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세대간 긍정적 별명은 OK, 무시하는 단어는 싫어”
-유튜브·트위치 등 방송서 비하표현 난무
-“비하표현, 다양성 존중하는 단어로 대체돼야”

바야흐로 벌레의 시대다. 급식충 틀딱충 맘충 연금충 한남충 진지충 지방충 난민충 등 느닷없이 출몰하는 수많은 벌레()떼가 우리 삶을 좀먹고 있다. 최근에는 오륙남이나 할매미같은 변종도 등장한 형편이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말하는 사람에게 있어 말은 이미 형성된 사유를 번역하는 게 아니라 사유를 완성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말에 앞서 생각도 없고, 말하는 동안에도 생각이 없다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말은 사유를 완성하면서, 곧 사유 자체인 셈이다.

오스트리아 출생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를 게임의 일종으로 봤다. 그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 안에서도 그 위계에 따라, 같은 낱말이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장기판의 졸() 하나를 잃어버리면 옷의 단추 하나를 뚝 떼어 대신 사용하듯, 개별 낱말의 쓰임이 각 사회가 쓰는 언어게임판에 따라 달라진다는 설명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층위의 삶을 긍정하면서도, 그 언어가 사용되는 규칙과 배경을 떠난 자아라는 개념은 허구라는 지적이다.

메를로-퐁티와 비트겐슈타인이 벌레가 들끓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모든 위계에 속하는 이들의 언어와 사유가 벌레로 가득 찬, 혐오 게임을 즐기는 매우 위험한 공동체라고 진단하지 않았을까. 뉴스포스트는 이번 기획 기사를 통해 우리 사회의 비하표현를 짚어보고 그 해결책을 들어본다. - 편집자주

[뉴스포스트=김혜선 기자] “옛날엔 초등학생을 ‘초딩’이라고 불렀잖아요. 요즘은 ‘잼민이’에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특정 세대를 지칭하는 단어는 늘 있는 것 같아요. 문제는 요즘은 거기에 비하하는 내용이 섞인다는 거죠” -이서현(20)

PC통신 이후 20년 간 초등학생을 지칭하는 단어인 ‘초딩’이 그 위상을 잃고 ‘잼민이’가 떠오르고 있다. 잼민이는 인터넷 방송 트위치에서 시작된 단어로, 인터넷 방송 BJ에 일정 금액을 지불할 때 ‘재민’이란 이름의 어린 남자 아이 목소리가 나오는 데서 유래했다. 이 ‘재민이 목소리’는 인공음성이지만 어린 아이의 목소리를 잘 구현해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점차 재민이는 초등학생을 통칭하는 말로 쓰였고, ‘잼민이’로 굳어졌다.

낚시 게임을 하고 있는 초등학생들. (사진=뉴스포스트 DB)
낚시 게임을 하고 있는 초등학생들. (사진=뉴스포스트 DB)

표현은 자유지만 ‘비하’는 빼주세요

잼민이는 2000년대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초딩’과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 당시에는 고등학생을 지칭하는 고등어에서 고딩으로, 곧 중딩과 초딩으로 퍼져 나갔다. 처음엔 별 뜻 없는 단어였지만 점차 은근히 어린 학생들을 비하하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잼민이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상에서 어딘지 미성숙하고 무례한 행동을 보이면 ‘잼민이’가 되었다.

‘급식’도 마찬가지다. 고딩, 중딩으로 불리던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급식을 먹는다는 이유로 ‘급식’ 혹은 더 낮춰서 ‘급식충’이 되었다. 청소년들은 이 같은 별명들이 세대 간 갈등을 심화시킨다고 지적했다. 박동욱(19)군은 “특정 계층에 붙는 별명 때문에 세대 간 갈등이 심화된다고 본다. 서로가 이해해기 전에 이런 단어로 비판하는 마음을 미리 갖게 되고, ‘저 세대는 저렇다’며 틀을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잼민이나 급식 같은 표현을 ‘표현의 자유’로 받아들이면서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고 보는 이도 있었다. 정나은(18) 양은 “‘급식’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으로 느껴져서 괜찮다. 하지만 어른들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시하듯이 사용한다면 듣기 껄끄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박지헌(24) 씨는 “지금은 ‘탈급식’이고, 제가 잼민이도 아니기 때문에 별 생각은 없지만 당사자가 되면 기분 나쁠 것 같다”면서도 “인터넷에서 이런 용어가 쏟아지는데 막을 수는 없고, 막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쓰는 사람이 조리 있게 잘 사용하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삶 속에 녹아든 비하표현…“인터넷과 현실은 구분해야”

인터넷 상에서 사용하는 비하표현이 현실세계에 지나치게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도 있다. 이정훈(29)씨는 “익명을 기본으로 하는 커뮤니티 사이트 같은 곳들에서 비하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다. 특정성별이나 나이, 계층이 잘못한 내용의 게시글이 올라왔을 때 쉽게 ‘한남·한녀’라던지 표현을 쓴다”고 말했다. 이 씨는 “어떤 사람들은 커뮤니티에 너무 매몰돼서 현실에서도 쉽게 그런 단어를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용현(27)씨는 “자연스럽게 사용하지만 비하의 의미가 담긴 단어도 많다. ‘김치녀’ 등 명백한 비하표현은 현실에서 잘 쓰지 않지만, ‘지잡대’는 숨 쉬듯 쓰지 않나”며 “특정 집단을 묶어서 깎아내리는 표현이 마치 농담처럼 쓰일 때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런 말을 쓰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겠지만, 너무 자주 사용하면 인간적으로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유튜브, 트위치, 아프리카 TV 등 인플루언서들에 의해 혐오 언어가 난무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권수현(23)씨는 “유튜브, 트위치 등 개인방송 매체나 SNS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인플루언서들이 비하표현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오현주(24)씨도 “잊을 만 하면 포털 사이트에 방송BJ들의 막말 등 논란이 도배된다. 어린 학생들도 인터넷 방송을 많이 보는데 아무런 비판 없이 비하표현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다”며 “비하표현은 방송 플랫폼에서 적극적으로 저지하거나 BJ 스스로도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건희(27)씨는 “세대를 묶어 비판하려는 단어가 아닌 그 세대의 다양성과 생각을 존중하는 단어들을 만들어 사용한다면 세대 간 가치관이 다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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