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조선시대 훈련원터에 들어선 국립중앙의료원과 대형의류상가

[도시탐구] 동대문 의류 쇼핑몰이 군사시설이었다고?

2024. 05. 24 by 강대호 기자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표지석에는 그곳의 과거가 새겨져 있다. 지역의 유래나 그곳에 있었던 건축물의 이름 정도만 나와 있지만 당시를 그려볼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된다.

동대문 일대 의류 상가들 앞에도 표지석이 서 있다. 이들 표지석에는 과거 건물 자리에 학교가 있었다고 새겨져 있다. 대형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넓은 부지가 필요했는데 학교 자리가 적당했을 것이다.

DDP에서 바라본 밀리오레와 두타.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 '훈련원'이라는 군사시설이 있던 곳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DDP에서 바라본 밀리오레와 두타.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 '훈련원'이라는 군사시설이 있던 곳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학교 터에 들어선 대형 의류 상가

두타몰은 밀리오레와 함께 동대문의 대형 의류 쇼핑몰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두타몰 앞은 동대문과 청계천에서 쇼핑과 관광을 즐기는 이들로 종일 붐빈다. 건물 입구 화단에는 표지석이 하나 서 있다. 하지만 이 표지석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못하는 듯 보인다. 거기에는 ‘덕수상업고등학교 옛터’라고 쓰여 있다.

두타몰은 옛 덕수상고 자리에 들어선 거였다. 덕수상업고등학교는 1910년 ‘공립수하동실업보수학교’로 개교했다. 을지로와 종로 등으로 옮겨 다니다 1947년에 현 두타몰 자리로 이전했다.

두타몰 입구 화단에 있는 '덕수상업고등학교 옛터' 표지석.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두타몰 입구 화단에 있는 '덕수상업고등학교 옛터' 표지석.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그러던 1978년 덕수상고는 성동구 행당동으로 이전했다. 2007년에는 덕수고등학교로 개명하며 일반계와 특성화계로 분리했다. 2022년 이후부터는 위례신도시에 있다.

학교가 떠난 자리는 주차장 등으로 쓰이다가 1998년 말 두산타워가 들어섰다. 이른바 ‘두타’의 시작이다. 

두타 인근의 ‘현대시티아울렛’ 건물 앞에는 표지석 두 개가 서 있다. 하나에는 ‘덕수중학교 교적비’라 쓰여 있고 다른 하나에는 ‘서울 동대문국민학교 교적비’라 쓰여 있다. 두 개의 교적비(敎跡碑)는 이곳에 이들 학교가 있었다는 의미다.

동대문국민학교는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서울시 교육청 자료를 보면, 1946년에 개교했는데 1966년에 을지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72년에 폐교했다. 도심 공동화 현상이 시작되던 시절이었다.

폐교할 때 을지국민학교 재학생은 중구의 충무초등학교로 전학했다고 한다. 졸업생에 관한 자료도 이 학교로 이관되었다고.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현대시티아울렛 입구의 표지석. 이 자리에 동대문국민학교와 덕수중학교가 있었다는 흔적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현대시티아울렛 입구의 표지석. 이 자리에 동대문국민학교와 덕수중학교가 있었다는 흔적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덕수중학교는 덕수상고와 초기 역사를 함께 한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한동안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통합된 학제였다. 1951년에야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됐다. 1972년 덕수중학교는 새 교사를 지어 이전했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동대문국민학교 즉 을지국민학교가 있었던 지금의 현대시티아울렛 자리였다.

그러니까 원래 초등학교가 있었던 자리에 중학교가 들어선 거였다. 덕수중학교는 1990년 말에 중구 인현동의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중학교가 떠난 터에 현대시티아울렛이 들어선 건 1996년이었다.

그런데 현대시티아울렛이 들어선 자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에 훈련원 청사가 있던 자리였다. 그리고 그 일대에는 훈련원에 소속된 연병장 등 군사 시설이 있었다.

병원이 되고 미군 주둔지로 이용된 훈련원 터

군사 시설은 시대가 바뀌어도 군사 관련 시설인 경우가 많다. 일본군 기지였던 용산의 미군기지처럼. 그런데 군사 시설은 시대가 바뀌면서 국유지로 용도가 바뀌며 공공시설이 들어서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훈련원이 있었던 터에 들어선 ‘국립중앙의료원’이 그렇다.

훈련원은 조선시대에 무관 선발과 무예 및 병법 훈련을 관장하던 관청이었다. 자료를 종합하면, 훈련원은 지금의 두타몰 옆 현대시티타워 자리에 청사가 있었고 군사 훈련 등을 위해 지금의 을지로5가와 6가 일대에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국립중앙의료원 전경. 이 자리가 원래 훈련원 터였다고 새겨진 표지석이 병원 입구에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국립중앙의료원 전경. 이 자리가 원래 훈련원 터였다고 새겨진 표지석이 병원 입구에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국립중앙의료원의 시작은 한국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스웨덴은 부산에 적십자병원을, 덴마크는 부산항에 병원선인 유틀란디아(Jutlandia)호를, 노르웨이는 동두천에 이동외과병원을 파견해 군인들은 물론 민간인들까지 치료했다.

종전 후 한국 정부는 이들 3국의 의료단이 계속 한국에 남아주길 희망했다. 수년간의 협의 끝에 유엔 산하 한국 재건단인 UNKRA(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와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3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1958년 11월에 국립중앙의료원을 개원했다. 

메디칼센터로도 불린 국립중앙의료원은 가난했던 시절 한국 최고의 시설과 의료진을 자랑했다. 북유럽 국가에서 파견한 스칸디나비안 의료 사절단들에게 수련받은 한국 의료진들은 한국 의료 발전의 주축이 되기도 했다.

국립의료원이 들어선 곳은 원래 경성부립부민병원, 즉 서울시립시민병원 자리였다. 부민병원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부병원’의 모태이기도 하다.  신문 기사 등을 참조하면 부민병원은 1934년에 개원했다.

1934년 2월 28일 자 동아일보의 '부민병원 2일 낙성식' 기사를 보면, “경성부민병원이 '훈련원 광장'에 철근콩크리트 이층집을 건축했다”고 나온다. 여기서 ‘훈련원 광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즉 국립중앙의료원이 들어선 자리가 원래 훈련원이었다는 거다. 병원 정문을 들어서면 이러한 유래가 적힌 표지석을 볼 수 있다.

스칸디나비안 의료 사절단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 병원 별관 앞 잔디공원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기념관’이 그곳이다.

기념관이 있는 건물은 원래 스칸디나비안 의료진들을 위한 숙소였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1층과 2층에 걸쳐 스칸디나비안 의료진들의 헌신이 담긴 기록물과 국립의료원의 역사가 담긴 기록물이 전시돼 있다.

스칸디나비아 기념관. 국립중앙의료원에 파견된 스칸디나비아 의료 사절단들을 기념하는 시설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스칸디나비아 기념관. 국립중앙의료원에 파견된 스칸디나비아 의료 사절단들을 기념하는 시설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국립중앙의료원 바로 옆에는 미군 극동 공병단(Far East District Engineer)이 주둔했었다. 국방부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6월 4만2,000여㎡에 달하는 부지를 주한미군에 공여했다. 2018년 경기도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로 옮길 때까지 미군 공병단은 이곳에 머물렀다.

공병단이 주둔한 부지에는 원래 경성사범학교가 있었다. 1921년에 개교한 이 학교는 을지로5가의 훈련원 터에 새 교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경성사범학교는 광복 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이 되었다. 공병단 부지 옆 훈련원공원에 ‘경성사범학교 교지비’ 표지석이 있다. 

공사가 한창인 미군 극동 공병단 부지. 국립중앙의료원 신축 공사와 국가중앙감염병전문병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공사가 한창인 미군 극동 공병단 부지. 국립중앙의료원 신축 공사와 국가중앙감염병전문병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그런데 미군 극동 공병단 터가 국립중앙의료원과 인연이 깊은 듯 보인다. 코로나19가 한창이었을 때 공병단 부지 내 일부 시설을 정비해 국립중앙의료원 격리치료병동으로 사용했었다.

현재 공병단 부지는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에 국립중앙의료원 새 청사와 ‘국가 중앙감염병 전문병원’이 들어설 예정이다.

그리고 동대문운동장을 헐고 들어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와 동대문역사문화공원도 조선시대에는 훈련원 영역에 속했었다. 조선시대의 군사 시설이 시대가 바뀌며 오늘날 다양한 용도로 쓰이고 있는 것.

이렇듯 길가의 표지석에 새겨진 의미를 따라가다 보면 그곳이 걸어온 발자취를 목격할 수 있다.

훈련원공원의 경성사범 표지석.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훈련원공원의 경성사범 표지석.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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