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세대’ 진보화가 이끈 ‘진보 주류시대’
득표율 따지면 균형 맞췄다는 반론도
궤멸적 참패 통합당, 극보수주의 자성론 나와
기록적 대승 민주당 “열린우리당 실패 기억하자”

[뉴스포스트=김혜선 기자] 제 21대 총선 결과는 여당에게도 야당에게도 충격을 선사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지역구 163석, 비례대표(더불어시민당) 17석을 얻어 180석의 초거대 정당으로 거듭났다. 반면 보수 통합으로 똘똘 뭉쳤던 미래통합당은 지역구 84석, 비례대표(미래한국당) 19석으로 쪼그라들어 개헌저지선을 겨우 넘긴 103석을 가져갔다. 지난 4·15 총선 이후 대한민국은 ‘진보 주류’라는 뉴노멀(new normal·새로운 표준) 시대를 맞이했다.

지도의 면적이 아닌 모든 지역구 같은 크기로 표시한 지역구 당선 현황. 1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전국 개표결과 지역구 의석은 더불어민주당 163석, 미래통합당 84석, 정의당 1석, 무소속 5석으로 나타났다. (그래픽=뉴시스)
지도의 면적이 아닌 모든 지역구 같은 크기로 표시한 지역구 당선 현황. 1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전국 개표결과 지역구 의석은 더불어민주당 163석, 미래통합당 84석, 정의당 1석, 무소속 5석으로 나타났다. (그래픽=뉴시스)

 

변화의 바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보수 정치세력은 최근 4차례 전국단위 선거에서 진보에 연이은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20대 총선(2016년)-19대 대선(2017년)-7회 지방선거(2018년)-21대 총선(2020년)까지 5년간 보수 정당은 진보 정당에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이를 두고 정치 평론가들은 ‘주류 세력 교체’로 표현한다.

“양당체제가 아닌 1.5당 체제라는 뉴노멀 시대가 왔다. 그동안 4번의 선거 모두 민주당이 승리, 그것도 대부분 압승이었다. 이번에 코로나가 없었어도 민주당이 고전은 좀 했겠지만 승리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한국사회의 주류가 산업화세력(1960~70년대)에서 민주화 세력(1980~90년대)으로 교체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16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말이다. 진 전 교수 외에도 정치 평론가들은 이른바 ‘586세대(5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생)’로 대표되는 50대의 진보화가 이번 총선의 정치 지형 변화를 이끌었다고 말한다. 원래 50대 계층은 전통적인 보수 지지층으로 알려져 있지만, 586세대가 기성세대가 되면서 이 같은 지형이 바뀌었다는 것.

50대의 진보화는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난다. 한국갤럽이 지난 14일 실시한 ‘정부 지원론이냐 견제론이냐’는 조사에서 20대(42% 대 39%), 30대(64% 대 25%), 40대(60% 대 35%), 50대(56% 대 34%) 등 2~50대에서 정부 지원론에 힘을 실었다. 정부 견제론은 60대 이상에서(32% 대 54%)만 높았다. 반면 4년 전인 20대 총선 갤럽 조사에선 2040은 민주당을, 50대 이상은 새누리당을 지지했다. 당시 50대는 52% 대 27%로 보수여당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진보 주류 시대’의 반대 의견도 있다. 의석수만 따지면 진보의 압승, 보수의 완패지만 ‘득표율’로 따지면 두 진영의 균형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에서 지역구 양당 득표율은 각 49.9%, 41.5%로 나타났다. 정당 투표를 봤을 땐 더불어시민당과 열린민주당을 합치면 득표율은 39.7%, 미래한국당과 국민의당을 합치면 40%가 나왔다. 소선거구제와 왜곡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때문에 득표율과는 상당한 차이가 나는 의석수를 여당이 얻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대안 정당’ 실패한 보수…극보수 넘어설까

이번 21대 총선 결과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지만, 야당 참패에 대한 해석에 공통점이 있다. 바로 통합당이 민주당을 대체할 ‘대안 정당’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형준 전 미래통합당 공동선대위원장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투표율이 66%까지 나온 건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총결집했다는 거다. 그런데도 7~8%가 모자란 건 과거처럼 보수가 결집한다고 되는 판이 아니란 뜻”이라며 “젊은층이나 중도층으로 확장하자면 새로운 매력을 보여줘야 한다. 체질과 문화를 혁신해야 한다. 옛날 인물 분장해봐야 소용없다”고 꼬집었다.

총선을 2주 앞두고 통합당 선거 총괄을 맡았던 김종인 전 총괄선대위원장은 통합당을 두고 ‘환자’라고까지 표현했다. 김 전 위원장은 22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통합당은 지난 네 번의 선거에서 완전히 패했다. 남은 것은 대통령 선거인데 상당수는 그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는 것 같다”며 “환자가 의사의 말에 제대로 순응을 해줘야지 병을 고치지, 환자가 거기에 반항하면 의사가 치유를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심재철 미래통합당 대표 권한대행을 비롯한 당 지도부가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서 머리숙여 인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심재철 미래통합당 대표 권한대행을 비롯한 당 지도부가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서 머리숙여 인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금까지 통합당이 ‘태극기 세력’으로 대표되는 극보수층만 끌어안은 것도 당의 확장성에 제한을 줬다는 지적도 있다. 총선 직전 논란이 된 ‘막말 논란’에서 한국당이 즉각 문제 후보에 대한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는 것도 참패의 원인 중 하나로 분석된다. 김종인 전 위원장은 “제일 첫째로는 황교안 대표께서 N번방 문제와 관련해 이상한 발언을 갖다 해서 그때서부터 조금 분위기가 이상했는데. 그다음에 연속해서 김대호 후보, 그다음에 마지막에는 차명진 후보까지 해서 그런 말들이 쏟아졌다”며 “소위 배려도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뱉어서 내가 보기에 그런 면들이 가장 좋지 못하게 작용했다고 생각을 한다”고 전했다. 박형준 전 위원장도 보수 색채를 강하게 하는 것은 “당이 망하는 길”이라고 단언했다.

총선 결과 역시 그동안 ‘보수 전사’로 불리던 이들이 줄줄이 낙선해 더 이상 극단적인 진영 정치가 유권자에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강경 발언으로 잦은 논란에 휩싸였던 민경욱·김진태·이언주 등 후보는 각 인천 연수을, 강원 춘천시철원군화천군양구군갑, 부산 남구을 등 보수세가 강한 지역구에 출마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의원에 패했다. 특히 김진태 의원의 강원 지역은 70여년 만에 진보 진영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난 곳이다.

이러한 분석이 이어지자 통합당 내에서는 ‘자성론’도 터져 나오고 있다. 일부 통합당 의원들이 지난 20일 열린 의원총회에서 보수 유튜버 주장인 ‘총선 조작선거’ 주장을 들고 나오자, 내부에서부터 비판이 터져나왔다. 이준석 최고위원은 총선 직후인 지난 17일 비상 최고위에서 한 참석자가 공개적으로 음모론을 거론하겠다고 해 말렸다는 일화를 공개했고,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던 김세연 의원도 “음모론이 계속 작동하고 있는데 정말 환경변화에 대한 기본적인 자각이 아직도 안 돼 있다”고 비판했다. 국회 입성에 성공한 장제원 의원 역시 “패배 원인을 성찰해야 할 시기에 또 다른 논란을 낳아서는 안 된다”며 논란에 선을 그었다.

한편, 통합당은 향후 당 재건을 위해 ‘김종인 비대위’ 체제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심재철 통합당 당대표 권한대행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비공개 최고위 회의를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앞으로 김종인 비대위 체제로 (당이) 가도록 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심 권한대행에 따르면, 20대 국회의원과 21대 당선자 142명 중 140명을 조사한 결과 과반 이상이 ‘김종인 비대위’에 찬성했다고 한다. 그는 “아예 연락되지 않은 분은 2명이고 나머지 140명의 의견을 취합해 최종 수렴한 결과, 김종인 비대위가 다수로 나왔다”고 설명했다.

앞서 김 위원장은 비대위원장 수락 이전에 대선 전까지 ‘무기한·전권 비대위’를 요구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심 권한대행은 “김 위원장과 통화를 해 보겠다. 언론 통해서 입장을 봤기에 어떤 생각인지 직접 들을 생각”이라고 답했다. 심 권한대행은 “(김 위원장이 비대위원장 직을)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한다”며 “이제 전국위원회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다음주 초 쯤 준비되는 대로 절차를 거칠 예정”이라고 전했다.

민주, 586세대 新전성기

총선에서 압승한 민주당은 장기집권 체제를 공고히 했다. 특히 총선 전 후보 경선 과정에서 ‘용퇴론’이 일었던 586세대 리딩그룹이 대부분 생존해 국회로 돌아오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민주화 운동의 주역으로 평가받는 이들은 20년 전 ‘젊은피’로 정치계에 입성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주류로 떠올랐다. 이해찬 대표를 주축으로한 선배 세대는 21대 총선을 시작하며 민주당 내 사령탑에서 내려오게 된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리더가 탄생하는 셈인데, 가장 유력한 후보들이 바로 586세대다.

민주당 전당대회는 오는 8월 예정돼있다. 강력한 대권 후보인 이낙연 당선자가 당권에 도전하는 것은 또 다른 변수지만, 586세대의 간판인 송영길(5선)·이인영(4선)·우상호(4선) 의원들의 출마가 거론된다. 특히 송 의원은 지난해 당대표 선거에서 이해찬 대표 다음 순으로 표를 받은 인물이다. 70년대 학번인 우원식·홍영표 의원도 당권 도전 가능성이 있다.

5월 7일에 열리는 원내대표 선거도 586세대가 대거 출몰할 예정이다. 후보로 거론되는 4선 의원은 김태년·윤호중·정성호 의원, 3선 의원은 전해철·박완주·박홍근·윤관석 의원이다. 모두 586세대다. 이중 박홍근 의원은 불출마를 선언한 상태고, 대부분은 출마 의사를 밝히거나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해찬(가운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현안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해찬(왼쪽)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현안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한편, 민주당은 기록적인 압승 이후 더욱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굳이 ‘의석수로 밀어붙인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는데다가, 2004년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해찬 대표는 21대 국회 당선인 전원에게 친전을 보내 “국민 앞에 항상 겸손해야 한다”며 자중을 신신 당부했다고 한다.

이 대표가 ‘겸손’을 강조하면서 든 예시는 과거 민주당 전신인 열린우리당이 겪은 실패다. 그는 “우리는 승리에 취했고, 과반 의석을 과신해 겸손하지 못했다. 일의 선후와 경중과 완급을 따지지 않았고 정부와 당보다는 나 자신을 내세웠다”면서 “그 결과 우리는 17대 대선에 패했고 뒤이은 18대 총선에서 겨우 81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당분간 코로나19 극복과 경제위기 돌파 등 민생에 집중할 방침이다. 이 대표는 “언론에서 개헌이나 검찰총장 거취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현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코로나 국난극복”이라며 “경제 위기, 일자리 비상사태를 타개해 나가는 엄중한 상황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당초 강경 발언을 이어가던 초선 의원들도 당내 분위기를 따라 발언을 자제하는 눈치다. 그동안 조국 사태에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김남국 당선인은 22일 YTN라디오에서 “당장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민생을 챙기는 것”이라며 “여당이나 당선자가 윤석열 총장의 거취에 말하는 것은 굉장히 적절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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