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강대호 기자] 을지로 일대를 걷다 보면 과거와 현재를 함께 볼 수 있다. 마치 서울 도심의 발전 과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비교적 최근에 지은 고층 건물들이 있는가 하면 1970년대 이전에 지은 상대적으로 낮은 건물들이 있기도 하다.
특히 을지로3가에서 5가까지 대로변에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건축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 허름한 건물일 수도 고풍스러운 건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헐릴 확률이 높다. 을지로의 가림막 쳐진 구역에 있던 건물들처럼. 그 안에 을지면옥과 을지다방이 있었다.
건물과 함께 헐린 추억의 맛집
을지로3가역을 나서면 청계천 방향으로 커다랗게 가림막이 쳐진 구역이 나온다. 이 구역 도로변에는 각종 공구 가게가 있었고 골목에는 철공소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그리고 도로변 한 건물에는 사람들이 즐겨 찾던 명소가 있었다. 을지면옥과 을지다방이 그곳이었다.
을지면옥은 평양냉면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을지면옥 주인은 ‘필동면옥’ 주인과 자매 사이다. 이들 자매는 아버지로부터 냉면 요리법을 이어받았다. 이들의 아버지는 평양냉면 마니아들이 성지로 꼽는 ‘의정부 평양면옥’ 창업주다.
의정부 평양면옥은 1969년에 연천에서 열었다가 1987년에 의정부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필동면옥’은 첫째 딸이 1985년에, ‘을지면옥’은 둘째 딸이 1985년에 개업했다.
그러니까 을지면옥은 2025년에 개업 40주년을 맞는다. 한국의 자영업 상황에서 40년이면 노포에 해당하지 않을까. 과거 을지면옥은 오래된 건물에 있어서 노포라는 느낌을 주었고 그런 분위기가 냉면의 맛을 더했었다.
을지다방도 1985년에 문을 열었다. 공구 가게 간판들 사이에서 빨간 글씨의 다방 간판은 존재감을 뽐냈었다. 아마도 처음에는 을지로와 청계천 일대의 공구 상가에서 일하는 분들이 주로 찾았을 것이다. 그들을 위해 한때 오전 이른 시각에 라면을 팔았었다.
그런 을지다방은 힙한 장소로 알려졌었다. BTS가 이곳을 방문한 것이 알려진 후부터였다. 그래서 다방에 들어서면 BTS가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과 굿즈들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많은 팬이 방문했었는데 외국인들도 많이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을지다방과 을지면옥이 입주한 건물 일대가 한 필지로 묶여 재개발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울시는 지난 2015년에 ‘을지면옥’과 ‘을지다방’을 ‘서울시 생활유산’으로 지정했었다.
하지만 이런 결정이 개발을 유보하거나 보존을 강제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미래유산’과 달리 생활유산은 지주와 시행사가 합의하면 재개발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결국 두 노포가 입주한 건물은 물론 주변 건물들까지 싹 철거되었다. 가림막이 쳐진 구역은 그동안 유적이나 유물이 묻혀 있는지 검사했고 지금은 건축 준비 중인 것으로 보인다.
노포가 옮겨간 새 점포
지난해 말 을지로 일대 재개발 현장을 취재하다가 우연히 을지다방 간판을 보게 되었다. 을지로3가역 주변을 지나는데 익숙한 상호의 간판이 보였다. BTS가 방문했던 그 다방이라고 입간판에 쓰여 있었다.
<뉴스포스트>는 2022년 2월 을지다방을 취재했었다. 당시 박옥분 사장은 시행사 측과 보상과 명도 소송으로, 그리고 새로운 가게 자리를 알아보느라 무척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가게를 이전한 후 안정되어 가는지 편안한 모습이었다.
가게는 예전 크기와 비슷했고 BTS의 사진과 굿즈가 전시된 모습도 같았다. 물론 메뉴도 똑같았다. 명도와 이전 과정의 자초지종을 물으니 박옥분 사장은 말을 아꼈다. 다만 “잊지 않고 손님들이 찾아주는 것에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오전에는 뜸했는데 점심시간이 되니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외국인들과 젊은 커플이었는데 복고적 분위기를 맛보려는 이들로 보였다.
을지면옥이 새로 옮겨간 장소도 종로를 취재하다가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 지난 4월 초 낙원상가 인근 종로세무서 앞길을 지나는데 한 건축 현장이 보였다. 고 하선정 요리연구가 소유의 건물이 리모델링 중이었다. 그런데 건물 외벽에 ‘을지면옥’이라 쓰여 있었다.
종로 일대는 개발하려면 규제가 많다. 역사적인 지역이라 혹시 유물이나 유구라도 발견되면 공사가 중지될 수도 있다. 그래서 리모델링을 하는 모양이었다. 5층짜리 건물인데 아마도 3층까지 식당으로 개조하는 듯 보였다.
5월이 되자 을지면옥 오픈 소식이 들려왔다. 을지로에 있던 을지면옥이 2022년 6월에 문을 닫았으니 거의 2년 만에 문을 연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낙원동 을지면옥에 평양냉면 마니아는 물론 힙한 장소를 찾는 이들이 몰려들었다. 각종 SNS에 새로 문을 연 을지면옥 건물과 냉면 사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6월 어느 날 낙원동 을지면옥을 방문했다. 저녁 영업이 5시 30분부터라고 해 여유 있게 5시 즈음 가보았다. 이미 줄이 길게 서 있었다. 이른바 ‘오픈런’이었다.
줄 선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는데 지방에서 일부러 올라온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평양냉면이 비싸다는 볼멘소리도 들렸다. SNS에도 을지면옥의 평양냉면을 먹으려고 반차를 냈다거나 멀리서 왔다는 게시글을 꽤 볼 수 있는 한편 비싼 가격에 대한 불만의 글도 볼 수 있다.
대기 줄이 길어지자 을지면옥 측은 오픈 예정 시각보다 이른 시각에 손님들을 입장시켰다. 줄은 길었지만, 회전은 빨랐다. 아마도 냉면만 먹는 손님이 많아서 그런 것으로 보였다. 편육이나 수육에 술을 곁들이는 손님들은 좀 더 오래 머물렀다.
그런데 손님들의 행동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냉면이 나오면 먼저 사진을 찍었다. 식당을 둘러보니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건물도 바뀌었지만, 손님들 면면도 그렇다. 예전에는 나이 지긋한 이들이 많았다면 지금은 거의 청년 세대로 보였다.
그렇게 이어지는 노포의 전통
우여곡절 끝에 을지다방은 옛 건물 인근으로 옮겨갔고 을지면옥은 을지로를 떠나 종로구 낙원동으로 이전했다. 오래된 건물이 주는 노포 분위기는 아니지만 두 명소가 40년 가까이 이어온 전통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서울 강북 도심에는 ‘미래유산’ 혹은 ‘서울시 생활유산’ 명판이 붙은 노포가 꽤 있다. 오래된 가게인 만큼 입주한 건물이 재건축 대상이 되거나 주변이 재개발 구역이 되기도 한다. 이때 이들 노포는 방해물로 취급된다. 을지다방이나 을지면옥처럼.
두 가게의 사례는 낡고 허름하면 싹 헐어버리는 도시정비사업에 호흡 조절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노포의 가치를 알아보는 시민들이 많다는 걸 보여주고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