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과거 광희문·동대문운동장 일대, 체육사들 번창 신당동 앞길에는 100곳 이상 대장간 자리잡아

[도시탐구] 광희문 앞 퇴계로의 체육사와 대장간

2024. 05. 31 by 강대호 기자

한때 농경 국가였던 우리나라는 공업 국가가 되며 도시화를 겪었다. 도시화는 옛것을 그냥 허물고 새것을 급히 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이 도시에는 많다. 한때는 소중한 보금자리나 일터였던 곳이, 혹은 피와 땀이 담긴 곳들이 개발을 명목으로 묻히거나 버려졌다. <도시탐구>는 언젠가 누군가는 그리워하고 궁금해할 지금은 사라지거나 희미해진 그 흔적들을 답사하고 기록해 나갈 예정이다. -편집자주-

[뉴스포스트=강대호기자] 광희문 일대는 지난 100여 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의 한양도성을 헌 자리에는 운동장이 들어섰었는데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고는 다시 헐려 DDP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들어섰다. 그리고 장충동과 신당동을 가로막고 있던 도성 구간도 헐려 이웃한 동네가 되었다.

광희문과 가까운 을지로6가와 7가 그리고 신당동에는 과거 체육사와 대장간이 많았었다. 하지만 쇼핑 문화와 산업 환경이 달라지며 이들 업종은 변화하거나 사라지는 중이다. 그래도 광희문 앞 퇴계로에 가면 아직 맥을 잇고 있는 체육사와 대장간을 볼 수 있다.

신당동 대장간 거리. 과거 이 일대는 대장간이 100군데 넘게 있었다. 지금은 3군데 남아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신당동 대장간 거리. 과거 이 일대는 대장간이 100군데 넘게 있었다. 지금은 3군데 남아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동대문운동장의 체육사

50대 커뮤니티에 동대문운동장에 대한 기억을 물은 적 있다. 야구나 축구 경기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이었지만, 운동용품을 사러 갔었다는 기억도 많았다. 과거 동대문운동장 일대에는 운동용품을 파는 체육사들이 즐비했었다. 축구장과 야구장 건물에도 매장이 있었다. 

관련 자료를 종합하면, 서울운동장으로 불리던 1960년대 중반에 체육 유공자나 국가 유공자 가족들에게 운동장 내 공간을 점포로 임대한 게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2007년 운동장 철거 당시 야구장 건물에 27곳 축구장 건물에 39곳이 있었다고.

운동장뿐 아니라 을지로6가와 7가 일대에는 각종 운동용품을 파는 점포와 노점이 많았었다. 지금 밀리오레가 들어선 자리는 ‘을육스포츠’라는 대형 체육사가 있었다.

하지만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되며 운동장에 입주했던 체육사들은 다른 장소를 구해 떠나야 했다. 일부는 잠실종합운동장으로 다른 일부는 을지로6가나 7가의 점포들로. 

DDP 건너편 을지로7가의 체육사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DDP 건너편 을지로7가의 체육사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을지로7가의 한 골목. 과거 체육사가 있었던 흔적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을지로7가의 한 골목. 과거 체육사가 있었던 흔적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하지만 동대문운동장 철거 후 그 일대에서 체육사 상권은 쇠락한 듯 보인다. 지금 DDP 건너편 을지로7가에 가면 체육사를 여럿 볼 수 있다. 하지만 활기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문 닫은 점포도 꽤 있다. 이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우리체육사’의 경우 잠실종합운동장과 장충단로에서 매장 두 군데를 운영하다가 광희문 앞 매장 하나로 합쳐 이전했다.

우리체육사 간판에는 ‘since 1972’라 쓰여 있다. 그런데 우리체육사의 강석용 대표는 ‘우리’라는 상호를 쓴 게 1972년부터이고 그전에는 다른 이름의 간판이었다고 기억했다. 강대표는 우리체육사에서 직원으로 일을 하다 1979년에 인수했다고.

강대표에 따르면 1970년대 체육사 매출은 겨울철 스케이트 판매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한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 겨울철이면 동네 빈터마다 스케이트장이 들어섰는데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스케이트를 즐겼었다. 

과거 신문을 검색하니 1970년대 겨울철이면 스케이트를 고르는 방법과 서울운동장 일대에서 파는 스케이트 가격 정보 등을 전하는 기사가 많다. 서울운동장의 체육사에서 조립한 스케이트도 있었는데 브랜드 스케이트와 비교해 저렴해 인기 있었다고 한다. 우리체육사도 조립 스케이트를 취급했다고.

“스케이트 날은 스케이트 회사에서 조달했고, 구두 공장에 부츠 제조를 맡겼죠. 이렇게 들여온 날과 부츠를 직원들이 직접 조립해 저렴한 스케이트를 전국에 공급할 수 있었어요.”

우리체육사. 광희문 앞 퇴계로에 있다. 간판에 'Since 1972'라 쓰여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우리체육사. 광희문 앞 퇴계로에 있다. 간판에 'Since 1972'라 쓰여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하지만 시절이 변하며 사람들이 택하는 운동용품의 종류도 변하고 쇼핑 방법도 변했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구매하기보다는 인터넷 쇼핑으로 저렴한 제품을 찾게 되었다고.

그래서 을지로6가와 7가 일대의 체육사들도 차츰 문을 닫는 추세라고 한다. 우리체육사에서 도로 건너편으로 광희문이 보였다. 광희문 동쪽은 신당동이다. 한양도성이 있었을 때는 도성 바깥 지역이다. 

신당동의 시구문 시장과 대장간 거리

광희문 앞에 서면 신당동 쪽으로 골목이 하나 보인다. 그 길에 시구문 시장이 있었다. 시구문은 광희문이 시신을 내보내는 문이라 붙은 별칭이다. 광희문 건너 신당동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서민들이 자리 잡은 동네다. 자연스럽게 집들이 모여 있는 골목 초입에 시장이 들어섰다. 그곳이 시구문 시장이다.

시구문 시장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누구는 20여 년 전까지 있었다고 하고 누구는 30여 년 전까지 있었다고 기억했다. 관련한 자료를 찾기도 힘들었다. 다만 오래된 점포가 그때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골목길 초입의 ‘광희문 야채’ 가게 주인은 시구문 시장 시절부터 장사했다고 했다. 75세의 야채가게 주인은 40년이 넘는 경력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시장 골목 초입에서 노점을 하기도 했다고. 

'광희문 야채'. 광희문 건너 신당동 골목 초입에 있다. 과거 시구문 시장이 있던 곳이다. 75세의 주인은 시구문 시장 시절부터 40년 넘게 장사해 왔다고 한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광희문 야채'. 광희문 건너 신당동 골목 초입에 있다. 과거 시구문 시장이 있던 곳이다. 75세의 주인은 시구문 시장 시절부터 40년 넘게 장사해 왔다고 한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시구문 떡 방아간'. 광희문 건너 신당동 골목에 있다. 과거 시구문 시장이 있던 곳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시구문 떡 방아간'. 광희문 건너 신당동 골목에 있다. 과거 시구문 시장이 있던 곳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골목을 조금만 올라가면 간판부터 오랜 경력을 보여주는 떡집이 나온다. ‘시구문 떡 방아간’이다. 55세 아들이 어머니의 대를 잇고 있는데 50여 년 전에 개업했다고 했다. 현재 등록된 상호는 ‘신당 떡 방앗간’이지만 이 일대의 역사성이 담긴 옛 간판을 차마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광희문 앞 퇴계로를 신당동 방향으로 좀만 가면 대장간 거리가 나온다. 그런데 대장간 거리라고 하기엔 소소하다. 대장간 세 개가 있으니까. 하지만 과거 이 일대에는 100개가 넘는 대장간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 일대의 과거 이름 중에는 대장간을 의미하는 지명이 있다. 대장고개와 풀무재. 대장고개는 대장간 고개를 의미하고 풀무재는 대장간의 풀무를 이름으로 한 고개 이름이며 마을 이름이다. 

대장고개는 중구 쌍림동 일원에 있었고, 풀무재는 중구 묵정동 충무로5가 장충동2가에 이르는 곳의 지명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동네를 야현동(冶峴洞)으로 부르기도 했다.

신당동 대장간 거리의 한 점포. 과거 이 일대에는 100개가 넘는 대장간이 있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신당동 대장간 거리의 한 점포. 과거 이 일대에는 100개가 넘는 대장간이 있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이 지역에 대장간이 많이 있었던 배경이 있다. 지금의 을지로6가와 7가에는 훈련원과 하도감 등 조선시대의 군사 시설이 있었다. 그래서 병장기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대장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도성 밖은 농사를 많이 지었으니 농기구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대장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자료를 종합하면 현재의 국립의료원 일대부터 을지로7가를 지나 한양공고 앞까지 대장간 거리가 있었다. 광복 즈음에는 100개가 넘는 대장간이 있었는데 1970년대까지만 해도 70여 개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바로 이 구간을 지나는 지하철 2호선 공사로 대장간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은 한양공고 건너편에 세 곳만 남아 있다. 한 주인은 대장간에서 만든 제품이 필요해 찾아오기보다는 낯선 분위기의 사진이 필요해 찾아오는 이가 더러 있다며 불편한 속내를 내비쳤다. 

그러고 보면 광희문 앞 퇴계로는 체육사와 대장간이 번창했던 이 일대 과거의 풍경을 축소해 액자에 담은 모습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광희문 앞 퇴계로. 광희문 너머 가운데에 보이는 골목이 시구문 시장이 있던 곳. 도로 따라 왼쪽으로 조금만 가면 신당동 대장간 거리가 나온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광희문 앞 퇴계로. 광희문 너머 가운데에 보이는 골목이 시구문 시장이 있던 곳. 도로 따라 왼쪽으로 조금만 가면 신당동 대장간 거리가 나온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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