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으로 광복의 씨를 뿌리고, 교육으로 구국의 길을 찾은 독립운동가 김세환 선생의 삶이 제101주년 3·1절을 앞두고 소개됐다.

김세환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김세환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28일 국가보훈처는 제101주년 3·1절을 앞두고 광복회와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세환 선생을 2020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김세환 선생은 1889년 11월 18일 수원에서 출생하고 청소년 시기 교회에서 선교 활동과 함께 교육과 구국 활동을 펼치는 인물들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이들의 영향으로 선생은 교육가 및 독립운동가로서 꿈을 키워나갔다.

독립을 위한 새로운 학문의 중요성을 깨달은 선생은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 후 일본 주오대학에서 유학했다. 1909년 말경 귀국해 수원상업강습소(현 수원중·고)와 삼일여학교(현 매향여중·고)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을 위해 지역사회의 중추적 인물을 배출하고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는 데 앞장섰다. 

1919년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했다. 국가의 독립 문제를 민족 구성원 스스로 결정짓게 하자는 원칙이었다. 이를 독립의 기회를 삼고자 했던 선생은 3·1운동 준비모임에 참여했고,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으로 ‘순회위원’이란 임무를 띠고 수원 지역의 3·1운동을 기획 및 지도했다.

만세운동 참여로 체포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선생은 기개를 잃지 않았고, 법정에서는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검사의 질문에 선생은 “그렇다”라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해 독립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후 선생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지방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됐다.

선생은 1920년대 초부터 추진되던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수원지역을 대표해 참여했고, 신간회 수원지회장에 선출됐다. 박선태·김병호 등과 함께 수원체육회를 결성해 수원지역의 민족운동을 조직적으로 강화하고자 하였다.

1939년에는 폐교 직전의 위기에 빠진 삼일학교를 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1941년에는 수원상업학교를 설립해 해방되기까지 교육에 힘썼던 선생은 1945년 9월 26일에 숨을 거뒀다. 개인묘지에 묻혔던 선생의 유해는 1968년 국립묘지로 안장됐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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