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단독 창제...문종·수양 등 왕자도 도와
집현전 학사들은 관여 못 해...시력과 문자를 맞바꾼 세종대왕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세종이 건강 악화로 훈민정음 창제를 포기했거나 해례본을 만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랬더라면 훈민정음은 왕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종은 창제 후 내우외환 속에서도 2년 9개월에 거쳐 해례본을 완성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4개월 전 세종은 사실상 눈이 멀었지만, 멈추지 않고 자신의 소명을 다한 것입니다. 시력과 훈민정음을 맞바꿔 가면서”

(사진=뉴스포스트DB)
(사진=뉴스포스트DB)

나라에 어려움이 생기면 많은 국민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서울의 중심지인 종로구 광화문 광장으로 향한다. 크고 작은 집회의 단골 장소인 광화문 광장에는 자애로운 표정의 거대한 세종대왕상이 놓여있다. 자애로운 세종대왕의 모습은 지갑 속 지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일상 곳곳을 차지하는 세종대왕은 2020년 새해에도 여전히 친숙한 역사적 인물이다.

친숙한 인물인 만큼 국민들 사이에서는 세종대왕을 둘러싼 갖가지 이야깃거리가 나돌고 있다.  세종대왕의 식성과 성품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는 물론 그의 대표적인 업적인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서도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지난해 7월 개봉한 영화 ‘나랏말싸미’에서는 기존의 학설과는 거리가 먼 ‘신미대사 창제설’이 그려져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뉴스포스트>는 지난달 24일 경기 여주 세종대왕역사문화관에서 세종리더십연구소 박현모 소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본지는 박 소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최근 가장 논란이 컸던 훈민정음 창제설과 야사라고 알려진 세종대왕의 이모저모에 대해 속 시원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박 소장은 여러 가지 훈민정음 창제설 중 세종대왕이 직접 창제하고, 세자를 비롯한 왕자들이 옆에서 도움을 줬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봤다.

경기 여주 세종대왕역사문화관 인근에는 세종대왕릉이 있다. 하지만 올해 말까지 공사 예정이라 입장이 불가능하다. (사진=이별님 기자)
경기 여주 세종대왕역사문화관 인근에는 세종대왕릉이 있다. 하지만 올해 말까지 공사 예정이라 입장이 불가능하다. (사진=이별님 기자)

 

-훈민정음 창제설에는 ▲ 세종대왕 단독 창제설 ▲ 세종-집현전 학자 창제설 ▲ 세종-문종 창제설 ▲ 신미대사 창제설 ▲ 정의공주 도움설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어떤 가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보고 있나.

“연구는 기준이 중요하다. 연구자나 학자는 근거를 바탕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자기 생각으로 추론하는 것은 소설가나 드라마 작가가 할 수 있는 영역이다.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 가장 정리가 잘 돼 있는 것은 세종실록이다. 실록에는 세종이 ‘친제(親制, 친히 지었다)’했다고 나와 있고, 집현전 부제학을 지낸 최만리가 임금에게 ‘세자(문종)를 왜 그런 일에 개입시키냐’고 비판하는 대목이 있다”

-집현전 학사들과 세종이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설을 정설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 사실이 아닌가.

“기록을 종합해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옆에서 세자와 수양대군(세조)·안평대군 등 대군들 정도가 참여한 거로 나와 있다. 정의공주의 경우 공주 쪽 집안 족보에서 정의공주가 훈민정음 창제에 도움을 줬다고 나와 있지만,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정인지를 포함한 집현전 8학사는 창제 이후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본이 나올 때까지 약 2년 9개월간 실용화 방법과 발음 기호 등을 연구했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는 집현전 학사들이 연구에 참여하지 않았다”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니라니 놀랍다. 최근에는 신미대사 창제설이 영화를 통해 불거지기도 했다.

“신미대사에 대한 언급이 가장 많은 것은 세종실록이 아닌 문종실록이다. 문종이 세종 다음으로 왕이 되고 나서 맨 처음 한 일이 신미대사에게 승직 벼슬을 준 것이다. 신미대사가 불교 행사에 대한 공을 세워 벼슬을 준 것이지 훈민정음 창제와는 관련이 없다.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이 신미대사라는 설은 사실 근거가 없다”

-어떻게 세종대왕의 단독 창제가 가능했나. 일각에서는 세종이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건 맞다. 세종은 다른 사람들보다 공부를 많이 한 분이다. 하지만 저는 뛰어난 언어학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훈민정음 창제가 가능했다고 보진 않는다.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制字解)에는 글자 창제 원리가 설명돼 있는데,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가 담겨있다. 이는 유교 지식인들이 받아들이는 보편적 사고다. 세종은 이를 통해 창제 반대파를 설득했다”

“제자해에 따르면 우주를 관통하는 유일한 원리는 음양오행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인간도 역시 우주의 부분 집합이다. 인간의 음성 구조를 본뜬 훈민정음은 당연히 우주의 부분이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음양오행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게 제자해의 설명이다. 이 같은 삼단논법은 참 논리적이다. 언어학적 지식 외에도 우주의 원리를 전체적으로 꿰뚫었다. 흔히 세종을 성리학자라고도 한다. 언어학뿐만 아니라 성리학 등 전체적인 공부를 했기 때문에 세종이 홀로 훈민정음을 만들 수 있었다”

-온라인상에는 세종에 대한 재미있는 속설들이 많다. ▲ 고기덕후 설 ▲ 비만 설 ▲ 악덕 업주 설 등이다. 이중 사실과 거짓은 무엇인가.

“세종이 고기반찬 없으면 밥을 먹지 못했다는 설은 사실이다. 비만이었던 것도 맞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비가 오지 않고 가뭄이 심할 때 세종은 ‘과인이 부족해서 하늘이 꾸짖는 것 같다’고 자책하면서 반찬 수를 줄인다. 세종이 고기를 안 먹기 시작하면 신하들은 안절부절못하기도 했다. 임금이 예민해지니까. 이윽고 비가 오면 세종은 공을 도리어 신하들에게 돌렸다. 말 한 필씩 주기도 했다. 요즘 말로 고급 차 한 대를 준 거나 마찬가지다”

-세종이 신하들에게 과중한 업무를 맡긴다는 이른바 ‘악덕 업주’ 설은 사실이 아닌가.

“세종이 신하들한테는 ‘악덕 업주’였다는 말이 있다. 세종 때 천문학 관련 연구가 무려 13년 만에 완성됐다. 이제 겨우 조선의 시간을 찾았나 했는데, 세종은 신하들의 공을 칭찬하면서도 다시 백서를 만들라고 했다. 왜 연구를 시작했고, 연구 과정에 선택되지 않은 사항은 무엇이고, 연구 장애물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집대성하는 작업이다. 역법서인 ‘칠정산내편’과 농업서 ‘농사직설’, 향약의서 ‘향약집성방’ 등은 다 그렇게 나온 책들이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일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했다. 일의 완벽성을 취하다 보니 한 과제 당 보통 5년 이상이 걸렸다.”

“어떤 사람들은 ‘노인 학대’를 했다고도 말한다. 당시 관료들의 정년이 70세였는데, 세종은 능력 있는 관료라면 70세가 됐다고 해도 놔주질 않았다. 연로한 황희 정승에게는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근무하라고 할 정도였다. 사실 재밌자고 하는 얘기다. 실제로는 신하들도 세종을 놓아주지 않았다.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집중과 건강상 이유로 물러나겠다고 하자 신하들 크게 반대하기도 했다. 저는 세종이나 신하 모두 자신의 소명을 달성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제가 세종을 깎아내리기 위한 작업을 펼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표적으로 세종이 문란한 성생활로 성병을 앓았다는 설이다. 사실인가.

“일제는 한글과 말 자체를 없애려고 한 자들이지만, 세종의 여자관계가 복잡했다는 설과 성병 설은 국내 연구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물론 반박도 있었다. 제가 서울대학교 병원 의사들과 세종의 건강을 연구한 적이 있는데, 그 결과 세종실록에 나오는 ‘임질’이란 글자가 오늘날의 임질과 같은 성병이 아닌 요로결석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본이 한글과 말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건 분명하지만, 세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많은 게 있었다. 안 좋은 것은 모두 일본이 했다고 몰아가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근거가 없는 것도 많다”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세종의 모습은 역사적 사실에 가깝나.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걸걸하게 욕을 하는 세종이 그려져 화제가 됐고, ‘대왕세종’은 세종이 말년에 시력을 잃었다고 묘사해 충격을 줬다.

“대체로 사실이다. 세종의 인품을 말하자면, 요즘 말로 ‘훈남’이 생각난다. 옆에 있는 사람이 훈훈 해지는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그런 훈남도 욕은 한다. 그런데 그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시각장애를 앓던 것도 맞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훈민정음 창제 4개월 전 세종은 ‘눈동자를 가리는 막이 있어서 앞에 누가 온 것은 아나 형체를 못 알아보겠다’면서 거의 중증 시각장애를 호소했다”

“세종이 만일 자신의 건강 악화로 창제를 포기하거나 해례본을 만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더라면 훈민정음은 왕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중요 국가사업이 최고 권력자가 바뀌면서 무산되는 게 지금도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는 창제 후 가족이 죽는 등 내우외환을 겪으면서도 2년 9개월에 거쳐 해례본을 완성했다. 이미 눈이 먼 상태였지만, 소명을 다한 것이다. 저는 세종이 자신의 시력과 훈민정음을 맞바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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