레. (사진=선초롱 기자)
박점순 할머니댁 입구에 놓인 신발 한 켤레. (사진=선초롱 기자)

[뉴스포스트=선초롱 기자]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나가거나, 물건을 던지거나 때리는 등의 폭력적인 일도 허다하다. TV에 나오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귀여운 편에 속했다. 양가 부모 모두 치매를 앓고 있는 김 모(63) 씨 내외 역시 일터에 나가 있는 시간은 불안함의 연속이었다. 이런 이유로 김 씨 내외는 이틀에 한 번꼴로 장모님을 찾아간다고 한다. 기자는 지난 12일 김 씨 내외의 하루를 함께했다.

박점순(가명·85) 할머니는 손님이 오셨다며 과일과 떡을 내오셨다. 옆에 있던 딸 김 모(58) 씨를 재촉해 과일을 깎게 하는 모습이 지극히 평범해 치매 환자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점순 할머니는 손에 사과를 찍은 포크를 기자에게 내밀며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고 등을 다독였다. 

점순 할머니의 치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3년 전이었다. 6년 전 배우자를 떠나보내고 홀로 집을 지키던 점순 할머니는 점점 기억을 잃어갔다. 자녀들이 근처에 살아 종종 찾아왔지만, 점순 할머니의 외로움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나 보다. 

처음엔 건망증이었다. 온종일 물을 틀어 놓는 경우가 허다했고 냄비를 태우는 일도 많았다. 휴대폰 사용 방법을 잊어버려 집 앞 슈퍼까지 뛰어나가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는 일도 있었다. 단순한 건망증으로 치부하기엔 치매로 의심되는 증상이 많았고 결국엔 섬망(심한 과다행동과 생생한 환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거나, 매일 밤 누군가 와서 잠을 자고 간다거나 하는 등의 망상은 물론, 물건을 던지는 등의 폭력적인 증상도 나타났다. 김 씨 내외가 점순 할머니에게 얻어맞은 적도 있었다.

“이때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어요. 엄마가 집에 가겠다며 짐을 싸 들고 나가 잃어버린 경우가 두 번이나 있었고, 비가 오던 날에는 동네 어귀에 앉아 늘 갖고 다니던 손수건을 머리에 쓰고 울고 계셨어요.”

딸 김 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점순 할머니의 증상은 급격히 심각해졌고 김 씨를 비롯해 나머지 다섯 자녀를 못 알아보는 경우도 많았다. 김 씨의 주도하에 점순 할머니는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이후 장기요양등급 4급과 시설등급 판정을 받아 요양보호사의 관리를 받게 됐다. 

점순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혼자 화장실도 가고, 머리도 혼자 감았다. 밥을 차려 먹거나 설거지를 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텃밭을 가꾸는 등의 소일거리는 무리 없이 해냈다. 기자가 찾아간 날도 점순 할머니는 마당에 널어놓은 콩을 털고 텃밭에서 키우던 배추를 정리하고 있었다. 기자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돕기 위해 나섰지만, 점순 할머니의 엄청난 만류에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말동무 역할을 하던 사위 김 씨는 기자에게 “저렇게 소일거리라도 하는 게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병원에 계신 어머니는 온종일 누워만 있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시거든요”라고 말했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됐다. 점순 할머니와 딸 김 씨 내외, 그리고 기자까지 네 명이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맛깔스럽게 차려진 밥을 먹으며 점순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약주를 드시고 실수를 했던 것부터 본인이 어렸을 때 이야기 등 딸 김 씨도 알지 못하는 아주 오래전 일들까지. 점순 할머니의 과거로의 여행은 한동안 계속됐다. 중간중간 사위 김 씨에게 누구냐고 물어보는 일도 계속됐다. 

점순 할머니는 본인이 치매에 걸린 걸 모른다. 그래서 요양보호사 지도로 진행하는 치매 예방 프로그램을 더욱 열심히 하시는 것 같다는 게 딸 김 씨의 생각이다. 치매약도 점순 할머니가 원래 복용하던 약에 포함해 놨다. 밤에 먹는 약의 양이 많다는 점순 할머니의 투덜거림에 딸 김 씨와 기자가 동시에 움찔한 것은 아마 치매약 때문이리라. 

기자가 하루 동안 함께 한 점순 할머니는 일반인의 범주에 가까운 치매 환자였다. 때때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군가 돈을 훔쳐 갔다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찰나였다. 꾸준한 약 복용으로 일상생활이 가능해졌고, 매일 3시간씩 찾아오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으로 식사와 여러 치매 예방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 점순 할머니의 상태는 생각보다 나빠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딸 김 씨 내외를 비롯한 여섯 남매의 극진한 보살핌이 있어 가능했다. 하지만 점순 할머니가 치매에 걸렸다는 걸 인정하는 건 쉽지 않았다. 김 씨는 “엄마가 치매로 인한 요양등급과 시설 입소 판정을 받았을 때 많이 울었어요. 엄마가 치매에 걸렸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아요. 형제들의 부담을 낮추고 국가의 지원을 받기 위해 했던 일이 불효같이 느껴지기도 했죠. 그래도 덕분에 전문적인 관리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점순 할머니가 자녀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사진=선초로 기자)
점순 할머니가 자녀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사진=선초롱 기자)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여전했다. 점순 할머니는 하루가 멀다고 찾아오는 육 남매를 볼 때면 걱정이 앞선다. 바쁜 시간을 쪼개 와주는 게 고마우면서도 본인 가정을 제대로 챙기지 못할까 하는 마음에서다. 특히 요양보호사가 오는 것에 대해서도 일정 금액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걸 동네 지인들에게 들은 뒤부터는 점순 할머니의 걱정이 더욱더 많아졌다. 점순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는 것 같아 항상 미안해요”라고 말했다.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부분이 많아 실제로 부담하는 금액이 적다는 기자의 얘기에도 “많든 적든 돈이 들어가는 것은 분명하고 그런 점이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면 안 되잖아요”라며 걱정했다. 

걱정이 많은 점순 할머니와 하루를 보내고 집을 나서기 전 딸 김 씨에게 요양 시설 입소에 관해 물었다. 이내 눈가가 촉촉해진 김 씨는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을 당시에는 ‘시설에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하지만 약을 먹고 나서 상황이 좋아지는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전부 없어졌죠. 물론 저를 비롯해 나머지 형제들이 수시로 들여다보기는 해야겠지만, 요양보호사가 매일 찾아와서 관리해주고 있어서 마음이 좀 놓이기도 해요”라고 말했다.

다만 사위 김 씨는 아내에 대해 걱정스러운 마음이 한가득했다. 그는 “다른 형제들보다 좀 더 가까이 살고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모님을 좀 더 많이 돌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자주 찾아오지 않는 형제들이 야속합니다. 아내가 장모님을 보살피고 돌아온 날에는 지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거든요. 정형외과, 내과 등 병원도 더 자주 다니고 있습니다. 이외에 요양보호사가 없는 시간에는 장모님의 모든 식사를 챙겨야 하는데, 그렇게 들어가는 돈도 상당하거든요. 현실적으로 봤을 때 언제까지 아내가 장모님을 돌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내는 장모님의 거동이 불편해지고 용변을 가리기가 힘들어지면 요양 시설에 모시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너무 늦어요. 장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아내를 생각해서라도 하루빨리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초록색 대문을 나서기 전 점순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자의 말에 점순 할머니는 얼마 전 딸들과 김장을 했다며 겉절이 김치를 챙겨주셨다. 점순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기자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오랜만에 보는 손녀딸을 대하듯 “다음에는 아기를 낳아서 신랑하고 같이 오라”고 말했다. 진짜 할머니 같은 모습에 기자는 대답 대신 점순 할머니를 힘껏 안아드렸다.

동행 취재를 하며 들었던 생각은 치매 환자에게 가장 효과 좋은 치료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노멀 라이프(Nomal Life)’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점순 할머니도 지금처럼 요양보호사의 관리를 받으며 동네 지인들과 만나고 소소하게 텃밭을 가꾸는 일상이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평범하지만 익숙한 삶이 치매 환자가 보낼 남은 생에서는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노멀 라이프의 실현을 위해선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 간의 협의가 먼저 이뤄져야 함은 당연하다. 

정기적인 검진과 전문 인력을 통한 관리가 되면서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치매 노인을 위한 네덜란드의 ‘호그벡(Hogeweyk) 마을’이 떠오르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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