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김혜선 기자] 그것은 차라리 지옥이었다. 미성년자 성착취 동영상 유포의 온상이 된 텔레그램은 수만 명, 어쩌면 수십만 명의 ‘악마’들을 만들어냈다. 은밀한 익명의 방을 만들어낸 ‘갓갓’ ‘박사’ ‘와치맨’ 등 N번방 운영자들은 피해자들의 신상을 털어 성착취 동영상을 찍게 하고 그 영상을 텔레그램으로 공유했다. 온갖 가학적인 영상에 환호하던 익명의 사람들은 죄책감 없이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의 돈을 내고 성착취물을 즐겼다. 지난 20일 가장 심각한 범죄행위가 일어나던 ‘박사’ 조주빈(25)이 붙잡힐 때까지 악마들은 지옥을 활개치고 다녔다.

(사진=뉴스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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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N번방 운영자들은 N번방 창시자인 ‘갓갓’을 제외하고 모두 경찰에 붙잡혔다. 피해자의 몸에 ‘노예’ 글자를 새기게 하고 성폭행까지 서슴지 않는 등 가장 악질적으로 운영되던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은 지난 25일 성범죄자로서 최초로 신상 공개가 결정돼고 검찰로 송치됐다. ‘갓갓’에게 N번방을 넘겨받은 ‘와치맨’과 ‘켈리’는 지난해 9월에 붙잡혀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신상공개 협박해 피해자 ‘노예화’

현재까지 경찰이 파악한 N번방 피해자들은 모두 74명, 이 중 16명이 미성년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N번방을 모방한 다른 방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것을 고려하면, 숨은 피해자들의 규모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조주빈 등 N번방 운영자들은 피해자들의 이름과 주소, 가족의 연락처 등 ‘신상’을 털어 협박하면서 성착취 영상을 찍도록 강요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영상이 주변에 알려질까 두려움에 떨었다. 지난 26일 한 N번방 피해자는 본지에 “N번방에 더 이상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자신의 피해 과정을 밝혔다. 피해자 A씨는 ‘모델 아르바이트’를 통해 N번방 운영자에게 약점을 잡혔다고 털어놨다.

A씨는 “어플을 통해 알게 된 한 남자가 사진 한 컷당 10만 원을 주겠다면서 모델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다. 스튜디오로 찾아가니 알몸에 나시티 한 장과 양말을 신고 촬영을 요구했다”며 “그만두겠다고 말하자 저를 사기꾼으로 몰고 신고하겠다며 협박해 반강제적으로 촬영했다”고 말했다.

촬영을 마친 남자는 다음날부터 ‘해당 사진을 가족에게 유포하겠다’며 돌변했다고 한다. A씨는 “일주일 간격으로 (성착취) 영상을 요구했고 그 영상이 텔레그램으로 공유되고 있다고 (남자가) 말해줬다”고 전했다. 해당 남성은 A씨에게 “이 영상이 퍼져도 상관 없느냐”면서 “네가 성인이 되고 과연 떳떳하게 한국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한 번 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면서 A씨의 가족 휴대폰 번호를 나열하며 “영상 보낸다”고 말했다. 당시 A씨는 미성년자였다.

A씨가 제공한 N번방 협박범의 메시지. (사진=A씨 제공)
A씨가 제공한 N번방 협박범의 메시지. (사진=A씨 제공)

‘딥페이크’ 영상을 통해 협박을 받은 피해자도 있다. 또다른 피해자 B씨는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자신도 N번방 피해자가 될 뻔했다”고 글을 올렸다. B씨는 가해자가 클라우드 등에 저장해 둔 자신의 사진에 음란물을 합성해 “유포를 원하지 않으면 성기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B씨가 응하지 않자 가해자는 실제로 B씨의 SNS 등 지인에 해당 사진을 유포했다. 가해자는 지난해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지만, B씨는 충격을 받고 자신의 연락처를 지우고 모든 지인과 연락을 끊어야 했다.

이들은 입을 모아 “영상이 혹시나 유포됐을까 두렵다”고 말했다. A씨는 “저와 같은 피해자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고, 지금 이 순간에도 늘어나고 있다”며 “더 이상의 피해가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붙잡혀도 솜방망이 처벌…법 개정 필요성

N번방 사건은 전국을 충격에 몰아넣을 정도로 그 수법이 잔혹했지만, 정작 법적인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칠 우려가 제기된다. 실제로 N번방을 ‘갓갓’에게 물려받은 ‘켈리’는 지난해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음란물 제작·배포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뒤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당시엔 켈리가 N번방 운영자였던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수만 개의 아동·청소년 음란물을 유포한 것에 비해 가벼운 처벌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 사건에 검찰은 항소조차 하지 않았다.

현행법 상 N번방 운영자들이 아청법 최대 형량인 ‘무기징역’을 받을지도 미지수다. 무기징역 형을 받는 혐의는 아청법 제11조의 아동 음란물 제작인데, N번방 수법은 피해자에게 직접 영상을 찍게 강요하는 방식으로 성착취물이 제작됐기 때문에 법적인 다툼의 여지가 있다.

그나마 미성년자 피해자는 ‘구매자’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지만 성인 피해자의 경우 불법 촬영물이 유포됐을 경우 유포자 외 구매자나 소비자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전무한 상황이다. 불법촬영 피해자들은 자신의 동영상이 끊임없이 복제, 유포되면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된다. 불법촬영 소비자에 대한 관련법 제정이 필요한 이유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들끓자 여야는 앞다퉈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한 법안들을 제시하고 나섰다. 더불어민주당은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해 성 착취 영상물 유포자 뿐 아니라 구매자와 소지자를 모두 처벌 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성착취 영상물 유포 협박 등 디지털 성범죄 사각지대에 있는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 기준도 마련하겠다는 게 민주당의 방침이다.

미래통합당은 성폭력특별법을 개정해 촬영 동의와 상관없이 영상을 이용한 협박도 성폭력 처벌대상에 포함시키겠다고 공약했다. 기존의 음란물 협박 범죄의 경우 성폭력특별법이 아닌 형법상 협박죄나 강요죄를 적용 받아 성범죄로서의 특수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다만 통합당 공약에서는 ‘구매자’와 ‘소지자’를 처벌하는 내용은 반영되지 않았다.

국민의당은 △피해자의 동의를 받지 않은 불법 촬영물의 제작자·유포자·소비자 처벌 △피해자가 특정되는 촬영물과 재범에 대한 가중처벌 △불법 촬영물이 유통되는 플랫폼 사업자의 법적 책임 강화 등을 공약했다.

정의당은 성폭력특별법을 개정해 디지털 성폭력 촬영물 재유포시 가중처벌 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성착취 사진이나 영상 유포 시, 정보통신망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위반(음란물 유포)이 아닌 성폭력특별법을 적용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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