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원구단 자리에 들어선 조선호텔과 차이나타운에 들어선 플라자호텔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 방한이 서울 도심 재개발에 영향" 주장도

[도시탐구] 시청 맞은편 판자촌에 호텔들이 들어선 이유

2024. 07. 18 by 강대호 기자

[뉴스포스트=강대호 기자] 시청역 교통사고는 서울시청 앞 일상을 바꾼 듯 보인다. 인도를 걷는 시민들은 도로 위 차량의 움직임을 살필 게 분명하고 시청역 주변을 운행하는 차들은 속도를 줄이고 교통신호를 지키는 건 물론 주변 상황까지 살필 게 분명하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교통사고가 난 도로 방향을 바라보면 조선호텔과 프라자호텔이 있고 이들 호텔은 서울시청 일대 도로 구획에도 영향을 끼쳤다. 서울 도심 개발 역사이기도 한 서울시청 앞 호텔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서울시청과 플라자호텔.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서울시청과 플라자호텔.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원구단 자리에 들어선 조선호텔

조선호텔은 원래 원구단이 있던 자리다. 원구단은 1897년(광무 원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에 오른 즉위식이 열린 곳으로 선조 임금이 의안군에게 선물한 남별궁 터였다. 남별궁은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장 우키다의 진지로 쓰이다가 명나라 이여송 장군 휘하의 사령부로 쓰였다. 왜란 후에는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영빈관으로 쓰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며 원구단과 그 일대는 조선총독부가 국유지로 지정했다. 그리고 1914년 원구단이 헐린 자리에 지하 1층과 지상 4층의 근대적 호텔이 들어섰다. 그래서 지금은 ‘황궁우’와 석조 대문 정도만 남아 있다. 황궁우는 삼층의 팔각 건물로 하늘신 위패를 보관하던 곳이었다.

원구단의 황궁우와 조선호텔.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원구단의 황궁우와 조선호텔.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총독부의 철도국이 운영한 이 호텔의 이름은 ‘조선경성철도호텔’이었다. ‘철도호텔’ 혹은 ‘조선호텔’로 불린 이 호텔은 일본에서 오는 귀빈이나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오는 서양인들만 묶을 수 있는 고급호텔이었다.

광복 후 조선호텔은 미군 사령관인 하지 중장 등 고위 장성들의 숙소로 이용되었다. 한국전쟁 중 조선호텔은 전선에서 휴가 나온 미군들의 휴양소로 이용되다가 종전 후에는 미8군 장교 숙소로 이용되었다. 그러던 1961년 11월 한국 정부의 교통부가 조선호텔 운영권을 반환받았다. 

정부는 1962년 ‘한국관광공사’를 설립해 고급호텔 설립과 운영을 맡겼고 1963년 8월부터 한국관광공사는 조선호텔을 운영하게 된다. 하지만 시설이 낡아 외국 기업과 합작해 새 호텔을 짓기로 했다. 

원구단 석조 대문과 조선호텔.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원구단 석조 대문과 조선호텔.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그렇게 선택된 기업이 미국의 아메리칸 항공사였다. 새로운 조선호텔은 1967년 10월 공사에 들어가 1970년 3월에 개관했다. 지하 2층에서 지상 18층에 470개 객실이 있는 고급호텔이었다.

이후 조선호텔의 주인은 바뀌게 된다. 1979년에 아메리칸 항공사는 조선호텔 경영권을 미국 웨스턴호텔 측에 양도했다. 1983년에는 한국관광공사가 갖고 있던 호텔 부동산과 주식 지분 일체가 공매 입찰의 형식으로 삼성그룹에 양도되었다. 

지금은 범삼성가로 분류되는 신세계백화점 그룹에서 조선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병풍처럼 서 있는 플라자호텔

서울시청 앞 광장은 넓다. 그런데 광장에 서면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다. 서울시청 맞은편의 플라자호텔이 시야를 막는 모양으로 서 있기 때문이다. 건물 모양도 안쪽으로 살짝 휘어 병풍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약 그 자리에 호텔이 없었다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지금보다는 넓게 남산을 조망할 수 있지 않았을까.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플라자호텔이 있던 자리와 소공동 일대에는 차이나타운이 있었다. 시청역 교통사고가 난 바로 그 일대다. 명동 일대의 차이나타운도 유명했지만, 수표교 근방과 서소문 근처 그리고 소공동 일대에도 화교들이 운영하는 각종 매장이 많았었다.

한반도에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한 건 1880년대부터다. 당시 일본이 조선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는데 청나라도 조선에 대한 연고권을 강화하기 위해 백성들을 이주시킨 게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광복 이후에도 중국 내전을 피해 산둥성 등지에서 중국인들이 대거 이주했다. 소공동의 화교들이 주로 산둥성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960년대 소공동의 차이나타운 인근은 슬럼가였다. 중국인 상가 주변으로 판잣집들이 들어섰었는데 당시 서울시청에서 보면 바로 맞은편에 판자촌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플라자호텔 주변이었다. 그랬던 차이나타운과 판자촌이 사라졌는데 미국 대통령 방한의 나비효과였다.

1966년 존슨 미국 대통령 방한 환영대회가 열린 서울시청.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1966년 존슨 미국 대통령 방한 환영대회가 열린 서울시청.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1966년 10월 31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성대한 환영 행사가 펼쳐진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외신 기자 천여 명도 모였다. 행사 장면이 위성 생중계로 세계 각국에 전송되었다. 그런데 카메라가 서울시청 입구의 단상으로만 향하지는 않았다. 시청 주변은 물론 멀리 남산 일대까지 화면에 담았다. 거기에는 1960년대 중반 서울의 속살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니까 서울시청 건너편의 판자촌과 남대문 일대와 남산자락에 들어선 판자촌이 카메라에 잡혀 전 세계로 전송되었다. 당시에는 한국은행이나 신세계백화점이 그나마 고층이라 시청 앞에서 남산까지 시야가 확 뚫려 있었다. 그러니 가난한 한국의 모습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정작 남한에 사는 한국인 대부분은 이 장면을 보지 못했다. 당시 텔레비전 보급률 낮았던 때문이었다. 반면 해외에 사는 교포들은 고국의 모습이 나온다고 해서 대거 텔레비전 앞에 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본 건 조국의 빈곤이었다. 

이 화면을 본 재외교포들이 청와대 민원비서관실에 항의 편지를 많이 보냈다고 한다. 미국은 거의 모든 지역의 교민회에서 보냈었는데 1968년까지 이어졌다고. 

서울시 공무원 시절 서울 도심 개발 계획 수립에 참여한 고 손정목 서울시립대 교수는 존슨 대통령 방한을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도심 재개발을 마음먹었을 거라고 그의 여러 저술에서 밝혔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바라본 플라자호텔.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바라본 플라자호텔.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결국 차이나타운 처리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후 1976년 10월 플라자호텔은 문을 열었다. 존슨 대통령 환영 행사 때 전 세계로 전송된 빈곤한 서울의 풍경이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래서인지 마치 병풍처럼 보이는 면도 있다. 

그런 플라자호텔 일대는 1970년대에 ‘서울 도심부 재개발 소공 제1지구’에 속했었다. 즉 플라자호텔은 서울 도심부 재개발사업 제1호나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서울시청 앞 고급호텔들은 서울 도심의 풍경을 바꿨지만 한편으로는 비극적인 사고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사고의 여파는 도로 구획과 신호 체계에 대한 점검은 물론 고령 운전자에 대한 이슈를 낳았고 브레이크 페달 블랙박스 설치에 대한 공론까지 일고 있다.

그러고 보면 도시의 발전은 새로이 토지구획을 정비하고 보기 좋은 건물을 짓는 거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 여러 분야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도시는 변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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